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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 음악의 거장 헨델의 고향

[정태남의 클래식 여행] 독일/할레(Halle-Saale)

2022.06.16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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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레는 라이프찌히에서 북서쪽으로 40여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인구 24만 정도의 작은 도시로 라이프찌히에서 전철로 26분 정도 걸린다. 할레는 잘레(Saale)강 가에 있다고 하여 독일에서는 보통 할레-잘레(Halle-Saale)라고도 표기한다. 할레 역에서 나와 북서쪽으로 길게 뻗은 상가거리인 라이프찌거 슈트라세(Leipziger Strasse)를 따라 시내에 들어서니 할레의 심장부인 널따란 시장광장(Markt Platz)이 펼쳐진다.

붉은 탑(오른쪽)과 성모교회(왼쪽)가 있는 할레의 심장, 시장광장(Markt Platz).
붉은 탑(오른쪽)과 성모교회(왼쪽)가 있는 할레의 심장, 시장광장(Markt Platz).

이 광장에는 땅에서 막 솟은 듯한 높은 붉은 탑과 성모교회가 할레 시가지의 지붕선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다. 광장에는 바로크 시대의 복장을 한 인물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데 다름 아닌 할레가 낳은 위대한 아들 게오르크 헨델(1685-1759)이다. 그의 오른 손에 보이는 악보는 <메시아>이다. 그가 1741년에 영국에서 작곡한 이 오라토리오는 불멸의 기념비적인 종교음악 작품 중 하나로 손꼽힌다. 
 
헨델이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냈던 집은 시장광장 북서쪽으로 300미터 거리에 있는 대성당 광장 가까이에 보존되어 있다. 음악의 역사를 보면 아주 희귀하고 이상한 해후가 가끔 있는데, 바흐와 헨델의 탄생은 그 하나의 본보기이다.

헨델의 동상.
헨델의 동상.

1685년 초반, 이 두 사람은 마치 쌍둥이별처럼 독일 중부 튀링엔의 숲의 서쪽 아이제나흐와 동쪽 할레에서 각각 태어났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헨델은 바흐보다 한 달 가량 앞선 2월 22일에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게오르크. 그의 아버지 게오르크 헨델(1622-1697)은 자수성가한 인물로 경력이 좀 특이했다.

동세공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가업을 잇지 않고 이발사의 견습공이 되었다. 당시 이발사는 외과의사도 겸하고 있었다.

이발소 주인이 죽자 그는 주인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이발업을 계속하다가 나중에는 작센 선거후의 궁정의사가 되었다. 그는 60세 때 아내가 죽자 30세 연하의 도로테아 타우스트와 재혼했고, 3년 후에 게오르크 헨델이 태어났다.

헨델은 부모가 음악과는 무관했기 때문에 그에게 음악적인 재능이 나타날 기회는 전혀 없었다. 따라서 신동이라고 불린 일도 없었다.

한번은 아버지를 따라 궁정에 따라갔다가 궁정 안에서 오페라 연습하는 소리를 듣고는 그만 자신도 모르게 노래를 따라했는데 그에게 관심을 둔 악장 요한 클리거(1649-1725)는 그가 아버지를 따라 궁정에 올 때마다 오르간을 조금씩 가르쳤다.

어린 헨델은 뛰어난 재능을 보였기 때문에 선제후도 이 사실을 알게 되어 그에게 음악선생을 붙여주도록 명했다. 이리하여 헨델은 당시 할레에서 최고의 음악가이자 성모교회의 오르가니스트인 프리트리히 빌헬름 짜하우(1663-1712)의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헨델이 음악의 길로 나가는 것은 허락하려하지 않았다. 완고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현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당시 궁정에 근무하던 음악가의 지위는 하인과 다를 바 없을 뿐 아니라, 예산 긴축이 시행되면 음악가부터 먼저 잘리는 것을 수없이 봐왔기 때문이다. 그는 1697년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죽을 때까지 아들을 관리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에 임종이 다가오자 12세가 아직 안된 헨델을 불러 나이가 들면 대학에 들어가 반드시 법률을 공부하겠다고 약속을 해달라고 유언했다. 소년 헨델은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앞으로 법률을 공부하기 위한 준비를 하지만 짜하우 밑에서 음악공부는 계속 해나갔다.

헨델이 태어나고 살던 집. 현재 기념관으로 사용된다.
헨델이 태어나고 살던 집. 현재 기념관으로 사용된다.

16세 때인 1702년에 법률을 전공하기 위해 마침내 할레 대학에 입학했고 한 달 후에는 1년 계약직의 대성당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이런 식으로 1년을 생활한 그는 자신이 법률보다는 음악에 더 많은 열정을 쏟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아버지의 뜻과는 달리 음악가의 길로 나서기로 마음을 굳혔던 것이다.

이에 어머니도 동의했고 스승 짜하우는 그에게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라고 조언했다. 이리하여 헨델은 고향을 떠나 당시 독일오페라의 중심지이던 함부르크로 향하게 된다.
 
그후에는 이탈리아에 가서 활동하다가 1712년에 영국으로 건너갔고 1727년 영국에 귀화하여 영어식으로 조지 헨델(George Handel)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면서 오페라, 오라토리오, 오르간 콘체르토 등 수많은 명곡을 작곡하여 유명세를 누렸다.

그가 마지막으로 활동을 정지한 것은 1759년 4월 6일의 <메시아> 연주회 참석 이후부터이다. 그 뒤 헨델은 8일 동안 꼼짝 없이 누워 있다가 부활절 전날인 4월 14일에 74세로 영면했다.

바흐보다 9년을 더 살았던 그는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대사원에 안장되는 영광을 누렸다. 그것은 영국인들이 할레출신의 독일인 헨델을 영국사람 이상으로 존경하고 사랑했기 때문이다.

헨델이 1년 동안 오르가니스트로 봉직했던 할레 대성당.
헨델이 1년 동안 오르가니스트로 봉직했던 할레 대성당.

바흐는 선조로부터 몇 대나 계속되어 온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헨델이 태어난 집안은 음악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다만 그는 아버지로부터 건강한 신체와 강한 의지를, 프로테스탄트 목사의 딸이었던 상냥스런 어머니로부터는 명랑한 성격과 경건한 신앙심을 물려받았다. 헨델이 일생 동안 여러 번 어려운 난국에 직면하여 건강을 해치면서도 기적적으로 다시 일어나 음악가로서 큰 영광을 누리게 된 것도, 또 그의 종교적 감정의 깊이도 이러한 부모 없이는 생각할 수 없었으리라.

정태남

◆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건축 분야 외에도 음악·미술·언어·역사 등 여러 분야에 박식하고, 유럽과 국내를 오가며 강연과 저술 활동도 하고 있다.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 외에도 여러 저서를 펴냈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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