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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 공화국>
● 제8차, 10.26사태 이후 신군부 개헌(1980. 10.27.)
12·12 사태로 군과 정보기관을 장악한 전두환 소장 등 신군부 세력은 1980년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김대중, 김영삼 등 야당지도자를 체포 구금시켰다. 이들은 헌법 어디에도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언론통폐합 및 언론인 해직, 공직자 숙청 등의 조치를 단행했다. 국보위는 사실상 헌법기관인 대통령과 국무회의를 대신하는 역할을 했다. 이렇게 국헌이 무너지는 가운데 군부독재에 반대해 궐기한 광주의 시민들은 총칼과 몽둥이에 처참하게 짓밟혔다.
신군부 세력은 정권탈취의 마지막 수순으로 개헌작업에 들어갔다. 권력형태는 대통령중심제로 하되 임기는 7년 단임으로 했다. 단임조항을 개정해도 당시의 대통령에게는 효력이 없도록 명시했다. 쿠데타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을 무마하고 전임 박대통령의 장기집권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의식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유신헌법과 마찬가지로 직선이 아닌 선거인단에 의한 간선을 유지했다.
개헌작업은 5·16쿠데타 당시와 마찬가지로 계엄이 선포돼 일체의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언론의 자유가 봉쇄된 가운데 진행됐다. 모든 절차가 신군부의 일방통행식 결정으로 진행됐다. 이 개헌안은 10월22일 국민투표에서 유권자 95.48%의 투표와 91.6%의 찬성으로 확정됐고 27일 공포됐다. 새 헌법에 따라 이듬해 2월25일 선거인단 선거에서 전씨가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또다시 군부에 의해 헌정이 유린된 순간이었다. 8차 개헌은 외부적으로 단임제를 통한 평화적 정권교체를 표방했지만 그 속내는 군부의 장기집권 체제를 만드는 것이었다. 5공화국 내내 국민들은 정권의 비민주성에 맞서 강력한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헌정이 이렇게 유린되던 순간 조선, 동아일보 등은 전 대통령에 대한 낮뜨거운 용비어천가를 앞다투어 헌정(獻呈)하고 개헌을 옹호하는 나팔수를 자임했다. 조선일보는 개헌에 대한 국민투표가 실시되던 22일자 사설에서 <오늘, 국민투표의 날 / 정치발전 첫걸음에 적극 참여하자>고 독려하고 <새 정치계절이 열렸다> <‘안정’ 염원 / 지역차 없는 새 헌정 신임 / 민주복지 추진에 자신감>(10.24.자)이라고 추켜세웠다.
동아일보는 <압도적 지지로 끝난 국민투표 분석 / 지역기복없이 고른 투표율·찬성률 / 정치현실에 바탕…국민합의 이끌어>(10.23.자)라고 보도하고 한술 더떠 서정주 시인의 기고 <새 헌법 확정을 보고 /민족의 역사를 멀리 내다보자>라는 글까지 게재했다.
■<제 6 공화국>
● 제9차, 현행 헌법(1987. 10.29.)
1985년 2월 총선에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공약으로 내세운 신민당은 일대 돌풍을 일으킨다. 선거인단 간선제가 5공화국 내내 국민들로부터 얼마나 큰 불신과 저항을 불러일으켰는가를 반증하는 사건이었다.
12대 국회가 열리자 이민우 당시 신민당 총재는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며 국회에 헌법개정특별위원회 설치를 요구했다. 전 대통령은 1986년 신년연설에서 89년에 개헌논의를 하자고 답했지만 야당은 직선제의 연내 개헌을 위한 서명운동을 벌였다. 정부는 신민당사 봉쇄와 서명부 압수 등으로 개헌 추진 노력을 탄압했다. 이후 전 대통령과 야당 지도자들 사이에 몇 차례 절충 노력이 있었으나 무위에 그쳤다.
1987년 1월14일 서울대생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 터지면서 개헌 정국은 대규모 반독재 투쟁 시위로 번져갔다. 반면 김영삼, 김대중 두 야당 지도자는 당권과 노선문제로 갈등하다 각기 신당을 창당함으로써 신민당은 분당되고 말았다.
전 대통령은 4월13일 이른바 ‘4·13 호헌조치’를 통해 개헌 합의의 실패 책임을 양김에게 돌리는 한편, 개헌논의를 1988년 올림픽 이후로 미루고 13대 대통령은 5공화국 헌법에 따라 선출하겠다고 발표했다. 4·13 호헌조치 이후 직선제 개헌을 향한 민심은 거대한 항쟁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범야권이 중심이 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되고 연일 ‘독재타도, 호헌철폐’의 구호가 전국의 도심을 뒤흔들었다. 6월9일 연세대생 이한열군이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자 전국적으로 수백만명의 시민, 학생이 6·10 항쟁의 물결에 동참했다.
