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전자정부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뉴스

콘텐츠 영역

자연에 묻혀 오직 시인으로 살고자 했던 한 생

[문인의 흔적을 찾아서] 해남 삼당시인 백광훈 옥산서실

2021.04.26 이광이 작가
목록
손곡 이달, 고죽 최경창과 더불어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리며 명성을 떨쳤던 옥봉 백광훈. 그가 청년시절 은거하며 시를 쓰던 옥산서실.
손곡 이달, 고죽 최경창과 더불어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리며 명성을 떨쳤던 옥봉 백광훈. 그가 청년시절 은거하며 시를 쓰던 옥산서실.

옥봉 백광훈(白光勳 1537~1582)은 한 시대를 풍미한 또 하나의 걸출한 시인이다. 손곡 이달, 고죽 최경창과 더불어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리며 명성을 떨쳤다.

1547년, 그의 나이 11세. 당시 서당에 다니는 학동들 사이에 초-종장 놀이라는 것이 있었다. 시의 초장을 부르면 종장을 답하는 놀이이다. 어느 학형이 ‘춘(春)’을 불러 고시(古詩)로 종장을 답하라고 운을 떼었다. 백광훈은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강화수수춘(江花樹樹春)’이라 응수했다. 학형이 “그런 시구가 어디에 있느냐”고 하자 즉석에서 전편을 외웠다.  

「저녁놀 비낀 강에 피리소리(夕陽江上笛)
가랑비 속 강 건너는 사람 있네(細雨渡江人)
남은 울림 아득히 간 곳 없고(餘響杳無處)
강가 꽃나무마다 봄이 왔구나(江花樹樹春)」

시격이 완전하여 모두 그런 시가 있겠거니 했다. 백광훈이 곧이어 즉흥시임을 실토하자 좌중이 그의 시재에 놀라 감탄했다. 이 이야기가 향리에 퍼져 유명한 일화로 전해온다. <옥봉시집>에 전하는 시 <능소대 아래 피리소리를 들으며(陵宵臺下聞笛)>이다.

옥봉 백광훈의 초상. 백광훈과 더불어 <관서별곡>의 저자인 큰 형 백광홍, 문장에 뛰어난 둘째 형 백광안, 종형 백광성 등 한 집안에 네 명의 문인이 나왔다하여 ‘일문사문장(一門四文章)’으로 유명하다. 아들 백진남은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군량과 의병을 모집하는 활약을 펼쳐 <난중일기>에 ‘백진사’로 기록된 인물이다.
옥봉 백광훈의 초상. 백광훈과 더불어 <관서별곡>의 저자인 큰 형 백광홍, 문장에 뛰어난 둘째 형 백광안, 종형 백광성 등 한 집안에 네 명의 문인이 나왔다하여 ‘일문사문장(一門四文章)’으로 유명하다. 아들 백진남은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군량과 의병을 모집하는 활약을 펼쳐 <난중일기>에 ‘백진사’로 기록된 인물이다.

옥봉(玉峰)은 전남 장흥 출생으로 해남에서 자랐다. 우리나라 기행가사의 효시로 훗날 정철의 <관동별곡>에 영향을 준 <관서별곡>의 저자 백광홍이 큰 형이다. 문장에 뛰어난 둘째 형 백광안, 종형 백광성 등 한 집안에 네 명의 문인이 나왔다하여 ‘일문사문장(一門四文章)’으로 유명하다. 아들 백진남(1564~1618) 역시 문인이자 서예가로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군량과 의병을 모집하는 활약을 펼쳐 <난중일기>에 ‘백진사’로 기록된 인물이다.

어려서는 문신 이후백에게 배웠고, 22세에 진도로 귀양 와 있던 노수신을 사사했다. 1564년, 28세에 진사시에 합격한 이후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고, 더 이상의 과거시험도 포기했다. 처가인 해남 옥천면 원경산 옥봉 아래 ‘옥산서실’을 짓고 시를 쓰며 은거했다. 열 살 무렵 문재를 인정받고 앞길이 밝았던 백광훈, 지방의 미미한 양반가문 출신으로 재산이 많아 호의호식할 처지도 아닌데 왜 출세를 포기하고 뜬구름 같은 시인의 길에 들어섰을까?   

