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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혼곡과 스페인 화가

[클래식에 빠지다] 고야, 피카소 그리고 헤밍웨이

2022.06.07 김상균 바이올리니스트

“역사를 기억하지 못한 자, 그 역사를 다시 살게 될 것이다”.

스페인 출신의 미국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George Santayana)가 역사에 대해 정의한 말이다. 역사적 사실과 경험을 통한 고찰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거친 항해 속 나침반과도 같다.

특히 인류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와 동일시되고 있는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쟁의 공포와 학살은 우리에게 무거운 울림으로 다가오고 있다.

역사를 기록하는 자들은 그 무거운 울림 속에서 자신만의 신념과 객관적 시선으로 그들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데, 그 중 몇몇 예술가는 그들 자신의 작품을 통해 ‘시대의 반영’이라는 예술가적 책무를 다 하고 있다.

사마천이 죽음보다 더한 수치스러움과 고통을 참으며 ‘사기(史記)’를 집필한 것처럼 화가들 역시 자신의 그림을 통해 역사에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화가와 문인이 붓과 펜을 무기로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고 있다면, 음악가는 진혼곡을 통해 희생자들의 혼을 달래주고 있다.

본래 진혼(鎭魂)이란 “죽은 사람의 넋을 달래어 고이 잠들게 함”이란 뜻으로, 진혼곡은 작은 의미로는 장례미사곡인 레퀴엠(Requiem)이며 크게는 죽은 모든 이들을 위령(慰靈)하는 의미의 곡이다.

그리고 전쟁의 학살을 표현한 그림과 진혼곡은 우리에게 그것의 참상을 전해주는 또 하나의 언어라 볼 수 있다.

영국 런던 국립미술관에서 진행된 전시회에서 한 관람객이 프란시스코 데 고야의 작품 앞에서 작품 속의 여인처럼 아이를 안고 있다. (사진=저작권자(c) EPA/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영국 런던 국립미술관에서 진행된 전시회에서 한 관람객이 프란시스코 데 고야의 작품 앞에서 작품 속의 여인처럼 아이를 안고 있다. (사진=저작권자(c) EPA/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스페인의 화가들

스페인은 유럽에서도 매우 독특하고 여러 혼합된 문화와 역사가 녹아 있는 곳이다. 지금의 스페인이 있는 이베리아 반도는 역사적으로 여러 민족과 국가들의 침략으로 오랜 동안 많은 부침을 겪어왔다.

현재도 분쟁중인 이베리아 지역은 고대 로마의 통치하에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이후에는 이슬람 세력하에 놓이게 되었다.

동로마제국에 가로막혀 유럽으로 진출하지 못했던 이슬람 세력이 지브롤터 해협을 지나 이 지역을 차지하게 된 것은 BC. 711년경이였다.

최후세력인 나스르 왕조(Nasrid dynasty)가 퇴각할 때까지 스페인은 오랜 기간 이슬람 지배하에 놓였는데, 우리나라로 보자면 통일신라시대에서 조선 초기까지의 800년간이라 볼 수 있다.

이후 기독교세력이 다시 영토를 되찾게 되는데, 이런 역사적 이유로 그들의 문화에는 이슬람과 가톨릭 양식이 서로 혼재되어 있다.

커다란 두 종교의 영향은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었는데 알타미라 동굴벽화를 그린 그들의 조상처럼 스페인의 화가들에게 그림은 단순한 미술이 아닌 생각과 사상을 표현하는 도구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엘 그레코, 벨라스케스, 달리 등 스페인의 천재적인 화가들과 함께 또 다른 두 명의 거장은 전쟁의 참상을 알린 작품으로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는데, 그들은 바로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와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다. 

