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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책 시비 거는 사람

임철순 한국일보 논설고문·자유칼럼그룹 공동 대표

2014.10.02 임철순 한국일보 논설고문·자유칼럼그룹 공동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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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학자인 심경호 고려대 교수의 글에 ‘자기 책 몰래 고치는 사람’이라는 글이 있다. 책과 제목이 같은 이 글이 다룬 것은 책을 낼 때 겪는 오자와의 싸움이다. 오자는 저자 자신이 잘못 쓰거나 출판사 측이 저자의 요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 생긴다. 심 교수는 어떤 경우든 오자는 결국 저자 책임이라고 말한다. 

심 교수는 책을 여러 권 내다보니 자기 책의 오자를 어떻게든 고쳐야겠다는 강박관념을 갖게 됐다고 한다. 재판 삼판을 찍으면 자연스럽게 오자를 바로잡을 수 있지만 문제는 그렇지 못한 경우다. 학술 서적을 재판 이상 찍는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심 교수는 눈에 띄는 대로 증정본에 가필을 하는 행각을 벌이게 됐다고 한다. 다른 연구실에 들렀을 때 증정본이 눈에 띄면 꺼내서 가필을 한다. 심지어 공공 도서관이나 학교 도서관에서도 자기 책이 눈에 띄면 몰래 꺼내서 살짝 고치곤 한다는 것이다. 심 교수는 글의 말미에 “여러분은 자기 책 몰래 고치는 사람을 가련히 여기시고, 뒷날 경솔하게 책을 내는 사람을 경계하는 자료로 삼아 주시기 바란다”고 말했다. 

심 교수는 가련하다고 치부해버리고 말 사람일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본받아야 할 사람이다. 남의 책이나 새 책에 몰래 가필을 하는 게 좋은 방법인지는 몰라도 그만큼 틀린 걸 바로잡으려고 노력하는 게 대단하지 않은가.

그런 분을 떠올리면서 책을 읽다 보면 엉터리 문장이나 주어 술어도 맞지 않는 번역, 맞춤법 띄어쓰기가 엉망인 경우 참기가 어렵다. 2년 전의 일이다. 1974년 초판을 낸 이후 30년 가까이 팔린 번역에세이집을 읽다가 첫 페이지부터 틀린 걸 발견했다. 내가 가진 책은 제 6판 1쇄였는데, 우리말이 안 되고 틀린 게 허다한데도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책을 계속 찍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오자만이 아니라 번역 자료로 삼은 원문에 관한 역자 후기도 납득하기 어려워 고쳐야 할 곳 스물아홉 군데를 적시한 메일을 역자와 출판사에 동시에 보냈다. 이 스테디셀러의 잘못된 점을 그동안 독자들 중 아무도 지적하지 않은 점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메일을 받은 출판사와 역자는 비상이 걸렸다. 출판사 대표는 편집간부를 내게 보내 사과했고, 역자도 젊은 날의 오류와 실수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메일을 보내왔다. 출판사 측은 그동안 판형이 여러 번 달라지고 편집 담당자도 바뀌는 바람에 그렇게 틀린 게 많은 것을 몰랐다면서 500부 정도 남은 책을 전량 폐기하고 원전에 충실한 번역으로 새로 찍겠다고 약속했다. 평소 호감을 갖고 있던 출판사여서 그 약속을 믿기로 했다. 그러나 아직 새 책을 내지는 못한 것 같다.

몇 달 전에는 번역시집을 읽다가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을 느낄 정도로 기분이 나빠졌다. 그 분야의 전문가라는 사람이 2008년에 낸 이 시집은 같은 시를 중복 게재하면서 번역을 다르게 한 경우가 두 개나 되고, 앞뒤가 통하지 않는 비문(非文)도 숱하게 많았다. 혹시 대학교수인 그 편역자가 이름만 자기를 내세우고 제자들을 시켜 일을 한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해도 초등학생 수준의 그 많은 오류를 납득할 수 없었다.

실망을 넘어 분노가 치밀어 이번에도 도저히 참지 못하고 출판사와 편역자에게 메일을 보냈다. 편역자는 깨끗이 잘못을 인정하고 그러잖아도 다시 찍으려 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다고 말했다. 출판사는 편역자보다 먼저 답신을 보내왔으나 공허한 대답이었다. 누구라고 밝히지도 않고 ‘편집부’라고만 쓴 메일은 오자를 잡아준 독자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사과하면서 다음에 책을 찍을 때 알려주신 잘못을 꼭 바로잡겠다고 약속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 책을 새로 찍을 가능성은 없어 보이며 저자와 협의를 거친 답변도 아니었다. 뻔한 겉치레 인사라고 지적했더니 출판사는 그 뒤 더 이상 메일을 보내오지 않았다.   

몇 년 전에는 원로 시인이 타계 1년 전에 낸 자서전을 읽다가 잘못된 곳이 많아 출판사에 알려준 일이 있다. 책이 나온 지 1년쯤 뒤에 그분은 타계했는데, 책이 영 안 팔렸는지 출판사는 책을 더 찍지 않았다. 유족들도 틀린 게 많아 아쉬워는 하고 있는데 어떻게 해서든 책을 다시 낼 생각은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최근에는 베스트셀러인 소설을 읽어보라고 어떤 출판사가 책을 보내주었기에 즐겁게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또 그놈의 ‘교정 본능’이 살아나 틀린 곳을 표시하게 됐고, 읽고 난 뒤 고쳐야 할 곳을 출판사에 알려주었다. 그랬더니 고맙다면서 다른 소설을 한 권 보내왔다. 지금 그 소설도 거의 다 읽었는데, 먼저 보내준 책과 비슷한 정도의 오자가 눈에 띄었다. 이걸 알려주면 또 다른 책을 보내주려나? 책을 내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도 틀린 게 많은데도 모를까?

하기야 남의 눈의 티끌은 잘 보이고 제 눈의 들보는 안 보이는 법이다. 나도 요즘 숱하게 틀리고 있다. 교정 본능을 잊고 내용에만 푹 빠져들 수 있는 그런 책을 자주 만나고 싶다. 이런 식의 지적질로 책을 얻게 되는 건 나도 더 이상 바라지 않는다.

임철순

◆ 임철순 한국일보 논설고문·자유칼럼그룹 공동 대표

언론문화포럼 회장, 자유칼럼그룹 공동대표. 보성고 고려대 독문과 졸. 1974~2012 한국일보사 근무. 기획취재부장 문화부장 사회부장 편집국장 주필, 이사대우 논설고문 역임. 현재 논설고문으로 ‘임철순칼럼’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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