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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의 기본자료 <미암일기>를 남긴 조선 전기 문신

[문인의 흔적을 찾아서] 담양 미암 유희춘 박물관

2021.12.22 이광이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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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의 기본자료가 됐던 보물 <미암일기>를 남긴 조선 전기의 문신 유희춘의 박물관. 미암일기와 목판 등이 보관되어 있다.
선조실록의 기본자료가 됐던 보물 <미암일기>를 남긴 조선 전기의 문신 유희춘의 박물관. 미암일기와 목판 등이 보관되어 있다.

‘내가 을사년에서 갑자년까지 이십년간 안개비 어둑어둑한 가운데 있었고, 을축년과 병인년에야 별과 달의 작은 빛을 얼핏 보았다. 정유년 시월에 해가 다시 환하게 밝은 것을 상쾌하게 바라보게 되었다. …사림의 화는 정유년에 서리를 밟았고, 을사년에 얼음이 얼었으며, 얼어붙기를 이십여 년이었다. 을축년에 이르러 비로소 점차 움직여 정유년에 이르러서야 녹았다. 다만 옛 흔적으로 위훈이 아직 삭제되지 않은 것이 있어서 한 점 응달이 되고 있다고 하겠다.’ 

조선전기 문신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이 쓴 <미암일기>의 부분이다. 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를 가던 전후의 과정을 묘사한 것이다. 을사사화가 시작된 해부터 갑자년(1564)까지 20년의 상황은 안개비를 맞고 있던 때로, 을축년(1565)에 문정왕후가 죽고 윤원형이 실각하면서 이배되던 시기는 별과 달의 작은 빛을 보았던 때로, 그리고 정묘년(1567)에 유배에서 풀려 자유의 몸이 되고 다시 입각하게 되던 무렵은 하늘의 해를 거듭 밝게 빛나던 때로, 간난신고의 여정을 기상(氣象)에 빗대 기록하고 있다.

앞부분은 사화에 얽힌 사적 기록이고, 서리와 얼음, 응달로 표현되는 뒷부분은 시대상황을 묘사한 공적 부분이다.

미암박물관 앞 연못에 독특한 양식으로 건립된 모현관. 미암 유희춘의 작품들이 보관되어 있다.
미암박물관 앞 연못에 독특한 양식으로 건립된 모현관. 미암 유희춘의 작품들이 보관되어 있다.

유희춘은 해배 이후 관직에 재입각할 때인 1567년부터 죽기 전인 1577년(선조10)까지 11년에 걸쳐 매일 일기를 썼다. <미암일기>에는 당시의 공적·사적인 일들이 망라되어 있다. 개인의 사생활부터 견문내용, 관아의 기능, 관리들의 생활, 사회풍속 등이 담겨있다. 특히 동서분당 전의 정계와 사림의 동향, 감사의 직무수행, 경재소와 유향소의 조직운영, 중앙 및 지방관료의 관계 등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해남 해촌서원 외삼문. 유희춘과 최부, 임억령, 윤구, 윤선도, 박백응 등 6현을 배향하고 있다.
해남 해촌서원 외삼문. 유희춘과 최부, 임억령, 윤구, 윤선도, 박백응 등 6현을 배향하고 있다.

실록이 주로 정치 관련 언급인데 반해 이 일기는 선조 초기 조정의 대소사와 백성들의 사회 경제, 문화사를 이해하는데 소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임진왜란으로 1592년 이전의 <승정원일기>가 모두 불타 없어져 <선조실록>을 새로 편찬할 때, 율곡 이이의 ‘석담일기(石潭日記)’와 ‘경연일기(經筵日記)’, 고봉 기대승의 ‘논사록(論思錄)’과 함께 기초사료가 된 것이 이 일기다.

미암(眉巖) 유희춘은 전라도 해남 외가에서 태어나 자랐다. 어머니가 <표해록>을 남긴 최부(崔溥)의 딸이다.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일재 이항, 죽천 박광전 등과 더불어 호남 5현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미암일기와 미암집 목판.
미암일기와 미암집 목판.

미암은 ‘면앙정가’를 남긴 송순의 중매로 24세에 송덕봉과 결혼했다. 송덕봉은 신사임당, 허난설헌, 황진이와 함께 조선4대 여류시인으로 꼽히는 대단한 문재이다. 그녀는 남편이 유배 도중 첩에게서 낳은 딸을 친자식처럼 키우며 홀로 시어머니 삼년상을 치른 효부이기도 했다. ‘덕봉집’을 남겼으나 전하지 않고 <미암일기>에 25수의 시문이 전한다. 1560년 덕봉이 함경도 종성에 유배되어 있는 남편을 찾아 해남에서 3천리 길을 가는 도중에 함경 남북을 가르는 마천령 고개에 서서 노래한 시, 마천령상음(磨天嶺上吟)이 유명하다.

걷고 또 걸어 마천령에 이르니(行行遂至摩天嶺)
동해는 평평한 거울처럼 끝없이 펼쳐있구나(東海無涯鏡中平) 
부인의 몸으로 어이 만리 먼 길을 걸어왔나(萬里婦人何事到)
삼종의 도는 무겁고 이 한 몸은 가벼운 것을(三從義重一身輕)

유희춘의 시 ‘지락음을 지어 아내에게’와 남편의 시에서 차운해 지은 아내 송덕봉의 시가 적힌 시비.
유희춘의 시 ‘지락음을 지어 아내에게’와 남편의 시에서 차운해 지은 아내 송덕봉의 시가 적힌 시비.

유희춘은 25세에 과거 급제하여 정6품 홍문관 수찬과 무장현감을 지냈다. 1547년 양재역(良才驛)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함경도 종성으로 이배되었다. 그 곳에서 19년간 독서와 저술에 몰두하면서 백성들 교육에 힘써 글을 깨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충청도 은진에 이배되었다가,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삼정승의 상소로 석방되었다. 해배 직후 몸이 허약해진 유희춘을 허준이 정성으로 치료했고, 유희춘은 허준을 내의원 의원으로 천거하여 ‘동의보감’을 탄생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대사성·부제학·전라도관찰사 등을 지냈고 예조·공조참판, 이조참판을 지내다가 사직 낙향했다. 시강원설서 재임 시에 세자(후의 인종)의 학문을 도왔고, 선조 초에는 경연관으로 경사(經史)를 강론했다.

미암 유희춘 사당.
미암 유희춘 사당.

유희춘에게서 학문을 배웠던 선조는 항상 “내가 공부를 하게 된 것은 희춘에게 힘입은 바가 크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기록되어 있다. 처가인 담양으로 낙향하여 김인후, 송순, 고경명 등과 교우하며 후학을 양성했다. 만년에 경서의 구결언해(口訣諺解)에 참여해 <대학>을 완성하고, <논어>를 주해했으며, 11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미암일기>를 썼다. 64세를 일기로 숨졌다.

미암집 목판은 유희춘의 21권 10책의 시문집으로 1868년 후손들이 편집하여 발행했고, 현재 ‘미암박물관’에 396판이 보존되어 있다. ‘유희춘 미암일기 및 미암집목판’은 조선시대의 일기류 및 판본으로 1963년 보물(260호)로 지정됐다. 모현관은 박물관 앞 연못 가운데 1959년 지은 독특한 석조건물인데 이곳에 그의 기록들이 남아있다.

이광이

◆ 이광이 작가

언론계와 공직에서 일했다. 인(仁)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애인(愛人)이라고 답한 논어 구절을 좋아한다. 사진 찍고, 글 쓰는 일이 주업이다. 탈모로 호가 반승(半僧)이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과 인문서 ‘스님과 철학자’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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