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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의 구조를 다시 설계할 때다

2026.03.04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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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수출 다변화는 특정 국가 비중을 낮추는 단순한 분산 전략이 아니다. 거대한 변화의 파고 속에서도 수출이 끊기지 않게 하는 '구조적 면역력'을 확보하는 일이다. 경제안보 시대의 수출 전략은 '어디에 얼마나 팔 것인가'보다 '어떤 환경에서도 수출을 지속할 체계를 어떻게 갖출 것인가'의 문제로 전환됐다. 관세 인상, 수출통제, 규범 강화, 경쟁국의 산업 고도화가 동시에 진행되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

지난 수십 년간 한국 수출을 떠받쳐 온 자유무역 질서는 전환점에 서 있다. 오늘날 세계 경제는 단순한 관세 인상을 넘어, 상호의존을 전략적 압박 수단으로 활용하는 '무기화된 상호의존'의 시대로 이동했다. 트럼프 2기 행정부는 관세를 상시적 통상 수단으로 활용하며 자국 산업 보호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유럽연합(EU)은 탄소·공급망 규범을 강화하고, 중국은 핵심광물 통제를 확대하고 있다. 이제 수출의 성패는 가격과 품질이 아니라 정책과 기술 질서가 좌우한다.

이 같은 흐름은 이미 현실의 불확실성으로 나타나고 있다. 최근 미국의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을 근거로 한 관세부과에 법원의 위법 판단이 나오면서 관세를 둘러싼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관세의 유지 여부와 후속 조치를 둘러싼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대미 수출의 예측 가능성은 낮아졌고, 기업의 투자와 생산 전략 역시 재검토를 요구받고 있다.

여기에 더해 주목해야 할 변수는 중국 산업의 질적 도약이다. 중국은 더 이상 한국의 추격자가 아니다. 인공지능 연산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춘 자체 컴퓨팅 생태계를 구축하고, 휴머노이드 로봇 부품과 플랫폼 분야에서 높은 점유율을 확보하고 있다. 반도체에서도 기술 격차를 빠르게 좁히며, 서방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핵심 장비 국산화에 가시적 성과를 내고 있다. 이는 단순한 기술 추격을 넘어 산업 표준과 설계 주도권이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23일 경기 평택시 포승읍 평택항에 수출용 컨테이너가 쌓여있다. 2026.2.23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3일 경기 평택시 포승읍 평택항에 수출용 컨테이너가 쌓여있다. 2026.2.23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이제 수출 다변화는 특정 국가 비중을 낮추는 단순한 분산 전략이 아니다. 거대한 변화의 파고 속에서도 수출이 끊기지 않게 하는 '구조적 면역력'을 확보하는 일이다. 경제안보 시대의 수출 전략은 '어디에 얼마나 팔 것인가'보다 '어떤 환경에서도 수출을 지속할 체계를 어떻게 갖출 것인가'의 문제로 전환됐다. 관세 인상, 수출통제, 규범 강화, 경쟁국의 산업 고도화가 동시에 진행되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무엇보다 규범 대응력을 하나의 수출 경쟁력으로 인식해야 한다. 미국의 수출 통제와 현지 생산 요건, EU의 탄소·공급망 규범은 시장 진입의 기본 조건이 되었다. 제품 설계 단계부터 권역별 규정을 반영하고, 제도 변화에 따라 부품 구성과 원산지를 조정할 수 있는 유연성을 확보해야 한다. 가장 엄격한 기준을 가장 먼저 충족하는 '신뢰받는 공급자'로 자리 잡는 것이 장기 경쟁력을 좌우한다.

상호의존이 무기화된 시대라면, 의존을 축소하기 보다는 그 방향을 설계해야 한다. 중국이 규모와 가격으로 시장을 넓힐수록 한국은 대체 불가능한 영역을 선점해야 한다. 반도체 공정 안정성, 고정밀 소프트웨어, 핵심 소재처럼 생산 시스템에 깊이 결합되는 분야나 유지보수와 업그레이드가 수반되는 거래는 단순 물량 공급과 다르다. 이러한 영역에서는 제품뿐 아니라 기술과 운영 역량이 함께 축적되기 때문에, 상대 산업이 성장할수록 우리의 역할도 확대된다.

수출 다변화의 또 다른 축은 통상 인프라의 정비다. 보호무역이 확산되는 환경에서 제도적 시장 접근을 확보하지 못하면 기업 전략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전통적 자유무역협정(FTA)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모든 국가가 포괄적 협정에 적극적인 것은 아니다. 이에 따라 경제동반자협정(EPA), 무역·투자촉진프레임워크(TIPF), 디지털 무역협정, 상호인증협정(MRA), 공급망 협력 등 다양한 수단을 기능별로 활용해야 한다. 관세 인하에 더해 인증 간소화, 통관 협력, 데이터 이동, 투자 보호 등 실질적 진입 비용을 낮추는 장치가 병행돼야 한다. 최근 브라질과의 정상 외교를 계기로 핵심광물 협력과 메르코수르 협상 재개에 공감대가 형성된 것도 이러한 전략적 접근을 보여주는 의미있는 사례다.

중국과의 교역 역시 단절이 아니라 재배치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최근 3년간 대중 무역적자 전환은 산업 구조 변화의 신호다. 중국은 여전히 거대한 제조 인프라이자 소비 시장이다. 중요한 것은 의존의 크기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부가가치의 중심을 어디에 둘 것인가다. 제조 기반은 활용하되, 설계·데이터·핵심 공정 기술은 국내에 유지하는 정교한 분업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 범용 중간재 경쟁에 머무른다면 적자 구조는 고착될 가능성이 높다.

미·중 전략 경쟁이 장기화된 환경에서 한국이 지정학적 중립을 유지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어느 한쪽을 택하는 것도 해법은 아니다. 서로 다른 기술 체계와 규범이 병존하는 상황에서 그 정합성을 설계하고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을 확보해야 한다. 중국에서 생산된 제품이 서방 시장의 보안·탄소·인증 요건을 충족하도록 설계하고, 서방 기업이 중국 공급망을 활용하면서 핵심 기술 통제를 유지할 수 있게 조율하는 영역에서 한국의 역할이 있다. 이는 단순한 중간자가 아니라 체계를 설계하는 위치다.

경제안보 시대의 수출 경쟁력은 단기 성과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위치에서 나온다. 외부 충격이 반복되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기반, 기술과 규범이 변화하더라도 대체되기 어려운 역할을 확보하는 것이 앞으로의 수출을 좌우한다. 수출 다변화는 지리적 분산을 넘어 산업 체계와 통상 전략을 함께 재설계하는 과제다. 자유무역 이후의 질서에서 한국은 수출의 '규모'를 지키는 데 머물 것이 아니라, 세계 가치사슬 속 '위치'를 다시 세워야 한다.

장상식

◆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

연세대 경제학과와 KDI대학원(MBA)을 거쳐 건국대에서 무역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2년 한국무역협회 입사 후 30년 이상 수출입 동향분석과 글로벌 통상전략 수립을 주도해온 무역 전문가다. 현재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으로서 수출경쟁력 강화, 산업별 공급망 안보, 신통상질서 대응 등 급변하는 대외 환경 속에서 우리 기업이 나아갈 이정표를 제시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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