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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대한민국, 우리는 ‘여기’ 있었다.

[임시정부, 그 길을 가다 ⑦] 중국 내 임시정부의 발길을 따라서 ①(상해에서 가흥까지)

2019.04.08 정책기자 남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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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18일부터 5박 6일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마련된 중국 내 임시정부 탐방에 함께했다. 임시정부 요인들의 피와 땀이 녹아든 유적지에서 과거의 그들을 만나 더 많은 질문을 안고 돌아왔고, 이제는 터만 남았거나 그 터마저 사라져 가는 장소에서는 울컥하는 감정을 추스르느라 고생을 해야 했다. 임시정부 요인들이 27년 간 걸었던 그 길을 좇았던 6일 간의 여정을 생생히 전달해 본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시작, 상해 임시정부 청사 

붉은 벽돌로 된 외관이 인상적이었던 상해 임시정부 청사
붉은 벽돌로 된 외관이 인상적이었던 상해 임시정부 청사.

중국 상해(상하이) 구도심에 위치한 상해 임시정부 청사. 상가와 주택가가 뒤엉킨 중국인들의 삶의 터전 속에 100년 전 대한민국의 시작을 알린 ‘상해 임시정부 청사’가 자리하고 있다. 독립운동 당시 상해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활동하기 수월한 ‘프랑스 조계지’가 형성된 곳이었다. 또한 세계적 무역 중심지로서 국제적 여론 형성, 정보 수집, 외교 활동 등에 유리한 지리적 이점을 갖춘 곳이기도 했다. 때문에 27년간의 임시정부 활동 중 절반에 가까운 13년의 시기를 보낸 독립운동의 요충지였다. 

상해 임시정부 청사에서 100년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상해 임시정부 청사에서 100년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1919년 4월 11일 정부 수립 당시의 터는 아쉽게도 정확한 위치가 밝혀지지 않았다. 이번에 방문한 상해 임시정부 청사는 1926년 7월부터 1932년 4월까지 약 6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청사로 사용한 곳이다. 해당 청사는 임시정부가 떠나고 60년이 지난 1993년 1차 복원된 후, 2001년 건축물을 전면 보수하고 전시 시설을 확장해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상해 임시정부에 대한 영상을 시청하고 본격적인 탐방이 시작됐다
상해 임시정부에 대한 영상을 시청하고 본격적인 탐방이 시작됐다.


직접 찾은 상해 임시정부 청사는 붉은 벽돌로 이뤄진 3층 구조의 건물이었다. 소박하게 마련된 공간에서 영상을 시청한 후 ‘매일 어떻게 오르내렸을까?’ 싶은 좁고 가파른 계단을 통해 탐방을 할 수 있었다.

내부 사진은 찍을 수 없어 외부에서 사진을 남길 수 밖에 없었다
내부 사진은 찍을 수 없어 외부에서 사진을 남길 수 밖에 없었다.


1~3층 까지는 응접실과 집무실, 책상, 침대 등 다소 평범한 느낌의 옛 가구들이 진열돼 있었다. 또한 옆 건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전체적인 활동을 요약 전시해 놓은 전시물들이 마련돼 있었다. 안타깝게 청사 내부 사진 촬영이 허용되지 않아 눈으로만 담아왔다. ‘우리나라 임시정부 건물인데, 왜 내부 사진 한 장 찍지 못하게 하느냐’는 사람들의 푸념이 유독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상해 임시정부 청사에서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상해 임시정부 청사에서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었다.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서포터즈로 이번 탐방에 참여한 천승환(26, 학생) 씨는 “상해 임시정부 청사를 답사하고 나니 우리가 누리는 일상의 소중함이 느껴졌다. 함께 동행한 박광일 작가의 말씀처럼 임시정부 요원들이 지키고자 한 것은 오늘도 누군가 의미 없이 보냈을 우리의 일상이었다”라며 “사진작가로 활동하며 역사를 알려왔던 만큼, 내가 가진 능력을 십분 발휘해 상해에서 보고 느낀 많은 것들과 100주년 기념사업들에 대한 홍보에 힘쓰고 싶다”고 말했다.

독립운동에 뛰어든 김구 선생의 슬픈 개인사, 영경방

김구 선생이 가족과 함께 거주했던 영경방에 도착했다
김구 선생이 가족과 함께 거주했던 영경방에 도착했다
 

이어 상해 임시정부에서 도보 7~8분 거리에 떨어진 영경방을 방문했다. 화려한 카페 거리 안쪽에 위치한 영경방은 김구 선생이 1922년부터 1926년까지 거주한 곳이다. 영경방 10호에는 독립운동에 모든 것을 던졌던 김구 선생의 슬픈 이야기가 전해진다.

