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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외국 친구와 고궁을 거닐었다.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온 친구는 한국의 옛 문화재를 본다며 들떠 있었다. 정문에서 작은 감탄사가 흘렀다. 그 기대가 줄어드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크나큰 궁궐 한 바퀴를 돌았을까. 우리가 생각한 대로 여유롭고 고풍스러운 고궁 관람이 아니었다.
바닥부터 살펴야 했다. 궁궐 내 턱이나 포장되지 않은 곳마다 가방까지 실어 더 무거운 유모차를 들어 올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비단 유모차 만일까. 궁 내에 비치된 휠체어를 보며 장애인 휠체어는 더하면 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창경궁. |
이제 점점 궁과 능도 달라지고 있다. 2019년 문화재청은 선정릉에 유니버설 디자인(범용 디자인. 성별, 연령, 국적, 문화적 배경, 심지어 장애의 유무에도 상관없이 누구나 손쉽게 쓸 수 있는 제품 및 사용 환경을 만드는 디자인) 안내판 등을 설치했으며, 창경궁에는 보행 시설을 정비하고 문화재 촉각 모형을 제작했다.
창경궁에 설치된 경사로. 휠체어, 유모차 등 이용자를 위한 배려다. |
창경궁에서는 가장 먼저 경사로가 눈에 띄었다. 주 출입문 접근로가 경사져 출입이 불편했던 점이 확 달라졌다. 더욱이 색상도 문화재를 고려해 마감재와 비슷한 편안한 색을 선택했다.
창경궁에서는 눈에 띄게 경사로 표시를 해두었다. |
안내판도 바뀌었다. 글씨가 작거나 거리 표시가 없고 점자로만 표기됐던 곳을 개선했다. 멀리서도 휠체어 표시를 볼 수 있게 했고, 더욱이 갈증이 날 때 찾을 음수대에도 경사로를 설치했다.
촉각 모형과 함께 자세한 설명이 나와있다. |
무엇보다 창경궁에 설치된 촉각 모형이 시선을 끌었다. 촉각 모형은 시각장애인은 물론 어린이에게도 흥미를 줄 듯싶었다. 앙증맞게 작은 모형이라 어른들도 한 번 쳐다보게 만든다.
선정릉 안내판 전과 후의 모습. 전에 비해 정확한 방향과 거리 등을 표시했다.(출처=문화재청) |
선정릉 역시 달라졌다. 안내판의 정보가 수월하게 표시되고 다국어가 포함됐다. 방향뿐만 아니라 거리까지 표기돼 알아보기 쉬웠다. 비탈진 곳에는 경사 정도를 표기했다. 또한 멀리서 알아볼 수 있도록 크게 경사진 길 앞에는 보호자 동행, 혹은 휠체어는 우회하도록 표기해 편리함을 더했다.
선정릉에 설치된 휠체어 우회, 보호자 동행 등 안내판.(출처=문화재청) |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를 표기했음은 물론 점자 설치 부분 각도를 조절한 유니버설 디자인을 적용했다. 안내판 역시 촉각 모형과 함께 모두가 이용하기 편안한 높이에 설치했다.
선정릉에 설치된 촉각 안내판.(출처=문화재청) |
문화재청은 2026년까지 궁궐과 종묘, 그리고 조선 왕릉에 유니버설 디자인을 도입해 무장애 공간으로 만들기로 했다. 누구나 궁궐과 왕릉을 누릴 수 있으며 포용, 배려, 상생이 함께하는 문화유적지가 되도록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무장애 공간 조성 외에도 문화재 향유가 어려운 사람들에게 필요한 편의 사항을 반영한 ‘문화재 주변 무장애 시설물에 대한 공공디자인 기준’을 재정립, 전국 문화재에 적용할 법적 근거도 마련할 계획이다.
넓은 평지에 확 트인 길이 환해 보이는 창경궁. 누구나 가기 쉬운 길이라 생각하니 마음도 밝다. |
4월 20일은 장애인의 날이다. 몸이 불편해도, 말이 어색해도, 다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이 늘어나는 건 역시 기쁘다. 무엇보다 각자 느끼는 생각은 달라도, 감상하는 높이만큼은 평평하길 바라고 있다. 그런 면에서 문화재에 유니버설 디자인을 입혀 동등한 관람 기회를 준다는 건 무척 반가운 소식이다.
선정릉에 설치된 안내판.(출처=문화재청) |
결론적으로도 이런 디자인이 늘어나면 장애인을 포함해 모두가 더 즐거워질 듯싶다. 더 많은 사람과 공감하며, 더더욱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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