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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 노신공원서 당대 영웅 윤봉길 의사를 만나다

[임시정부, 그 길을 가다 ③] 독립을 위해 목숨까지 바쳤던 청년 나석주, 윤봉길 의사 이야기

2019.04.03 정책기자 최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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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을 때까지 장장 27년 동안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을 벌였다. 독립을 향한 길에 남녀노소는 없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활약했던 임시정부. 여기에는 필자와 비슷한 20대 청년들도 있었다. 혈기왕성했던 이들은 일제의 총칼이 두렵지 않았다. 투쟁의 선봉에 서서 장렬히 전사했고, 또 끝까지 살아남아 해방 이후 조국을 이끌기도 했다. 과연 내가 그 시절에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상해임시정부 청사
상해 임시정부 청사.
 

머나먼 땅 중국 상해(상하이)에서, 항주(항저우)에서, 중경(충칭)에서 조국의 독립을 이끈 청년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중국 내 임시정부 청사 및 의거지로 떠났다. 현장에서 보고 느낀 그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스승 김구의 생일상을 차려준 제자 나석주

화려한 쇼핑몰 속 작은 2층 건물들. 서로 마주 보는 구조로 된 공동주택 모양을 띈 영경방(융칭팡)은 임시정부가 상해에 머물렀을 때, 김구의 거처로 쓰였다. 안창호와 여운형 등 임정에서 활약한 많은 독립운동가가 스승과 제자 사이였듯 김구도 수많은 제자를 뒀다. 하지만 스승의 생일상을 차려준 제자는 단 한 명. 상해 시절 스승을 호위했던 나석주 의사다.

상해임시정부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걸리는 영경방.
상해 임시정부 청사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걸리는 영경방.
 

일제강점기 전, 김구 선생이 설립한 양산 학교에서 수학한 나석주는 임시정부 수립 이후 스승 김구의 휘하로 들어갔다. 당시 김구는 경무국장, 나석주는 경호관으로 임정 요인들을 호위했다. 그러던 중 아내 최준례 여사를 잃고 일제의 감시 때문에 임종조차 지킬 수 없던 스스로를 자책하며 괴로워하던 스승을 위해 자신의 옷을 팔아 돈을 마련한다.

나석주 의사는 영경방에서 스승 김구 선생의 생일상을 차렸습니다.
나석주 의사는 영경방에서 스승 김구 선생의 생일상을 차렸다. 사진은 상해 임시정부 청사로 향하는 골목.
 

어렵게 마련한 돈으로 스승을 위한 생일상을 차린 그와 생일상을 받은 김구 선생. 이후 서로를 완전히 신뢰한 김구 선생과 나석주는 1926년 폭탄 의거를 계획했다. 국내로 잠입한 그는 12월 28일,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졌고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 2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라!” 라는 말을 남기고 자결한다.

폭탄 의거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지만 김구는 아꼈던 제자 나석주를 잃었다. 이후 나석주를 기리는 마음에서 김구 선생은 한 번도 생일상을 받지 않았다. 70년 넘게 살았던 김구의 생일상은 딱 한 번, 영경방에서 제자 나석주가 차려준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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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경방은 임정 요인들의 거주지였다.
 

스물일곱에 임정에 합류, 7년 동안 임정 요인을 경호했던 나석주와 그의 스승 김구 선생. 그들의 이야기가 영경방을 떠날 때까지 마음속에 자리잡아 쉽사리 발을 뗄 수 없었다.

당대 영웅 윤봉길, 영원히 기념

현재 루쉰 공원으로 이름이 바뀐 훙커우 공원
현재 노신공원으로 이름이 바뀐 홍구공원.
 

과거 홍구(훙커우)공원으로 불렸던 노신(루쉰)공원. 윤봉길 의사의 의거 장소로 잘 알려진 곳이다. 당시 중국 내 항일운동을 이끌었던 장개석(장제스)이 “중국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단 한 명의 조선 청년이 해냈다”며 극찬했고, 이후 임시정부에 전폭적인 지원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만들었다. 당시 윤봉길 의사의 나이는 스물다섯이었다.

그는 “사내 대장부는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 라는 말을 남기고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채소 장사를 하며 당시 독립운동의 본거지였던 상해를 찾은 윤봉길. 김구를 만나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이봉창 의사처럼 폭탄 의거를 계획한다.

루쉰 공원에 찾아온 봄.
노신공원에 찾아온 봄. 임시정부도 ‘광복’이라는 봄을 기다리며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목표는 천황의 생일과 상해사변 전승 기념행사에서 폭탄을 투척하는 것. 한치의 오차도 없는 치밀한 계획 속에 1932년 4월 29일, 운명의 날이 밝아오자 “제게는 이제 한 시간 밖에 소용없는 물건”이라며 김구의 시계와 자신의 시계를 맞바꿨다. 이후 참석한 기념행사에서 폭탄을 던져 시라카와 대장을 척살하는 등 일제의 최고위층을 처단했다.

중국 정부도 항일 운동의 대명사였던 윤봉길을 기려 노신공원 내에 윤봉길 기념관을 건립했는데, 한국어와 중국어로 윤봉길 의사의 생애와 활약상에 대해 소개하고 있었다.

루쉰 공원 내에 있는 윤봉길 의사 기념관
노신공원 내에 있는 윤봉길 의사 기념관.
 

노신공원에서 가장 놀랐던 점은 무엇보다도 현지 중국인들도 윤봉길 의사를 기억한다는 점. 윤봉길 의사의 의거 장소로 추정되는 곳에 한 중국인이 붓글씨로 ‘어서오세요. 영원히 기념 당대 영웅 윤봉길 의사 정의 필승’을 적고 있었다.

순간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다. 한국사 시험에 대비하기 위해 외웠던 윤봉길 그 이름을 중국인이 기억하고 있었다. 한국인만 오면 반갑다는 듯 서툰 한국어로 써내려간 ‘당대 영웅 윤봉길 의사’.

영원히 기념, 당대 영웅 윤봉길 의사.
영원히 기념, 당대 영웅 윤봉길 의사.
 

일제의 심장을 향해 당당히 폭탄을 던지는 모습, 사형선고를 받으면서까지 “이 철권으로 일본을 즉각 타도하려고 상해에 왔다”며 일제를 호령했던 눈빛은 아직도 내 마음을 일렁이게 만든다. 중국인이 적은 한국어와 함께.

임시정부에서 활약한 수많은 청년들의 현장을 살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사실 탐방 이전에는 조국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면서 독립운동을 하겠냐는 질문에 “아니오”라고 대답했었다. 목숨까지 포기하기에는 무서웠다.

하지만 100년 전 청년들의 치열했던 독립투쟁 현장을 다녀온 지금 나는 당당히 “예” 라고 답할 것이다. 100년 후 그들이 꿈꿨던 나라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청년의 입장에서, 100년 전 이들의 희생이 부끄럽지 않도록 말이다.



최종욱
정책기자단|최종욱
cjw0107@naver.com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이런 사회를 꿈꾸는 대학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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