◆ 고야 <진노의 날(Dies Irae)>

고야의 <1808년 5월 2일>(위)과 <1808년 5월 3일> 작품. (사진=기고자 제공)
고야의 <1808년 5월 2일>(위)과 <1808년 5월 3일> 작품. (출처=저작권 만료 명화 무료 다운 사이트 ‘아트비 artvee’)

스페인의 고전과 근대를 이어주는 화가 고야는 두 점의 기념비적인 역사화를 남겼다. 하나는 <1808년 5월 2일>이고 다른 하나는 다음날인 <1808년 5월 3일>이다.

두 작품은 연작시리즈로 마드리드를 점령한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와 스페인 민중 사이의 역사적 사건을 그린 그림이다.

당시 영국의 넬슨제독에게 패한 나폴레옹은 경제적 봉쇄를 위해 영국과 교류하는 포르투갈을 침공하기로 한다. 포르투갈로 가기 위한 길을 열어달라고 스페인에게 부탁한 후 포르투갈을 점령한 나폴레옹은 길을 내어준 스페인까지 점령하게 된다.

군주를 내쫓고 자신의 형을 국왕으로 앉힌 나폴레옹에 대한 스페인 민중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시민들은 직접 프랑스군과 싸우게 되었다. 귀족들은 이미 해외로 망명한 상태였고, 힘없는 서민들은 결국 프랑스 군에 몰살 당하게 된다.

작품 <1808년 5월 2일>은 당시 마드리드의 쏠 광장에서 벌어진 전투를 묘사한 그림이고 다음날인 <5월 3일>은 처형당하는 시민들을 그린그림이다.

이중 <5월 3일>이 그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진 이유는 작품에서 보여지는 처연함과 숭고함이 <5월 2일>보다 휠씬 극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림 중앙 하얀 옷에 양팔을 벌리고 총살당하는 남자는 마치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실제 그의 손에는 못 자국도 보인다.

맨 왼쪽에는 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어둡게 그려져 있는데 이는 성모 마리아가 죽은 예수의 시신을 무릎에 안은 구도인 피에타(Pieta)를 떠올리게 한다.

그림은 자신의 희생으로 인간을 구원한 그리스도처럼, 스페인 민중의 희생으로 나라를 구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듯하다.

죽은 이들을 위한 진혼미사곡인 레퀴엠에는 안식을 비는 ‘입당 송’과 자비를 비는 ‘자비 송’이, 그리고 부속가들이 이어진다.

부속가의 첫 번째 단이 ‘진노의 날’, 라틴어로는 ‘Dies Irae’ 인데 요한 묵시록에 나와있는 ‘최후 심판의 날’에 망자의 영혼을 가엾게 여겨 달라고 청하는 내용이다.

대중적으로 베르디(G.Verdi)와 모차르트의 곡이 유명한데 특히 베르디의 ‘진노의 날’은 오페라 작곡가답게 극적인 감동을 주고 있다.

고야의 두 역사화는 ‘진노의 날’을 연상시키는데 특히 베르디의 ‘진노의 날’ 곡 앞부분은 작품 <5월 2일>을, 트럼펫 팡파르 이후 처연한 느낌을 주는 후반부분은 <5월 3일>을 떠올리게 한다. 모차르트의 ‘진노의 날’ 또한 강렬한 고야의 두 작품과 비슷한 정서적 느낌을 주고 있다.

◆ 피카소, 그리고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Adagio for Strings)>

지난해 5월 29일 오후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린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을 찾은 시민들이 6·25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 <한국에서의 학살>을 관람하고 있다. (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지난해 5월 29일 오후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린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을 찾은 시민들이 6·25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 <한국에서의 학살>을 관람하고 있다. (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피카소의 작품 <게르니카>와 <한국에서의 학살>은 전쟁의 참상을 그린 그의 대작들이다. 설명이 필요 없는 <게르니카>는 스페인 내전 당시 단지 새로운 무기시험용으로 스페인 게르니카 마을을 폭격한 독일군의 잔혹함을 표현하고 있다.

멍한 황소머리, 울부짖는 말과 죽은 아이를 안고 오열하는 여자 등 대상을 흑백 톤으로만 처리해 기하학적인 그림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느낌은 무겁게 다가온다.