해남군 옥천면 송산리 옥산서실 앞에 옥봉의 유물관 건립 기념비가 서 있다.
해남군 옥천면 송산리 옥산서실 앞에 옥봉의 유물관 건립 기념비가 서 있다.

「지난 왕조의 절터에 가을 풀(秋草前朝寺)
남은 비석에 학사의 글(殘碑學士文)
천년을 흐르는 물(千年有流水)
지는 해에 돌아가는 구름을 본다(落日見歸雲)」

옥봉의 시 <홍경사(弘慶寺)>이다. 홍경사는 천안시 성환읍에 있던 절이다. 서울로 올라가는 국도 1호변이고 남으로 20km 내려가면 천안 삼거리로 경향을 왕래하는 교통의 요충지다. 1021년 고려 현종 때 창건됐다. 인가가 멀고 갈대가 우거진 늪에 도적이 출몰하여 절을 지은 것이다. 절 서쪽에 객관(廣緣通化院)을 세워 사람과 말에게 숙식을 제공했다. 한림학사 최충이 그 내용을 적어 비석을 세웠다. 500여년이 흐른 뒤 옥봉이 그 앞을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숱한 사람들이 머무르던 절과 여관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마당에 푸르렀던 풀은 가을, 잿빛으로 퇴색하고 있다. 오랜 비바람을 견디고 비갈(碑碣)만 남아 옛 학사의 문장을 전하고 있다. 천년을 흐르는 물은 변함없이 지금도 흐르고, 하늘에는 비낀 노을에 돌아가는 구름, 그리고 그 뜬구름을 응시하는 눈길 하나. 이 시는 유한(有限)과 무한(無限)의 대비일까? 절터와 가을 풀, 돌아가는 구름은 사라져가는 것들을, 돌과 글과 물과 해는 사라지지 않는 것들을 말함일까? 생명의 무상과 자연의 순환을 그려놓은 것일까?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것이 당시(唐詩)의 맛이다. 농담(濃淡)으로 그린 단순한 수묵 한 점 같은데 들여다볼수록 다채롭고 그 가을날의 봇짐 진 나그네가 자꾸 생각난다. 율곡은 옥봉의 시를 ‘맑음’(淸)이라고 평했다. <홍경사(弘慶寺)>는 <옥봉집>에 첫 수로 실려 있고, ‘잔비(봉선홍경사 갈기비)’는 국보 7호다.      

백광훈은 시문뿐 아니라 명필로도 이름을 날렸다. 특히 영화체(永和體)는 독보적 경지를 이뤄 해동필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유물관에 병풍으로 전시된 그의 필체.
백광훈은 시문뿐 아니라 명필로도 이름을 날렸다. 특히 영화체(永和體)는 독보적 경지를 이뤄 해동필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유물관에 병풍으로 전시된 그의 필체.

1572년(선조 5) 명나라 사신의 접빈 책임을 맡은 노수신이 시문을 응수할 인물로 해남에 은거하던 제자 백광훈을 불렀다. 관직에 있지는 않았는데도 제술관 임명을 간청하여 허락을 얻은 것이다. 스승을 따라 의주에 가서 사신을 맞았는데 중국 사신 일행이 그의 시와 서예를 보고 깜짝 놀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의 문재를 인정한 조정에서 수차례 관직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41세 되던 1577년 선릉참봉에 제수되어 첫 벼슬에 올랐다. 완산 영전참봉, 정릉참봉 등 능참봉을 거쳐 사암 박순의 천거로 1580년 참봉 겸 주자도감 감조관이 되었다.