박광일 작가를 통해 김구 선생의 슬픈 개인사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박광일 작가를 통해 김구 선생의 슬픈 개인사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김구 선생이 거주한 ‘영경방 10호’는 대한제국 법부대신, 농상공부대신 등을 지낸 김가진과 그의 아들인 김의한, 정정화 부부가 거주했던 곳이었다. 김의한은 1922년 김가진이 별세하자 영경방 10호를 김구 선생 가족에게 넘겼다.

영경방에 얽힌 슬픈 사연들에 절로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었다
영경방에 얽힌 슬픈 사연들에 절로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었다.


김구 선생은 영경방 10호에서 모친인 곽낙원 여사, 아내 최준례 여사, 두 아들 김인, 김신과 함께 거주했다. 그러나 최준례 여사는 둘째 아들 김신을 낳은 후, 낙상사고로 늑막염이 발병했고 병세가 폐병으로 악화되어 1924년 사망했다. 

당시 김구 선생은 일본 조계지에 위치한 홍구 병원에 입원한 아내의 병문안조차 가지 못했다. 페니실린을 쓰면 치료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임시정부의 예산을 사적으로 사용할 수 없어 결국 아내를 떠나보내게 된다.  

영경방 10호에서의 김구 선생은 어떤 감정이었을까?
영경방 10호에서의 김구 선생은 어떤 감정이었을까?


서포터즈로 참여한 김수정(23, 학생)씨는 “제일 많이 든 생각은 ‘이런 슬픔과 고통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영경방에서 김구 선생이 일제의 감시가 심해 가족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는 비극적인 이야기를 알게 됐다”라며 “어떠한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켜 내야한다는 마음으로 버텨주신 요인들께 감사한 마음뿐이다” 라고 말했다.

최준례 여사의 무덤, 독특한 묘비글이 눈에 들어온다
최준례 여사의 무덤, 독특한 묘비글이 눈에 들어온다

 
훗날 최준례 여사의 묘비에는 김두봉이 쓴 ‘ㄹㄴㄴㄴ해 ㄷ달 ㅊㅈ날 남, 대한민국 ㅂ해 ㄱ달 ㄱ날 죽음’이라는 묘한 글만 적히는데, 각 자음의 순서를 숫자로 바꿔 대입하면 ▲ ㄹㄴㄴㄴ해는 단기 4222년 ㄷ달은 3월  ㅊㅈ날은 19일이 된다. 이어 ▲ 대한민국 ㅂ해는 대한민국 6년 ㄱ달 ㄱ날은 1월 1일이 된다.

즉 해당 묘비명은 최준례 여사의 생일과 기일을 한글을 사용해 적은 것이며, 단기 4222년과 ‘대한민국 6년’이라는 표기를 통해 우리나라의 시작과 대한민국 정부의 출발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최준례 여사와 나석주 의사의 사연이 담긴 영경방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최준례 여사의 사연이 담긴 영경방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100년이 지나 이제는 외국인 관광객들과 젊은이들이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화려하고 예쁜 카페거리가 됐지만, 그 곳에 위치한 영경방 앞에서 탐방에 참여한 50인은 사뭇 다른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팔선교 중국기독교청년회관을 거쳐 홍구공원으로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가 홍구공원 의거를 논의한 중국기독교청년회관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가 홍구공원 의거를 논의한 중국기독교청년회관.
 

다음 답사지는 팔선교 중국기독교청년회관이었다. 이제는 호텔로 사용되는 이 장소는 1932년 4월 28일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가 홍구(훙커우)공원 의거를 논의했던 장소로 유명하다. 또한 훗날 김구 선생의 피신에 도움을 준 피치 목사를 만난 곳도 이 장소라 알려졌다.

지금은 호텔로 사용되고 있으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가진 장소였다
지금은 호텔로 사용되고 있으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가진 장소였다.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가 살아서는 돌아오지 않겠다)이라는 글을 남기고 중국으로 망명한 윤봉길 의사는 의열투쟁의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던 중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상해 홍구공원에서 진행한다’는 내용의 보도를 접한다. 

이에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의거 수행을 선서한다. 다음날인 27일에는 홍구공원 주변을 답사하고 28일 중국기독교청년회관에서 김구 선생을 만나 식사를 하며 거사에 대한 논의를 재차 진행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거행됐던 홍구공원 현재는 이름이 바뀌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거행됐던 홍구공원. 현재는 노신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다음날인 29일 홍구공원에서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성공해 시라카와를 포함한 7명의 일본군 간부들이 사망하거나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는 침체돼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로를 개척했으며 나아가 독립운동의 전환점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아름답게 조성된 홍구공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름답게 조성된 홍구공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중국기독교청년회관을 거쳐 도착한 홍구공원은 현재 노신(루쉰)공원으로 이름이 변경됐다. 공원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어 안내표지판에 선명하게 한글로 적힌 윤봉길 기념관이란 글씨를 발견했다. 한국인들을 위한 배려와 윤봉길 의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남아있음에 감사한 순간이었다.

