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브르 박물관의 피라미드 입구. 궂은 날씨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몰린다. |
루브르 궁전의 넓은 중정 한가운데에 세워진 유리로 만든 피라미드 입구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연중 내내 전 세계에서 온 관람객들을 마치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수많은 예술 작품 중에서 가장 많은 관람객들을 이끄는 작품은 단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 리자>이다.
내가 파리에서 루브르 박물관을 다시 찾은 이유는 한 여인의 초상화를 보기 위해서이다. 이 여인은 루브르 박물관의 얼굴마담격인 <모나 리자>가 아니라 마르가리타 테레사(Margarita Teresa)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초상화는 마르가리타 테레사의 어린 시절의 모습을 담고 있는데 이 초상화를 그린 화가는 스페인의 유명한 벨라스케스이다. 그렇다면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누구인가? 그녀는 스페인의 왕 펠리페 4세의 딸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 리자>를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 |
펠리페 4세라면 스페인을 통치하면서 스페인을 문화적으로 성숙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벨라스케스는 그의 궁정에서 활동하면서 왕을 비롯해 왕의 가족 초상을 많이 그렸는데 현재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 있는 그의 명화 <라스 메니나스>(Las Meninas)는 바로 왕과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와 시녀들이 등장하는 대작이다.
이 명화는 ‘시녀들’이란 뜻으로 제목이 ‘라스 메니나스’라고 붙여져 있지만 이 그림에서 실제로 중심이 되는 인물은 바로 어린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이다. 벨라스케스는 이 공주의 ‘독사진’도 여러 점 남겼는데 그 중 한 점이 바로 루브르 박물관 안에 소장되어 있다.
내가 다른 유명한 작품들을 제치고 이 초상화에 크게 관심을 두는 이유는 프랑스의 음악가 모리스 라벨이 이 그림을 보고 영감을 얻어 <어느 죽은 공주를 위한 파반느(Pavane pour une infante défunte)>를 작곡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 때문이다. 이 곡은 애수에 젖는 듯한 우아한 선율로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스페인 회화관 입구. 좁은 벽면의 오른쪽 상단에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
이 공주의 모습을 보기 위해 많은 관람객들을 헤치면서 드농(Denon)관의 긴 복도를 거쳐 스페인 회화관으로 향한다. 이 초상화는 스페인 회화관 입구 쪽에 있는 좁은 벽면에 다른 스페인 화가의 그림 3점의 그림과 함께 걸려있는데 이곳을 찾은 관람객은 거의 없어서 좀 쓸쓸한 기분이 들지만 그림을 좀 더 가까이에서 집중적으로 차분하게 감상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 그림 아래에 붙은 설명서에는 벨라스케스가 1655년에 그린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이 그림 속의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는 4살 때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대작 <라스 메니나스>가 완성되기 1년 전에 그려진 것이다.
벨라스케스가 1655년에 그린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 |
그런데 그림 속의 어린 공주는 미소를 지을 듯 말 듯한 모나 리자와는 달리 근엄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전면을 직시하고 있는데, 혹시 그녀에게 닥쳐올 슬픈 운명을 예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부왕 펠리페 4세는 정략적으로 일찌감치 신성로마제국의 레오폴트1세에게 어린 딸과의 혼약을 제의했고 레오폴트는 이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레오폴트1세는 펠리페 4세의 두 번째 왕비의 남동생이니 마르가리타 테레사에게는 외삼촌이다.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15세가 되던 해인 1666년에 부왕 펠리페 4세가 타계하자 고향 마드리드를 떠나 멀리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으로 시집을 갔다. 두 사람은 연극과 음악을 좋아하여 문화적으로 공유하는 부분이 많았고 금실도 좋았다. 하지만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네 번째 아이를 출산하고 나서 몸조리를 제대로 못해 1673년에 그만 절명하고 말았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불과 21세.
그림 속의 어린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의 얼굴을 물끄러미 지켜보면서 라벨의 <어느 죽은 공주를 위한 파반느>의 애틋한 선율을 다시 떠 올려본다. 파반느는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는 파바나(pavana)라고 하는데 16, 17세기에 유럽에서 크게 인기를 끌던 우아하고 느린 춤곡이다.
라벨이 이 피아노 명곡을 작곡한 것은 20세기가 시작되기 직전인 1899년이었다. 당시 그는 24세로 파리 음악원에서 가브리엘 포레의 지도를 받고 있었다. 이 곡이 나중에 크게 인기를 얻자 라벨은 1910년에 이것을 오케스트라 곡으로 편곡을 했다. 라벨은 자신의 작품에 대해 ‘옛날 스페인 궁정에서 어린 공주가 추어봤을지도 모르는 파반느를 상기하는 곡'이라고만 설명했다.
그러니까 이 어린 공주는 역사 속에서 등장하는 특정한 인물이 아니니 라벨이 이 그림에서 영감을 얻어서 작곡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라벨이 루브르 박물관을 자주 찾았더라면 또 그가 무심코 언급한 스페인의 어린 공주가 실제의 인물이라면 문제의 어린 공주는 마르가리타 테레사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왜냐면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16~17세기의 어린 스페인 공주의 초상화라고는 이것이 유일하니 말이다.
◆ 정태남 건축사
이탈리아 건축사이며 범건축(BAUM architects)의 파트너이다. 건축 분야 외에도 음악, 미술, 언어, 역사 등 여러 분야에 박식하고, 유럽과 국내를 오가며 강연과 저술 활동도 하고 있다.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 <로마역사의 길을 걷다>,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이탈리아 도시기행> 외에도 여러 저서를 펴냈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