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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당이 된 로마제국 초대황제의 영묘

[정태남의 클래식 여행] 이탈리아/로마(Roma)

2022.09.22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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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라는 지명이 들어간 관현악 작품을 꼽으라고 하면 단연 레스피기(O. Respighi 1879-1946)의 <로마의 분수>, <로마의 소나무>, <로마의 축제>를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올리게 된다. 이 ‘로마 3부작’ 중에서 <로마의 분수>와 <로마의 소나무>는 로마에서 초연되었다.

로마제국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동상.
로마제국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동상.

이 두 작품이 초연된 음악당은 테아트로 아우구스테오(Teatro Augusteo). 이 이름은 ‘아우구스트’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기원전 27년, 서양에서는 ‘로마제국’이라는 새로운 역사의 무대가 펼쳐졌는데, 그 주역이 바로 아우구스투스였다.

이야기는 기원전 4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Iulius Caesar, Julius Caesar 영어식 발음은 ‘줄리어스 시저’)는 카시우스와 브루투스가 주도하는 공화파 세력에 의해 암살당했다.

그는 누나 율리아의 외손자 옥타비아누스를 양자로 받아들여 후계자로 지목해두었는데 복수심에 불타던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손잡고 그리스에서 세력을 키우던 카시우스와 브루투스를 격파했다.

복수전에 승리한 다음 해, 때마침 아내를 잃은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의 누이 옥타비아와 결혼했다.

안토니우스는 그리스를 포함 동방의 속주에 자기 세력기반을 단단히 다졌다. 그런데 그는 클레오파트라에 홀려서 매국적인 처사인데도 불구하고 동방 속주의 금싸라기 같은 지역을 그녀에게 헌정하고는 옥타비아와 이혼하기에 이르렀다. 마침내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서로 정적이 되어 대결하게 되었다.

이에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의 유언장을 몰래 입수하여 이를 전격 공개해버렸다. 유언장에 따르면 자기가 죽으면 클레오파트라 곁에 묻어 달라는 것이었다. 로마시민들은 안토니우스는 반역자, 클레오파트라는 나일강의 마녀라고 성토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 분위기에 편승하여 안토니우스가 아니라 클레오파트라에게 선전포고했다. 즉, 시민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얻기 위해 같은 로마인이 아니라 증오의 대상이 된 그녀를 먼저 표적으로 내세웠던 것이다.
 
기원전 31년 클레오파트라와 연합한 안토니우스는 악티움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의 오른팔 아그리파가 이끄는 함대와 격돌했으나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이집트로 피신했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 군대가 이집트로 진격해 들어가자 결국 자결하고 말았다. 이어서 클레오파트라도 자살의 길을 택했다. 이로써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30년 8월에 이집트를 완전히 손아귀에 넣게 되었다.

아우구스투스 영묘 모형.
아우구스투스 영묘 모형.

로마의 최강자가 된 옥타비아누스는 다음해 수도 로마에 돌아오자마자 자신의 영묘부터 만들기 시작했다. 이 영묘는 높이 40미터로 지름이 87미터나 되는 원통형 위에 지름이 더 작은 원통을 그 위에 올린 형태였다. 그는 기원전 63년에 태어났으니 아직도 혈기 왕성한 30대 중반인데 왜 이렇게 일찍 묘지부터 만들려고 했을까? 그것도 단순한 묘지가 아니라 기념비적인 대규모의 영묘를 말이다. 사실 그는 안토니우스와 달리 자신의 뼈는 다른 곳이 아닌 바로 조국 로마에 묻히리라는 것을 로마시민들에 확실히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다.
 
또 그 뒤에는 그의 야심이 숨겨져 있었다. 즉, 겉으로는 공화정으로 회귀하겠다고 공언하면서 실은 교묘하게 새로운 체제를 굳혀가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기원전 27년, 그는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는 칭호를 받고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쥐는 원수정체제를 확고하게 구축했다. 이때부터 기존의 공화정과는 완전히 다른 제정, 즉 로마제국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아울러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는 그의 이름으로 굳어졌다.
 
그는 중요한 군사적 승리를 거둔 달이 일 년의 여덟 번째 달이란 사실을 주목하고는 아예 이 달을 자신에게 바쳐진 달로 만들어 아우구스투스(Augustus)라고 정했다. 영어에서는 어미 ‘us’를 떼어내고 오거스트(August)라고 한다. 그는 77회 생일을 한 달 여 앞두고 기원후 14년에 숨을 거두었고 그의 유골은 젊은 시절에 세웠던 거대한 영묘에 안치되었다. 그는 37년 동안 통치했는데 그가 굳건하게 다져 놓은 국가체제와 국경선은 그후 적어도 200년 동안 로마제국의 안전과 번영에 밑거름이 되었다. 하지만 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그의 영묘는 폐허가 되고 말았다.
아우구스투스 영묘 유적.
아우구스투스 영묘 유적.

많은 세월이 흐른 1500년대 말, 영묘의 유적은 한 로마 귀족가문의 개인 정원으로 사용되었고 그후에는 투우경기장으로도 사용되다가 1700년대에는 극장으로 완전히 용도가 변경되었다. 그러다가 1908년에는 클래식 음악을 연주하는 로마 최고의 음악당으로 개축되었는데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을 따서 테아트로 아우구스테오(Teatro Augusteo)라고 불렸다.

이 음악당은 실내음향이 좋아 토스카니니 같은 세계적인 지휘자들도 이곳에서 즐겨 연주를 할 정도였으며 레스피기의 <로마의 분수>, <로마의 소나무> 등과 같은 유명한 관현악 작품들도 바로 이곳에서 초연되었다.

테아트로 아우구스테오 연주실황 장면.(사진=Hugo DK)
테아트로 아우구스테오 연주실황 장면.(사진=Hugo DK)

하지만 아우구스투스의 영묘가 음악당으로 사용된다는 것은 고대로마의 영광을 재현하고 싶어하던 무솔리니에게는 위대한 로마제국 초대황제에 대한 불경행위나 다름없었다. 이리하여 테아트로 아우구스테오는 1937년에 철거되고 영묘유적만 남게 되었다. 이 유적은 로마의 중심거리 비아 델 코르소(Via del Corso) 가까이에 위치한다.

정태남

◆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건축 분야 외에도 음악·미술·언어·역사 등 여러 분야에 박식하고, 유럽과 국내를 오가며 강연과 저술 활동도 하고 있다.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 외에도 여러 저서를 펴냈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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