윤봉길 의사 의거 기념비도 발견할 수 있었다
윤봉길 의사 의거 기념비도 발견할 수 있었다.

 
조금 더 걸어들어가니 윤봉길 의사의 기념관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안에는 윤봉길 의사를 기념하기 위한 ‘매헌’이란 이름의 정자가 마련됐다. 정자의 근처에는 1998년 ‘윤봉길 의사 의거 기념비’가 세워졌다.

윤봉길 의사를 기리기 위해 만든 정자
윤봉길 의사를 기리기 위해 만든 정자 ‘매헌’.

 
정자 앞에는 윤봉길 의사의 일생을 정리한 게시물이 한글로 게시되어 있었고, 1층에는 윤봉길 의사의 흉상과 홍구공원 의거 및 윤봉길 의사의 죽음에 관련한 전시물이 마련됐다. 윤봉길 의사가 당당히 죽음을 맞이한 모습을 다시금 사진으로 보니 가슴이 뜨거워지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윤봉길 의사에 대한 전시가 잘 갖춰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윤봉길 의사에 대한 전시가 잘 갖춰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지금의 우리를 있게 만든 하나의 큰 발자국이었음을 생각하니 그 동안 잊고 지낸 독립 운동가들에 대한 감사함이 물밀듯 밀려왔다. 정책기자단으로 참석한 최종욱(24, 학생) 씨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홍구공원을 의거 장소로 생각하고 거닐던 윤봉길 의사의 심정을 짐작하기 힘들었다. 20대 꽃다운 나이에 나라를 위해 산화하신 윤봉길 의사의 정신을 잠시나마 느껴볼 수 있어 감사한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상해의 마지막 답사지, 만국공묘

2일차 상해 만국공묘를 방문했다
2일차 상해 만국공묘를 방문했다.
 

2일차 아침, 상해에서의 마지막 답사지 만국공묘로 향했다. 본래 상해에서 활동하다 타계한 한인들의 묘는 정안길로 공동묘지에 있었으나, 중국 문화대혁명과 상해의 도시재개발사업 등으로 인해 철거된 후 독립운동가의 묘 일부가 이곳으로 이전됐다.

상해에서 활동하던 외국인들의 묘가 모셔져 있다
상해에서 활동하던 외국인들의 묘가 모셔져 있다.


화창한 날씨와 어우러진 만국공묘는 조용하면서 아름다운 장소였다. 만국공묘에는 한국인의 묘로 확인 또는 추정되는 14기의 묘가 있다. 이 가운데 노백린, 박은식, 안태국, 신규식, 김인전 등 5인의 묘는 1993년 8월 5일에 봉환됐고 윤현진, 오영선 2인의 묘는 1995년 6월 21일에 봉환됐다.

소박하게 마련된 묘비석을 보니 알 수 없는 감정이 몰려왔다
소박하게 마련된 박은식 선생의 묘비석을 보니 알 수 없는 감정이 몰려왔다.

 
만국공묘를 돌아보며 독립운동에 몸을 바치고 타국에서 숨을 거둔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 임시정부 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 대통령제를 버리고 국무령제로 바꾼 업적을 남긴 박은식 선생 ▲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비행학교를 운영하며 공군 양성에 힘써 다양한 형태의 독립운동이 여러 나라에서 이뤄졌음을 보여준 노백린 선생 ▲ 대한민국이란 이름으로 외교관 파견이 가능토록 만든 신규식 선생 등 많은 위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만국공묘에 마련된 묘지석 하나하나가 결코 가볍게 보이지 않았다.

가흥에서 본 김구 피난처와 임시정부 요인 거주지

김구 선생 피난처가 위치한 가흥에 도착했다
김구 선생 피난처가 위치한 가흥에 도착했다.
 

만국공묘를 끝으로 상해를 떠나, 가흥(자싱)이라는 다소 낯선 지역으로 이동했다. 약 2시간 30분을 이동해 가흥에 위치한 김구 선생의 피난처와 임시정부 요인 거주지를 둘러볼 수 있었다.  

김구 선생 피난처에서 여러 전시물과 피난처 내부를 볼 수 있었다
김구 선생 피난처에서 여러 전시물과 피난처 내부를 볼 수 있었다.