결국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노태우 후보는 민의의 강력한 요구에 밀려 ‘6·29 선언’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개헌 작업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여야는 합의를 통해 대통령 직선제와 5년 단임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안을 마련하고 10월12일 국회의결, 10월27일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했다.
9차 개헌이 그 어느 때보다 민의를 충실히 반영하고 민주주의적 절차를 제대로 밟았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개헌 사상 가장 긴 수명을 유지하며 20년 가까이 우리 헌정의 기틀이 됐던 것도 그런 까닭이다.
그러나 여야 정치권의 주도하에 이뤄진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란 점, 장기적인 국가비전을 예상하고 반영하지 못했다는 점은 한계로 지적받고 있다. 이제 20년이 지난 지금 절차적 민주주의가 완성되고 장기집권의 가능성이 사라진 상황에서, 그리고 소득 2만달러를 넘어 선진국으로 진입해가는 시점에서 9차 개헌은 새로운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 노무현 대통령의 ‘원 포인트’ 개헌 제안
노 대통령의 ‘원 포인트’ 개헌 제안은 경제, 사회, 문화의 발전에 걸맞게 정치문화도 업그레이드 돼야 한다는 절박성을 담고 있다. 정치에 발목이 잡혀 국가발전이 지체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자는 것이다.
독재와 장기집권을 넘어 6월 항쟁을 거치면서 절차적 민주주의는 완성됐다. 그러나 대화와 타협, 책임정치라는 내용적 민주주의는 여전히 요원한 문제로 남아있다. 9차 개헌이 이뤄진지 20년을 맞는 시점에서 ‘원 포인트’ 개헌은 지나온 20년을 갈무리하고 도래할 20년 국가발전의 기틀을 짜는 역사(役事)다.
대통령의 개헌 제안 직후 ‘사우스 차이나 모닝포스트’는 10일자 <한국에서 빛나는 민주주의 봉화> 사설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진보와 성취, 그리고 개헌 제안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격변하는 정치기류에 분노하기보다 성취된 것에 대해 자긍심을 가져야 한다. 한국인들은 어쨌거나 동아시아에서 독재, 절대권력, 그리고 ‘민주주의적이라고 주장하는 결함 있는 정치제도’와 씨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몇 안 되는 길잡이 불빛의 하나가 되고 있다…한국 민주주의의 활기를 입증하는 증거가 5년 단임제로 선출된 대통령이 보다 짧은 임기의 대통령으로 재선될 수 있도록 허용하기 위해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노무현대통령의 9일 제안과 함께 나타났다…노대통령은 국가이익을 위해 행동하고 있다. 그는 재선가능성을 염두에 둔 대통령은 국정을 더 잘 운영할 수 있을 것이며 한편 유권자들은 지도자의 실적을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 제8차, 10.26사태 이후 신군부 개헌(1980. 10.27.)
12·12 사태로 군과 정보기관을 장악한 전두환 소장 등 신군부 세력은 1980년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김대중, 김영삼 등 야당지도자를 체포 구금시켰다. 이들은 헌법 어디에도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언론통폐합 및 언론인 해직, 공직자 숙청 등의 조치를 단행했다. 국보위는 사실상 헌법기관인 대통령과 국무회의를 대신하는 역할을 했다. 이렇게 국헌이 무너지는 가운데 군부독재에 반대해 궐기한 광주의 시민들은 총칼과 몽둥이에 처참하게 짓밟혔다.
신군부 세력은 정권탈취의 마지막 수순으로 개헌작업에 들어갔다. 권력형태는 대통령중심제로 하되 임기는 7년 단임으로 했다. 단임조항을 개정해도 당시의 대통령에게는 효력이 없도록 명시했다. 쿠데타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을 무마하고 전임 박대통령의 장기집권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의식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유신헌법과 마찬가지로 직선이 아닌 선거인단에 의한 간선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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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군부에 의해 헌정이 유린된 순간이었다. 8차 개헌은 외부적으로 단임제를 통한 평화적 정권교체를 표방했지만 그 속내는 군부의 장기집권 체제를 만드는 것이었다. 5공화국 내내 국민들은 정권의 비민주성에 맞서 강력한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헌정이 이렇게 유린되던 순간 조선, 동아일보 등은 전 대통령에 대한 낮뜨거운 용비어천가를 앞다투어 헌정(獻呈)하고 개헌을 옹호하는 나팔수를 자임했다. 조선일보는 개헌에 대한 국민투표가 실시되던 22일자 사설에서 <오늘, 국민투표의 날 / 정치발전 첫걸음에 적극 참여하자>고 독려하고 <새 정치계절이 열렸다> <‘안정’ 염원 / 지역차 없는 새 헌정 신임 / 민주복지 추진에 자신감>(10.24.자)이라고 추켜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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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는 <압도적 지지로 끝난 국민투표 분석 / 지역기복없이 고른 투표율·찬성률 / 정치현실에 바탕…국민합의 이끌어>(10.23.자)라고 보도하고 한술 더떠 서정주 시인의 기고 <새 헌법 확정을 보고 /민족의 역사를 멀리 내다보자>라는 글까지 게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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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공화국>
● 제9차, 현행 헌법(1987. 10.29.)
