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 강이라면 독일 민요 <로렐라이>와 게르만 서사시 <니벨룽의 노래>, 로베르트 슈만의 <라인 교향곡> 등이 먼저 머리에 떠오른다. 옛날 라인 강은 도나우 강과 함께 로마 제국의 북쪽 국경선으로 문명세계인 로마제국과 비문명세계인 게르만족의 땅을 나누던 경계선이었으나 로마제국이 멸망한 다음에는 역사의 무대에 올라선 게르만 족의 젖줄이 되었다.
라인 강은 스위스의 알프스 산맥에서 발원하여 프랑스, 독일을 지나 네덜란드를 거쳐 북해로 흘러들어 가는 1200km가 넘는 긴 강이다. 한편 라인 강 하류의 주요 세 도시 본·쾰른·뒤셀도르프는 서로 매우 가깝다. 일반 기차편으로 본-쾰른 구간, 쾰른-뒤셀도르프 구간은 20분대 거리이다.
이 라인 강변의 세 도시들 중에서 본(Bonn)은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9년부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난 다음 베를린이 통일독일의 수도 지위를 되찾는 1990년까지 서독의 행정수도였다. 이 아담한 소도시가 또 한 가지 크게 내세울 것이 있다면 바로 악성 베토벤의 고향이라는 사실. 그뿐 아니다. 이곳에는 낭만주의 시대의 거장 슈만과 그의 아내 클라라가 영원히 잠들고 있다.
본 시가지의 중심부 뮌스터 광장에는 베토벤의 동상이 이 도시를 지키는 수호성인처럼 세워져있다. 베토벤은 작은 키에 고개를 약간 위로 쳐올리고 떠오르는 음악적 영감을 오른손에 든 펜으로 왼손에 든 오선지에 옮기려는 듯한 자세이다. 묵묵히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그의 표정을 자세히 보면 결코 순탄치 않았던 그의 인생 역정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것만 같다.
그는 17세가 되던 해인 1787년에는 막강한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이던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가서 모차르트를 방문했고, 모차르트는 그의 천재성에 주목했다.
그런데 베토벤은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어머니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후 22세 때이던 1792년에는 고향을 완전히 떠나 빈으로 이주했는데 그가 빈에 도착했을 때 모차르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모차르트의 사망으로 공백이 생긴 빈 음악계에 혜성같이 새롭게 등장한 그는 제2의 고향 빈에서 34년 동안 활동하다가 1827년 5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이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까지의 음악세계를 지배했다면, 슈만은 멘델스존과 함께 1850년까지 음악 세계를 이끌었다. 1810년 독일 동북부 작센 지방의 작은 도시 츠비카우에서 태어난 슈만은 어머니의 강압으로 라이프치히에서 법률을 공부하다가 19세 때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옮겼다. 하지만 음악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라이프치히로 돌아갔다.
30세가 되던 1840년 9월에는 클라라의 아버지의 극렬한 반대를 물리치고 그녀와 결혼했다. 라이프찌히와 드레스덴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슈만은 작곡가 겸 비평가로서 유명했고, 그의 아내 클라라는 당시 가장 뛰어난 피아니스트 중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그러다가 슈만은 뒤셀도르프 시의 음악감독으로 초빙 받고 40세가 되던 1850년에 가족과 함께 뒤셀도르프로 이주했다.
라인 강에 매료되었던 그는 하이네의 시 ‘라인에서, 거룩한 흐름에서’에 묘사된 쾰른 대성당을 실제로 보고 싶어서 그해 9월 후반 쾰른으로 여행했고 그후에도 다시 한 번 쾰른을 비롯한 라인지방으로 여행했다. 이 여행에서 영감 받아 작곡한 것이 바로 <교향곡 3번 ‘라인’>, 일명 <라인 교향곡>이다.
그런데 1854년 초반부터 그는 급격히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2월 10일부터는 청각이상으로 고통을 받았고 17일에는 한밤중에 일어나 마치 누구에게 홀린 듯 곡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는 혼령들이 그를 둘러싸고 선율을 들려주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된 이 곡의 제목은 <피아노를 위한 주제와 변주 E플랫 장조>, 보통 <유령 변주곡(Geistervariationen)>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다가 2월 27일 아침, 슈만은 라인 강에 몸을 던졌다. 다행히 곧 구조되었지만 그의 눈은 초점을 완전히 잃은 상태였다.
5일 후 그는 본(Bonn) 외곽의 엔데니히 정신병동으로 옮겨져 외부와 격리된 상태에서 투병하게 되는데, 힘겹게 일곱 자녀를 홀로 키워야했던 클라라는 약 2년 5개월이 지난 다음에야 남편 문병이 가능했다.
병상의 슈만은 그녀를 알아봤는지 뭐라고 몇 마디 중얼거리고는 이틀 후인 1856년 7월 29일 오전 4시, 병상에 홀로 남겨진 채 영원히 눈을 감았다.
그의 시신은 본의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후 40년이 흐른 1896년, 클라라는 프랑크푸르트에서 76세의 일기로 숨을 거두기 전에 떨리는 목소리로 유언했다. 사랑하던 남편 곁에 묻어달라고...
◆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건축 분야 외에도 음악·미술·언어·역사 등 여러 분야에 박식하고, 유럽과 국내를 오가며 강연과 저술 활동도 하고 있다.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 외에도 여러 저서를 펴냈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culturebox@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