백광훈은 시문뿐 아니라 명필로도 이름을 날렸다. 특히 영화체(永和體)는 독보적 경지를 이뤄 해동필가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이이, 송익필, 최립, 이산해, 양사언, 이순인, 하응림 등과 무이동(武夷洞)에 모여 교류하여 세간에서 이들을 ‘팔문장(八文章)’이라 불렀다.

정철은 <송강집>에서 ‘옥봉의 문장은 빼어남과 맑음을 기개로 하고 있고 청명한 시가와 오묘한 필법은 으뜸가는 재주다. 동이 술로 글을 논할 때 언제나 칼날처럼 서늘하였다’고 평했다. 신흠은 옥봉의 시를 “기는 완전하고 소리는 맑고, 색은 옅으면서 예스럽고, 뜻은 바르면서 법도에 맞다”면서 그의 시는 ‘천득’(天得)하였다고 극찬했다.

옥봉 백광훈을 모신 사당.
옥봉 백광훈을 모신 사당.

오직 시인으로 살고자 했던 옥봉은 1582년 참봉으로 재직하면서 병을 얻어 서울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46세. 경제적 궁핍으로 잠깐 낮은 벼슬에 나아갔을 뿐 그는 한 생을 시와 더불어 자연에 묻혀 살다가 갔다. 그는 오언절구 116편 137수, 칠언절구 199편 231수, 오언율시 72편 79수, 칠언율시 34편 37수, 오언고시 16수, 칠언고시 14수로 총 451편 514수에 달하는 시를 남겼다. 사후 16년만인 1608년, 아들 진남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유고들을 정리 수습하여 절도사 윤안성이 <옥봉시집>을 간행했다. 

이광이

◆ 이광이 작가

언론계와 공직에서 일했다. 인(仁)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애인(愛人)이라고 답한 논어 구절을 좋아한다. 사진 찍고, 글 쓰는 일이 주업이다. 탈모로 호가 반승(半僧)이다. 음악에 관한 동화책과 인문서 ‘스님과 철학자’를 썼다.

이전다음기사

다음기사근거 기반 생활체육 정책 위한 ‘패널조사 도입’ 필요성

히단 배너 영역

추천 뉴스

2024 정부 업무보고 국민과 함께하는 민생토론화
정부정책 사실은 이렇습니다

많이 본, 최신, 오늘의 영상 , 오늘의 사진

정책브리핑 게시물 운영원칙에 따라 다음과 같은 게시물은 삭제 또는 계정이 차단 될 수 있습니다.

  • 1. 타인의 메일주소, 전화번호, 주민등록번호 등의 개인정보 또는 해당 정보를 게재하는 경우
  • 2. 확인되지 않은 내용으로 타인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경우
  • 3. 공공질서 및 미풍양속에 위반되는 내용을 유포하거나 링크시키는 경우
  • 4. 욕설 및 비속어의 사용 및 특정 인종, 성별, 지역 또는 특정한 정치적 견해를 비하하는 용어를 게시하는 경우
  • 5. 불법복제, 바이러스, 해킹 등을 조장하는 내용인 경우
  • 6.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광고 또는 특정 개인(단체)의 홍보성 글인 경우
  • 7. 타인의 저작물(기사, 사진 등 링크)을 무단으로 게시하여 저작권 침해에 해당하는 글
  • 8. 범죄와 관련있거나 범죄를 유도하는 행위 및 관련 내용을 게시한 경우
  • 9. 공인이나 특정이슈와 관련된 당사자 및 당사자의 주변인, 지인 등을 가장 또는 사칭하여 글을 게시하는 경우
  • 10. 해당 기사나 게시글의 내용과 관련없는 특정 의견, 주장, 정보 등을 게시하는 경우
  • 11. 동일한 제목, 내용의 글 또는 일부분만 변경해서 글을 반복 게재하는 경우
  • 12. 기타 관계법령에 위배된다고 판단되는 경우
  • 13. 수사기관 등의 공식적인 요청이 있는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