게르니카는 피카소의 요청으로 프랑코 독재정권에서는 전시되지 못했고, 이후 민주화된 조국에서 그의 탄생 100주년에 맞추어 마드리드에 전시되고 있다.

또 하나의 작품인 <한국에서의 학살>은 고야의 <5월 3일>과 마네(Edouard Manet)의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의 오마주라고 볼 수 있다. 6·25전쟁을 모티브로 한 이 작품은 한동안 많은 이념적 논란이 있었지만 최근 국내 전시되었다.

이 작품이 황해도 신천 대학살에 영감을 받아 제작되었다는 논란이 있었지만 최근 연구결과 피카소는 1950년 9월에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고, 학살이 국제사회에 보고된 시점은 1952년으로 그림과 무관하다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또한 그림은 투구를 쓴 군인과 임신한 서양여인처럼 보이는 얼굴 등 주체가 명확하지 않아 그가 파시즘으로부터 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 가입했던 프랑스 공산당으로부터 불만을 들어야 했다.

당시 이데올로기적 관점과 지금의 관점은 같을 수 없지만 그가 추구하던 인류애적 사상과 정의로움은 작품을 통해 숭고하게 녹아 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피카소의 두 작품과 어울리는 사무엘 바버(Samuel Barber)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는 곡과 그림의 분위기를 통해 휴머니즘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들어 준다.

바버는 현대 작곡가이지만 동시대 작곡가들처럼 난해한 화성과 곡을 쓰지 않았다. 좀 더 보편적이고 시적이며 아름다운 멜로디를 통해 음악의 본질에 접근한 작곡가이다.

그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는 진혼곡으로 작곡되진 않았지만, 루즈벨트와 케네디 대통령, 아인슈타인, 그레이스 켈리등의 장례식에 연주되며 많은 이들의 가슴을 적셨다. 특히 올리버 스톤 감독의 반전(反戰)영화 <플레툰>의 OST로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피카소의 그림과 바버의 음악을 통해 우리는 때때로 장황한 연설이나 수많은 책보다 음악과 그림 하나가 주는 울림이 크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헤밍웨이의 깊이 있고 진실한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의 배경은 스페인이다. 작가 자신이 경험한 스페인 내전을 통해 전쟁의 잔혹함과 비인간성을 생생하게 고발하고 있다. 작가는 전쟁 속에서도 사랑이라는 키워드를 놓지 않았다. 마치 판도라 상자에 남은 한가지처럼.

버나드 쇼(Bernard Shaw)는 이렇게 말했다. “역사는 되풀이되는데 이를 항상 예측하지 못한다면 인간은 얼마나 경험에서 배울 줄 모르는 존재인가”라고.

지금 우리가 처한 세계도 비단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은걸 보면 불행히도 그의 통찰력은 세대를 뛰어넘어 적용되고 있다.

6월은 우리에게 항쟁과 전쟁 등 수많은 아픔과 고통, 희열을 주었다. 역사란 과연 승자들만의 기록인가? 6월이 주는 역사적 의미를 우리는 잊지 말자.

☞ 추천음반

베르디와 모차르트 레퀴엠 중 “진노의 날(Dies Irae)”은 개인적으로 카라얀(Karajan)과 아바도(Abbado)의 연주를 추천한다.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는 첼리비다케(Celibidache)의 심오한 연주와 네빌 마리너(Neville Marriner)의 Academy of St Martin in the Fields의 연주를 권하겠다.

김상균

◆ 김상균 바이올리니스트

서울대 음대 재학 중 오스트리아로 건너가 비엔나 국립음대와 클리블랜드 음악원 최고연주자과정 최우수 졸업. 이 후 Memphis 심포니, Chicago civic오케스트라, Ohio필하모닉 악장 등을 역임하고 London 심포니, Royal Flemisch 심포니 오디션선발 및 국내외 악장, 솔리스트, 챔버연주자로도 활발히 활동 중이다. eigenarti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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