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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성지에서 엿보는 젊은 쇼팽의 고뇌

[정태남의 클래식 여행] 오스트리아/ 빈(Wien)

2021.11.26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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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의 수도 빈(Wien)은 세련되고 귀족적인 기품을 지닌 도시이다. 특히 크리스마스 불빛이 거리를 장식할 때면 그 아름다움은 더욱더 돋보인다. 빈의 중심가에는 ‘황금의 U(Goldenes U)’라고 하는 구역이 있다. 이것은 캐른트너 슈트라세, 그라벤, 콜마르크트가 마치 U자처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인데 이 구역은 빈 최고의 번화가이다. 그중 콜마르크트(Kohlmarkt)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궁 입구인 미하엘러토어(Michaelertor)와 직선으로 연결된 명품거리이다.
 
콜마르크 9번지 건물 기둥에는 쇼팽을 기념하는 명판이 붙어있다. 명판에는 ‘쇼팽 (1810-1849)이 1830년 11월부터 1831년 7월까지 4층에서 살았으며, 이 집은 1900년까지 이 자리에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명판에 조각된 쇼팽의 옆모습을 보면 표정이 왠지 굳어있는 것만 같다. 또 어쩐지 그의 <스케르쪼 1번 b 단조 Op.20>가 들려올 것만 같다.

빈의 번화가 콜마르크트에서 본 합스부르크 황궁.
빈의 번화가 콜마르크트에서 본 합스부르크 황궁.

빈은 수많은 위대한 음악가들을 포용했던 ‘음악의 성지’이다. 하지만 쇼팽에게 빈은 아주 고통스러운 곳이었다. 왜 그랬을까?
 
쇼팽은 1810년 3월 1일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남쪽으로 46km 떨어진 젤라조바 볼라에서 태어났다. 프랑스 출신인 그의 아버지는 그해 10월 바르샤바 고등학교의 프랑스어 교사로 임용되자 가족을 데리고 바르샤바로 이주했다. 바르샤바에서 자란 쇼팽은 피아노에 연주에 뛰어나서 이미 7세 때 대중들 앞에서 연주회를 가졌고 당시 폴란드를 지배하던 러시아의 총독은 그를 총독관저로 초대하곤 했다.
 
쇼팽은 16세에 바르샤바 음악원에 입학해 스승 엘스너의 지도 아래 작곡을 공부했다. 그 후에는 더 넓은 세상에서 활동하기 위해 1830년 겨울 이전에 음악의 도시 빈으로 떠나기로 결정했다. 이리하여 그해 10월 11일 고별 음악회를 열었는데 그때 그는 <피아노 협주곡 제1번 e단조>를 초연했다. 쇼팽은 빈으로 떠나는 날짜를 1830년 11월 2일로 잡았다. 떠나기 전날 밤 친구들은 그에게 조국을 잊지 말라며 폴란드의 흙을 담은 은제 용기를 선물했다. 떠나는 날 아침 집을 나설 때는 그의 스승 엘스너가 그를 위해 작곡한 애국적인 내용의 짧은 칸타타가 합창으로 울려 퍼졌다.  

쇼팽이 청운의 꿈을 안고 빈에 도착한 것은 1830년 11월 22일. 그러니까 베토벤이 죽은 지 3년, 슈베르트가 죽은 지 2년이 지난 다음이었다. 당시 빈 사회는 향락의 절정에 이르고 있었다. 쇼팽은 어느 백작 부인의 호화스러운 아파트의 방 몇 개를 세 얻어 살면서 희망찬 나날을 맞이하고 있었다.

쇼팽이 거주했던 아파트가 있던 곳, 옛 건물 자리에 새 건물이 들어섰다.
쇼팽이 거주했던 아파트가 있던 곳, 옛 건물 자리에 새 건물이 들어섰다.

그는 매일 저녁 여러 곳에 초대받기도 하고 유명한 음악가들뿐만 아니라 많은 유명인사들과도 친분을 갖게 되었으니 빈에서 곧 멋진 첫 크리스마스를 맞으리라는 생각에 들떠있었으리라. 하지만 그의 달콤한 꿈은 열흘을 넘기지 못했다.

그해 11월 30일 폴란드 사람들이 러시아의 지배에 항거하여 대대적으로 일어서자 모든 상황은 완전히 바뀌기 시작했던 것이다. 쇼팽은 반러시아 저항운동에 참가하기 위해 고국으로 되돌아가려했다. 하지만 그의 폴란드 친구들은 총이 아니나 재능으로 조국에 충성하라면서 빈에 남아있으라고 했다.
  
한편 폴란드 분할에 관여했던 오스트리아는 이 폭동을 방관할 수 없었고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폴란드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신의 실수’라고까지 공공연히 말할 정도로 돌변했다. 그뿐 아니라 폴란드에서 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천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빈 사람들이 폴란드에서 온 20세의 젊은 폴란드 음악가를 환호할 리 없었다.

쇼팽 기념 명판. 쇼팽의 표정이 왠지 굳어있는 것 같다.
쇼팽 기념 명판. 쇼팽의 표정이 왠지 굳어있는 것 같다.

절망에 빠진 쇼팽은 경제적 압박과 가족에 대한 염려와 고독감으로 괴로운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중 다행히 어느 귀족 부인의 주선으로 관중들 앞에 설 기회를 가진 그는 <피아노 협주곡 1번 e단조>를 연주했다. 하지만 연주회장은 텅텅 비어있었다. 

그 사이 쇼팽의 오스트리아 친구들은 하나둘 멀리 떨어져 갔고, 한때 그를 열렬하게 대하던 피아니스트 체르니도 몹시 차가워져 있었다.
  
폴란드 사람들이 그렇게도 열망하던 프랑스와 영국의 지원이 말로만 그치자 폴란드 내 반러시아 저항 운동은 무참히 짓밟혀지기 시작했다. 이런 절망의 상태에서 쇼팽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루속히 빈을 떠나 ‘열린 도시’ 파리로 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나마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경찰의 방해로 심한 곤혹을 치러야 했다.

쇼팽은 빈에서 여덟 달을 보내면서 고뇌 속에서도 <12개의 연습곡 Op.10> 일부를 완성했고 <스케르쪼 1번 b 단조 Op.20> 작곡에 착수했다. 스케르쪼(scherzo)는 이탈리아어로 ‘장난’, ‘농담’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스케르쪼’라는 제목이 붙은 음악은 일반적으로 밝고 명랑하다. 하지만 이런 뜻과는 달리 이 곡에는 격렬한 감성이 녹아들어 있다. 즉, 그의 마음을 짓누르는 고국의 상황과 빈에서 겪은 아픔이 그 안에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이리라. 쇼팽은 20세에 폴란드를 떠나 19년 후에 프랑스 파리에서 삶을 마감할 때까지 그토록 그리던 조국 땅은 다시 밟지 못했다.  

정태남

◆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건축 분야 외에도 음악·미술·언어·역사 등 여러 분야에 박식하고, 유럽과 국내를 오가며 강연과 저술 활동도 하고 있다.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 외에도 여러 저서를 펴냈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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