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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문학의 찬란한 한시대를 열었던 조선의 대문호

[문인의 흔적을 찾아서] 담양 한국가사문학관/정철

2020.12.11 이광이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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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담양군 가사문학면에 자리한 한국가사문학관 전경.
전남 담양군 가사문학면에 자리한 한국가사문학관 전경.

‘정성이 지극하여 꿈에 임을 보니/ 옥 같은 얼굴이 반이나 늙었구나/ 마음에 먹은 말씀 싫도록 사뢰자니/ 눈물이 바로 나서 말인들 어이하며/ 깊은 정 다 못하여 목마저 메이는데/ 방정맞은 닭소리에 잠은 어찌 깨었던고’
꿈에도 그리던 임을 꿈에서 만났다. 옥 같은 얼굴이 반이나 늙었다. 할 말은 많은데 눈물이 앞선다. 목이 메어 말 못하고 있는데 닭 울음소리에 잠이 깨고 만다.    

‘아아 허사로다 이 임이 어딜 갔나/ 꿈결에 일어 앉아 창을 열고 바라보니/ 가엽은 그림자만 날 좇을 뿐이로다/ 차라리 죽어가서 낙월(落月)이나 되어서/ 임 계신 창 안에 드러나게 비추리라’
꿈 깨어 창을 열어보니 임은 사라지고 그림자만 어른거린다. 이대로 죽어 지는 달이 되어서 임 계신 창을 비추일까? 연모의 마음이 애절하다.

<사미인곡(思美人曲)>에서 시작하여 <속미인곡(續美人曲)>으로 넘어와 대단원의 끝을 앞두고 있다. 김만중이 ‘서포만필’에서 송강의 작품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이라 했고, 홍만종도 ‘순오지’에서 뛰어난 글이라 격찬했던 바로 그 대목이다. 속미인곡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이어진다.
‘각시님 달은 그만두고 궂은비나 되소서’ 

선녀로 상정되는 갑녀와 을녀, 두 여인의 대화체로 미인곡은 여기까지 왔다. 차라리 달이 되어서 임의 창을 비추고 싶다는 갑녀의 한탄에 을녀는 달은 그만 두고 궂은비가 되라 한다. ‘궂은비’는 무산지몽(巫山之夢)의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중국 초나라 회왕이 꿈에 무산 신녀와 깊은 사랑에 빠졌다가 이별에 이르러 신녀가 말하기를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朝雲) 저녁에는 비가 되어(暮雨) 늘 곁을 지키리라 하였다. 달이 아니고 비가 되라는 말은 아침 구름에 저녁 비, 운우지정(雲雨之情)을 암시하는 정념의 표현이다. 고신연주지사(孤臣戀主之詞), 초야에 묻힌 신하가 임금을 향한 충정을 여인의 정한에 우의적(寓意的)으로 빗대어 고백한 작품이다. 송강은 달이 아닌 비로 사랑의 완성을 노래하며 대미(大尾)를 장식한다. 조선 가사문학의 백미(白眉)로 꼽히는 작품이다.

문학관 제1전시실 송순과 나란히 송강 정철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의 시문집인 ‘송강집’.
문학관 제1전시실 송순과 나란히 송강 정철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의 시문집인 ‘송강집’.

송강 정철(1536~1593)은 조선 최고의 음유시인으로, 정승의 벼슬에 오른 관료로, 서인의 영수를 지낸 정치가로 한 시대를 풍미하였으되 그리 복된 삶은 아니었다. 그는 서울 장의동(지금의 청운동)에서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맏누이는 인종을 모시는 내명부 숙의가 되었고, 막냇누이는 종실인 계림군에게 출가하여 왕실과 인연이 깊었다. 그의 나이 10세에 을사사화가 일어난다. 자형 계림군은 역모로 처형되고, 부친 정유침은 유배되고, 맏형 정자는 유배 도중 장살되고, 둘째형은 도피 은거하면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정철은 16세에 해배된 아버지를 따라 선산이 있던 전남 담양으로 내려온다. 거기서 대학자 김인후의 문하에 들어 기대승 김윤제 등을 좇아 학문을 익혔다. 한시는 임억령에게서 수학했고, 가사는 송순으로부터 배웠다. 성혼과 이이와는 친교를 두터이 하고, 김성원 고경명 등과 시적교유를 하였으니 유년은 불우하였으되 당대 최고의 석학들로부터 교육을 받고 학맥을 쌓는 전화위복의 행운을 잡게 된다. 담양에서의 10년은 그가 훗날 조선의 대문호로 성장하는 자양분의 시간이었다. 

