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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의 고향에서 열리는 고품격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정태남의 클래식 여행] 오스트리아/잘츠부르크(Salzburg)

2020.08.24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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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고향 잘츠부르크는 매력이 넘치는 보석 같은 도시이다. 사실 잘츠부르크는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 하나로 손꼽힌다. 거기에다가 잘츠부르크는 ‘모차르트’라는 이름 하나만으로도 전 세계로부터 수많은 관광객들을 끌어들인다.

매력 넘치는 보석 같은 잘츠부르크의 야경.
매력 넘치는 보석 같은 잘츠부르크의 야경.

크고 작은 산들이 둘러져 있고 그 사이로 잘차흐(Salzach) 강이 흐르는 잘츠부르크 풍경의 핵심은 산 위에 세워진 요새 호헨잘츠부르크(Hohensalzburg)이다. 그 아래 평지에는 대성당이 초점을 이룬다. 대성당은 이탈리아 건축가의 손에 의해 1628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완공되었으니까 모차르트가 태어나기 약 130년 전에 그의 고향에 처음으로 이탈리아의 바로크 건축이 이식되었던 것이다. 대성당 주변의 골목길들은 모차르트의 동상이 있는 널따란 광장으로 통한다. ‘성인’과 같은 모습의 모차르트 동상은 대성당 쪽을 바라보고 있다.
 
잘츠부르크의 전체적인 인상은 아기자기한 자연과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큰 틀 속에서 조화롭게 공존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모차르트의 음악과 잘츠부르크의 인상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즉, 자연미, 친밀함과 웅장함의 우아한 조합, 그리고 모든 것을 아우르는 조화 등이다.

모차르트 동상.
모차르트 동상.

20세기 초반, 오스트리아의 극작가 후고 폰 호프만스탈은 <유럽의 심장 중의 심장, 잘츠부르크>라는 글에서 잘츠부르크에서 모차르트와 같은 음악가가 태어날 수 밖에 없었다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잘츠부르크는 서쪽의 스위스와 동쪽의 슬라브 국가들 중간에, 또 북쪽의 독일과 남쪽의 롬바르디아(밀라노를 중심으로 하는 이탈리아의 북부지방)의 중간에 놓여있다.

그리고 잘츠부르크는 도시와 시골의 중간이며, 과거와 현재의 중간이며, 바로크 왕후의 기품과 순박한 농민 같은 모습의 중간이다. 모차르트는 바로 이러한 모든 양상을 타고났다. 중부유럽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곳을 찾아볼 수 있으랴.’ 

후고 폰 호프만스탈이 찬양한 이 아름다운 도시를 여름에 찾게 되면 거리와 광장에서는 생동감 넘치는 품격을 더욱 느낄 수 있는데 그것은 유명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세계적인 음악축제의 대명사로 통하는 이 페스티벌은 1920년부터 시작했다. 이런 종류의 음악제를 정기적으로 개최하려는 계획은 이 페스티벌이 시작되기 훨씬 이전부터 있었다. 하지만 그 계획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에야 연출가이자 흥행사 막스 라인하르트, 시인 후고 폰 호프만스탈,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중심으로 서서히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오스트리아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하는 바람에 전쟁이 끝난 후 사회적 분위기는 매우 암울했다. 이런 시기에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개인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 국민들이 겪는 상실감을 극복하기 위한 프로젝트가 되었다. 페스티벌 기획자들은 이 대담한 프로젝트를 실현할 최적의 장소로 자연 풍광이 아름답고 건축적 매력도 갖춘 잘츠부르크를 선택했다.

모차르트가 오르가니스트로 봉직했던 대성당. 그 앞 광장은 야외공연장으로 사용된다.
모차르트가 오르가니스트로 봉직했던 대성당. 그 앞 광장은 야외공연장으로 사용된다.

페스티벌 기획자들이 원했던 것은 ‘평화를 가져오는 예술’과 ‘최고의 프로그램’이라는 두 가지의 기본 원칙을 바탕으로 오페라와 연극을 최고의 수준으로 공연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1920년 8월 22일 제1회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단 한 편의 연극 공연으로 일단 시작되었다.

당시 극장을 새로 지을 비용이 없었기 때문에 대성당 앞 광장에 설치한 가설무대에서 후고 폰 호프만스탈의 연극 <예더만>이 초연되었다.

이듬해 1921년에는 페스티벌 프로그램에 오케스트라와 실내악 공연이 추가되었고 1922년에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작품들이 무대에 올려졌다.

이로써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핵심 구조, 즉 오페라, 연극, 콘서트 세 축이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이처럼 초라하게 시작했으나 오늘날은 세계 최대의 고품격 클래식음악 페스티벌로 자리매김하여 매년 많은 고급여행자들을 잘츠부르크로 끌어 들인다.

2019년의 경우, 43일 동안 16개 공연장에서 199개의 공연을 선보였는데 총 78개국에서 온 음악여행자들이 잘츠부르크를 찾았다. 이 페스티벌은 그야말로 엄청난 문화산업으로 성장한 셈이니 ‘잘츠부르크는 모차르트를 낳았고,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를 낳았다’라고도 말 할 수도 있겠다. 게다가 2020년은 100주년이란 매우 뜻  깊은 낀 해이다. 하지만 야심차게 준비해온 100주년 기념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바람에 아쉽게도 대폭 축소되고 말았다. 

매년 여름에 볼 수 있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공연장의 관객들.
매년 여름에 볼 수 있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공연장의 관객들.

그런데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에서 1756년에 태어나 이곳 대성당에서 세례를 받았고, 또한 23세부터 25세까지 대성당에서 오르가니스트로 봉직했지만 35년이라는 그의 짧은 생애 동안 잘츠부르크는 그의 주된 활동무대가 아니었다.

그는 25세 때, 숨통 조이는 듯한 당시 잘츠부르크 대주교와 엄격한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 1791년에 죽음을 맞을 때까지 제국의 수도 빈(Wien)을 활동무대로 삼았다. 다시 말해 당시 잘츠부르크는 그를 보호한 것이 아니라 쫓아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고 보면 모차르트는 본의 아니게 오늘날 잘츠부르크의 ‘수호성인’이 되어버린 셈이다.

정태남

◆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건축 분야 외에도 음악·미술·언어·역사 등 여러 분야에 박식하고, 유럽과 국내를 오가며 강연과 저술 활동도 하고 있다.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 외에도 여러 저서를 펴냈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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