1985년 2월 총선에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공약으로 내세운 신민당은 일대 돌풍을 일으킨다. 선거인단 간선제가 5공화국 내내 국민들로부터 얼마나 큰 불신과 저항을 불러일으켰는가를 반증하는 사건이었다.
12대 국회가 열리자 이민우 당시 신민당 총재는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며 국회에 헌법개정특별위원회 설치를 요구했다. 전 대통령은 1986년 신년연설에서 89년에 개헌논의를 하자고 답했지만 야당은 직선제의 연내 개헌을 위한 서명운동을 벌였다. 정부는 신민당사 봉쇄와 서명부 압수 등으로 개헌 추진 노력을 탄압했다. 이후 전 대통령과 야당 지도자들 사이에 몇 차례 절충 노력이 있었으나 무위에 그쳤다.
1987년 1월14일 서울대생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 터지면서 개헌 정국은 대규모 반독재 투쟁 시위로 번져갔다. 반면 김영삼, 김대중 두 야당 지도자는 당권과 노선문제로 갈등하다 각기 신당을 창당함으로써 신민당은 분당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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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대통령은 4월13일 이른바 ‘4·13 호헌조치’를 통해 개헌 합의의 실패 책임을 양김에게 돌리는 한편, 개헌논의를 1988년 올림픽 이후로 미루고 13대 대통령은 5공화국 헌법에 따라 선출하겠다고 발표했다. 4·13 호헌조치 이후 직선제 개헌을 향한 민심은 거대한 항쟁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범야권이 중심이 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되고 연일 ‘독재타도, 호헌철폐’의 구호가 전국의 도심을 뒤흔들었다. 6월9일 연세대생 이한열군이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자 전국적으로 수백만명의 시민, 학생이 6·10 항쟁의 물결에 동참했다.
결국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노태우 후보는 민의의 강력한 요구에 밀려 ‘6·29 선언’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개헌 작업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여야는 합의를 통해 대통령 직선제와 5년 단임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안을 마련하고 10월12일 국회의결, 10월27일 국민투표를 거쳐 확정했다.
9차 개헌이 그 어느 때보다 민의를 충실히 반영하고 민주주의적 절차를 제대로 밟았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개헌 사상 가장 긴 수명을 유지하며 20년 가까이 우리 헌정의 기틀이 됐던 것도 그런 까닭이다.
그러나 여야 정치권의 주도하에 이뤄진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란 점, 장기적인 국가비전을 예상하고 반영하지 못했다는 점은 한계로 지적받고 있다. 이제 20년이 지난 지금 절차적 민주주의가 완성되고 장기집권의 가능성이 사라진 상황에서, 그리고 소득 2만달러를 넘어 선진국으로 진입해가는 시점에서 9차 개헌은 새로운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 노무현 대통령의 ‘원 포인트’ 개헌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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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와 장기집권을 넘어 6월 항쟁을 거치면서 절차적 민주주의는 완성됐다. 그러나 대화와 타협, 책임정치라는 내용적 민주주의는 여전히 요원한 문제로 남아있다. 9차 개헌이 이뤄진지 20년을 맞는 시점에서 ‘원 포인트’ 개헌은 지나온 20년을 갈무리하고 도래할 20년 국가발전의 기틀을 짜는 역사(役事)다.
대통령의 개헌 제안 직후 ‘사우스 차이나 모닝포스트’는 10일자 <한국에서 빛나는 민주주의 봉화> 사설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진보와 성취, 그리고 개헌 제안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격변하는 정치기류에 분노하기보다 성취된 것에 대해 자긍심을 가져야 한다. 한국인들은 어쨌거나 동아시아에서 독재, 절대권력, 그리고 ‘민주주의적이라고 주장하는 결함 있는 정치제도’와 씨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몇 안 되는 길잡이 불빛의 하나가 되고 있다…한국 민주주의의 활기를 입증하는 증거가 5년 단임제로 선출된 대통령이 보다 짧은 임기의 대통령으로 재선될 수 있도록 허용하기 위해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노무현대통령의 9일 제안과 함께 나타났다…노대통령은 국가이익을 위해 행동하고 있다. 그는 재선가능성을 염두에 둔 대통령은 국정을 더 잘 운영할 수 있을 것이며 한편 유권자들은 지도자의 실적을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정책브리핑 공공누리 담당자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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