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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길목마다, 고비마다 함께 한 그 노래

[시가 된 노래, 노래가 된 시] (24) ‘영원한 가객’ 김광석①

2023.01.27 한기봉 전 언론중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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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일찍 죽어서 ‘영원한 가객’이 됐다. 생존해 있다면 예순 턱 밑인 59세가 되겠지만, 늙은 그를 상상할 수 없다. 그는 우리에겐 변함없는 서른 즈음의 소박한 청년이다. 

억압과 혼돈의 시절, 고단하고 우울한 청춘을 위안하다 이별 인사 한 마디 없이 홀연히 떠난 김광석(1964~1996). 27년이 흘렀지만 그는 잊히지 않았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중반을 그와 함께 한 이들은 불혹의 나이가 되었음에도 그를 떠나보내지 않는다.

생전에 노래하던 김광석(유튜브 캡처).
생전에 노래하던 김광석(유튜브 캡처).

우리는 왜 그를 끊임없이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진정한’ 사람의 목소리다. 기교와 과장과 가짜가 아닌 타고남이다. 우수와 연민이 묻어나는 그의 가창을 듣고 있자면 눈물은 밖이 아니라 횡경막 아래에서 흐른다. 그의 목청은 슬픈 것들을 더 슬프게, 아픈 것들을 더 아프게 만든다. 그가 노래를 부르면 멜로디와 가사는 분리되지 않고 한 몸과 한 영혼이 된다.  

아름다워서 슬픈 수많은 명곡들. 통속과 퇴락이 없는 서정으로 가득한 노랫말. 통기타 하나와 하모니카 한 대의 무한한 힘. 소탈하고 순수한 인간미와 언행. TV를 거부하고 소극장 콘서트 무대만 1000번 이상을 고집했던 음악정신.

그는 즐겁고 신나는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사랑의 환희보다 사랑의 아픔을, 삶의 열락보다 삶의 고단을 노래했다.

우리는 삶의 고비고비마다 또는 생의 특정한 순간에 그와 함께 했다. 김광석은 세월의 길목길목 우리가 지나가는 문 옆에서 LP판을 틀어놓은 듯 나지막이 읊조렸다.

20대엔 입영열차 안에서 그의 노래를 들으며 울컥했다. 부모님께 큰절하고 대문 밖을 나설 때 가슴속에 무언가 아쉬움이 남고 풀 한 포기 친구 얼굴 모든 것이 새롭지만 그는 이렇게 속삭였다. 젊은 날의 꿈이여, 이제 다시 시작이라고. (‘이등병의 편지’).

서른이 되어서는 아쉬운 청춘을 뒤돌아봤다. 청춘도 사랑도 머물러 있을 줄만 알았다. 그러나 내뿜은 담배연기처럼 하루하루는 멀어져 갔다. 비어가는 가슴속엔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다. 계절도 사랑도 내가 떠나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 조금씩 잊혀 갔다. 매일 그렇게 이별하며 살았다. (‘서른 즈음에’)

그 시절, 사랑과 이별을 해보지 않은 청춘이 있으랴. 때로는 실연으로 죽을 만큼 힘들었다. 그럴 땐 고음에서 목이 막히는 그 노래를 불러 제쳤다. 그날은 하루종일 비가 내렸다. 그대 음성은 빗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리움과 외로움으로 가슴이 저렸다. 사랑했지만 이렇게 멀리서 바라볼 뿐 다가설 수가 없구나. 지친 그대 곁에 머물고 싶지만 떠날 수밖에 없구나. (‘사랑했지만’)
 
도저히 잊을 수 없을 때는 하얗게 밝아오는 유리창에 수없이 ‘널 사랑해’라고 썼다 지웠다.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은 저마다 아름답게 빛나지만 내 맘속에 빛나는 건 너라는 별 하나뿐이었다.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내 작은 가슴 모두 모두어 시를 써봐도 모자란 당신이었다. 먼지가 되어서라도 바람에 날려 당신 곁으로 날아갈 수만 있다면. (‘먼지가 되어’)

너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너를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 너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기쁨을 느꼈던 그날들. 그렇듯 사랑했던 것만으로, 그렇듯 아파해야 했던 것만으로 충분했다. 부질없는 아픔과 이별할 수 있도록 잊어야 한다면 잊혀지면 좋겠다. (‘그날들’)

그리고 깨달았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걸. 이제 우리 다시는 사랑으로 세상에 오지 말자, 그립던 말들도 묻어 버리자 다짐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김광석이 태어난 대구 방천시장 근처에 조성된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김광석이 태어난 대구 방천시장 근처에 조성된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퇴행의 시대에 최루탄과 물대포에 쫓기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찢기는 가슴 안고 사라진 이 땅의 피울음과 하얀 옷의 핏줄기를 기억했다. 그리고 해 뜨는 동해에서 해지는 서해까지, 뜨거운 남도에서 광활한 만주벌판까지를 생각했다. 우리가 어찌 가난하고 어찌 주저하리라. 다시 서는 저 들판에서 뜨거운 흙을 움켜쥐리라 다짐했다. (‘광야에서’)