정철은 1561년(명종 16) 26세에 진사시 1등을 하였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면서 관계로 나아간다. 사헌부지평, 좌랑 현감 등의 벼슬을 거쳐 함경도 암행어사를 지낸 뒤 32세에 율곡과 함께 사가독서하였다. 1580년 45세에 강원도관찰사로 부임한다. 이때 지은 가사가 <관동별곡>이다. 이어 48세에 예조판서를 지냈고 이듬해 대사헌이 되었으나 동인의 탄핵을 받아 사직하고 창평으로 귀향하여 4년간 은거한다. 침잠하는 시간들 속에서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등 그의 걸작들이 탄생한다. 1589년 정여립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서인의 영수로 권력의 정점에 선다. 정여립 모반사건은 조선최대의 정치참사인 ‘기축옥사’로 이어진다. 그때 서인인 정철은 최고 심판관(委官)의 자리에 앉아 옥사를 혹독하게 다스리며 동인의 지도자급 인사들을 처형 또는 유배시키는 정적 제거의 악역을 맡게 된다. 피해자 가운데 이발은 형제·노모·자식까지도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그 뒤 약 3년여 정여립과 친교가 있거나, 동인이라는 이유로 처형된 학자와 호남의 선비가 무려 1천여 명에 달했다. 이후 전라도는 ‘반역향’으로 불리면서 약 200여년 동안 학맥이 끊기게 되며 반목과 대립이 후대까지 이어지는 후유증을 낳게 된다.

김만중이 ‘서포만필’에서 송강의 작품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이라 격찬했던 <속미인곡>의 필사본이다.
김만중이 ‘서포만필’에서 송강의 작품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이라 격찬했던 <속미인곡>의 필사본이다.

정철의 창평 낙향은 4차례 있었다. 40세 때 약 2년을 비롯하여 44세와 46세, 그리고 50세, 모두 정계에서 방축(放逐)됐을 때의 일이다. 네 번째 낙향에서 담양군 고서면, 멀리 무등산이 바라보이는 곳에 송강정을 짓고 작품 활동에 전념한다. 같은 산자락에 <성산별곡>의 무대가 된 식영정이 있다. 창평에서 네 번째 은거를 끝으로 그는 화려하게 정계에 복귀하였으나 56세 때 광해군의 왕세자 책립문제로 다시 북녘 땅 강계에서 혹독한 귀양살이를 하게 된다. 이어 57세 임진왜란 때 임금을 호종하고 이듬해 사은사로 명나라를 다녀오기도 했지만 끝내 동인에 의해 사직 당하고 강화의 송정촌에 우거하다가 58세로 생을 마치게 된다. ‘숯으로 바꾸어 먹고 소반에는 간장이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고 ‘송강집’은 그 무렵의 처지를 기록하고 있다. 그의 마지막은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빈곤에 시달리다가 비참하게 끝을 맺는다. 

작품으로 <관동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성산별곡> 등 4편의 가사와 시조 107수, 한시 740여 수가 전한다. 저서로는 시문집 ‘송강집’과 시가 작품집 ‘송강가사’가 있다. 조선 최고의 문인으로, 1천여 명의 선비를 도륙한 비정한 정치가로, 혹은 선조의 왕권강화를 위한 희생양으로, 한 생을 살면서 이처럼 파란만장하고 포폄(褒貶)의 극단에 서 있는 인물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한국가사문학관 제1전시실에 송순과 나란히 앉아 있는 것은 아름다운 우리말을 구사하면서 시가문학의 찬란한 한 시대를 열었던 조선의 대문호라는 것, 그것 하나로도 충분하다.

이광이

◆ 이광이 작가

언론계와 공직에서 일했다. 인(仁)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애인(愛人)이라고 답한 논어 구절을 좋아한다. 사진 찍고, 글 쓰는 일이 주업이다. 탈모로 호가 반승(半僧)이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과 인문서 ‘스님과 철학자’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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