김구 선생의 피난처에 대한 이야기는 앞서 언급한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의거에서 이어진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김구 선생은 미국인 목사 피치의 집에 피신해 있다가 저보성의 도움으로 가흥으로 피신했다. 가승에서 김구 선생은 ‘장진구’ 또는 ‘장진’ 이란 가명을 사용하며 매만가 76호에 머물렀다.

김구 선생의 흉상 옆에서 경건하게 사진을 남겨보았다
김구 선생의 흉상 옆에서 경건하게 사진을 남겨보았다.


김구 선생의 피난처는 김구 선생의 가흥 피난 생활에 대한 전시가 이뤄져있는 전시관과 실제로 김구 선생이 피난 시기에 머물렀던 건물로 나뉘어져 있었다. 2층 구조의 목조건물로 이뤄진 피난처는 1층은 접견실 겸 식당으로 2층은 침실로 재현돼 있었다.

모순적이게도 피난처 맞은편 풍경은 너무 아름다웠다
모순적이게도 피난처 맞은편 풍경은 너무 아름다웠다.


소박하고 낡은 느낌의 피난처를 돌아보며 맞은편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하다 문득 ‘김구 선생의 눈에도 이 풍경이 아름답게 비쳤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괜히 서글픈 감정에 빠져들었다.

김구 선생이 탈출에 이용했다고 전해지는 비상구
김구 선생이 탈출에 이용했다고 전해지는 비상구.


2층에 올라가 창밖을 바라보던 중 구석에 작은 손잡이가 달린 비상구를 발견했다. 이 비상구는 일제의 수색을 피해 김구 선생이 탈출에 사용한 것으로, 김구 선생은 해당 비상구를 통해 1층으로 내려가 배를 이용해 호수로 피신했다고 전해진다. 본래는 침대 밑에 있었으나 현재는 관람객의 편의를 위해 침대의 위치를 옮겨두었다고 한다.

3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임시정부요인 거주지
3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임시정부 요인 거주지.


김구 선생의 피난처에서 불과 300미터 떨어진 곳에는 임시정부 요인 거주지가 있다. 해당 거주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항주에서 활동할 때 이동녕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의 요인들이 잠시 피난 생활을 하던 곳이다.

임시정부요인 거주지에 마련된 전시 사진
임시정부 요인 거주지에 마련된 전시 사진.


이동녕, 박찬익, 엄항섭, 김의한 등과 그 가족들이 피신해 생활한 이곳은 2층 구조의 건물에 네 칸의 방과 마당이 마련된 소박한 공간이었다. 1995년 가흥시가 자체적으로 보수 공사를 진행했고, 2001년에 다시 가흥시와 대한민국 독립기념관이 공동으로 보수와 전시자료 교체를 마쳐 지금의 모습이 갖춰졌다.

임시정부요인 거주지 1층의 모습
임시정부 요인 거주지 1층의 모습.


작디 작은 방에서 임시정부 요인과 그 가족들이 함께 생활했다고 하니 절로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일상을 위해 자신들의 일상은 내려놓은 임시정부 요인들의 숭고한 희생에 다시금 감사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작디 작은 방에서 가족이 함께 생활하며 버틴 임시정부요인들
작디 작은 방에서 가족이 함께 생활하며 버틴 임시정부 요인들.


서포터즈 김수정(23, 학생) 씨는 “김구 선생의 피난처에서 침대 아래에 피신을 위한 작은 문이 있었다는 것과 방 뒤에 항상 배를 띄워두고 나중에는 배에서 잠을 잤다는 것이 너무나도 충격이었습니다. 일제의 감시가 날로 거세지는 상황 속에 잠도 편히 잘 수 없었던 그 처절했던 순간들이 절로 상상됐습니다” 라고 감상을 밝혔다.

100년 전 대한민국, 그들은 이곳에 있었다
100년 전 대한민국, 그들은 이곳에 있었다.


1~2일 차의 탐방이 모두 끝나고 항주로 향해가는 버스 안에서 임시정부 요인들이 27년 간 걸어온 길을 잠시 되짚어봤다. 역사는 흔히 ‘사람을 만나는 학문’이라 한다. 이틀간의 탐방을 통해 만난 독립 운동가들과 임시정부요인들을 생각하면 마치 그들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100년 전 대한민국, 우리는 ‘여기’ 있었다”  

   
 <2부에 계속>



남혁진
정책기자단|남혁진
apollon_nhj@hanmail.net
대한민국 정책현장을 누비는 열정 가득한 정책기자입니다. 다양한 정부부처 기자단 경험과 장관상 7회 수상의 경험을 살려, 생생하고 정확한 정책기사를 작성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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