차츰 철이 들어가면서 때로 거리에 짙은 어둠이 낙엽처럼 쌓이고 차가운 바람만이 나의 곁을 스치면 괜히 눈물이 났다. 왠지 모든 게 꿈결 같고 그 모든 게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만 같다.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은 무얼 찾고 있는 것일까. (‘거리에서’)

사회에 나가고 가장이 되며 많은 좌절의 순간을 마주했다. 어디로 가야 하나, 어디에 있을까 둘러봐도 소용없었다. 인생이란 부초처럼 떠다니다 어느 고요한 호숫가에 닿으면 물과 함께 썩어가는 것인가. 그래도 봄의 새싹처럼 일어나서 다시 한 번 해봐야 한다. 인생은 그저 왔다갔다 하는 시계추처럼 매일매일 흔들리겠지만 일어나야 한다. 가볍게 산다는 건 결국 스스로를 얽어매는 것일 뿐, 세상이 외면해도 나는 어차피 살아있다고 다짐했다. (‘일어나’)

인생이 고단할 때는 노래를 불렀다. 나의 노래는 나의 힘이고 나의 삶이었다. 시와 노래는 애달픈 양식이었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조용한 읊조림은 커다란 빛이 되었다. 거미줄처럼 얽힌 세상 속에서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가지처럼 흔들리고 넘어져도 이 세상 속에 마지막 한 방울의 물이 있는 한 나는 마시고 노래하리라. (‘나의 노래’)

어느새 황혼에 접어들었다. 아내는 먼저 갔다. 곱고 희던 그 손으로 넥타이를 매어주던 당신을 기억한다. 막내아들 대학시험 뜬눈으로 지내던 밤들을 기억한다. 큰딸아이 결혼식날 흘리던 눈물방울이 이제는 모두 말랐다. 인생은 그렇게 흘러 황혼에 기우는데 당신은 다시 못 올 그 먼 길을 어찌 혼자 가려 하는가.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그는 이렇게 우리와 함께 했다. 이 중에 하나는 아마도 누군가의 인생노래가, 노래방 18번이 되었을 거다. 그렇게 그는 우리 곁에서 매일 부활했다.

2017년 ‘김광석 다시 부르기’ 공연 포스터.
2017년 ‘김광석 다시 부르기’ 공연 포스터.

어느 가수가 죽어서 후배 가수들에게 ‘다시 부르기’의 영예를 얻었으랴. 2010년부터 시작된 추모 공연 ‘김광석 다시 부르기’는 해가 가도 여전한 사랑을 받고 있다.

노래 좀 한다는 후배 뮤지션들에 의해, 무명 가수들의 오디션 경연에서 그의 노래는 거듭 난다. 그의 고향 대구에는 2008년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이 조성돼 그를 그리워하는 수많은 이들을 부른다.

그는 짧은 생애에 네 장의 정규 앨범과 두 장의 ‘다시 부르기’ 앨범을 남겼다. 1984년 ‘노래를 찾는 사람들’로 데뷔해 1988년 ‘동물원’을 거쳐 1989년부터 혼자 노래 불렀다. 작곡은 했지만 노랫말을 쓰지는 않았다.

1996년 1월 5일 저녁 박상원이 진행하던 HBS(현대방송) ‘겨울나기’에 출연해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그녀가 처음 울던 날’을 부른 게 그의 마지막 가창이다.

8시에 녹화가 끝난 후 대학로에서 절친인 가수 박학기와 술을 마셨다. 이후 마포구 서교동 집 근처에 있는 술집에서 시인이자 작사·작곡가인 백창우와 술을 마시며 음반 계획을 논의했다. 안치환은 그 전에 자리를 떴다. 김광석은 자정이 조금 넘어 귀가해 아내 서해순과 맥주 4병을 마시고 잠이 들었다. 새벽 3시 30분 인기척이 없자 서해순이 옥상 5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전깃줄로 목을 매 숨진 남편을 발견했다. 경찰은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이라고 발표했다.

사후 20년 뒤, 기자 출신의 이상호 감독이 다큐멘터리 영화 ‘김광석’에서 서해순에 의한 타살설을 제기했으나 검찰은 무혐의로 수사를 종결했다. 서해순은 그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고 법원은 1억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김광석의 친가와 아내와 딸 사이에 저작권을 둘러싼 송사도 벌어졌다. 그가 사랑한 딸은 2007년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한기봉

◆ 한기봉 전 언론중재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로 언론과 글쓰기를 강의했고, 언론중재위원과 신문윤리위원을 지냈다. hkb82107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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