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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부동산정책 40년

“정부가 바로 이런 일을 해야 하는 겁니다”

임대주택의 역사 ① - 주거복지와 예산부족의 딜레마

[실록 부동산정책 40년 (21)]

2007.04.11 특별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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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브리핑이 주택도시연구원·국토연구원·금융연구원과 공동 기획한 <실록 부동산정책 40년>은 지금까지 연재된 1~3부에서 지난 40년 간의 부동산정책 역사를 되짚어보면서 항구적인 부동산시장 안정을 위한 교훈과 정책적 시사점을 얻고자 했습니다.
마지막 4부 '발상의 전환, 주거복지정책'에서는 역대 정부가 재정 부족 등을 이유로 전향적으로 추진하지 못했던 임대주택정책 등 주거복지정책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향후 과제를 살펴 볼 것입니다. <편집자>

총론
제1부 왜 올랐나
제2부 어떤 정책 폈고, 왜 못잡았나
1.<투명성과 형평성 제고 정책>
2.<안정적 주택공급 정책>
3.<가수요억제와 실수요 전환 정책>
제3부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
<첨부 : 참여정부 부동산 정책 평가 전문가 설문조사>
제4부 ‘발상의 전환’ 주거복지 정책
① 전·월세보호대책의 과거와 현재
② 임대주택의 역사1 - 주거복지와 예산부족의 딜레마
③ 임대주택의 역사2 - 주거복지 실현을 향한 노력


“앞으로의 주택정책은 지금까지의 1가구 1주택 소유의 의식구조를 1가구 1주택 거주 개념으로 전환해나가는 방향으로 시책을 해나가고자 합니다. 주택구입능력이 없는 저소득층에 대해서는 임대주택을, 중산층을 위해선 분양주택을 건설·공급해나가고자 합니다.”
1982년 2월 26일 국회 임시회의에 출석한 유창순 당시 국무총리의 말이다.

임대주택의 필요성은 두 말하면 잔소리다. 어느 나라에나 집 없는 저소득층이 있기 마련이고 국가는 이들의 주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싼 값에 안심하고 거주할 수 있는 임대주택의 확보야말로 현대 복지국가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인 것이다. 아쉽게도 우리나라의 임대주택 정책은 관심부족, 재정 부족 등으로 그다지 활기있게 진행되지 못했다.

주택공급을 민간자본에 의존했던 역대 정부는 자본회수가 느린 임대주택 역시 민간자본에 기대려고 했다. 그래서 임대주택 역시 주택경기의 부침에 영향을 받았다.

정부는 임대주택 건설을 촉진하기 위해 민간 건설사에 각종 유인책을 제공했다. 그러나 민간은 자본 회수가 느린 임대주택 사업에 큰 매력을 느끼지 않았다. 설사 임대주택을 건설하더라도 민간은 짧은 시간만 임대한 뒤 분양해버리는 명목상의 임대주택을 건설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제대로 된 임대주택의 역할을 해내지 못했던 것이다.

정부는 1980년대 후반 국가재정을 들여 50년 이상 임대하는 영구임대 주택을 건설했지만 재정문제로 확대되지 못했다. 재정 투입을 통해 장기 임대주택이 활성화되기 시작한 것은 IMF 외환위기 이후 국민의 정부 때였다.

개봉동 '난장이의 집' 임대아파트

우리나라에 처음 등장한 임대주택은 주택공사가 1971년 서울 개봉동에 지은 13평짜리 아파트 300채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임대를 목적으로 지은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정부의 주택정책은 분양주택 공급이 전부였다. 주공이 3억원을 들여 건설한 개봉동 아파트도 원래는 분양주택용이었다. 그러나 1971년 후반 불어닥친 부동산 경기 불황으로 주공이 건설한 한강시영아파트나 광명아파트처럼 개봉동 아파트 역시 분양실적이 부진했다.

당시 서울 지역의 무주택자는 48%에 달했지만 집이 팔리지 않았던 것은 가격이 비쌌기 때문. 불경기에 분양가 135만원을 부담할 사람은 없었다. 이같은 문제점은 70년대 말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렇게 주택이 팔리지 않아 자금 회수가 안되자 정부는 1972년 4월 개봉동 주공아파트를 임대하기로 결정했다. 조건은 보증금 10만원에 월세는 층별로 6100~6800원이었다. 당시 언론은 이를 두고 ‘고육의 전환’이라고 평가했다.(조선일보 1972년 4월 26일자)

개봉동 생긴 이래 최대 인파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알려진 서울 개봉동 주공아파트의 분양현장을 다룬 1972년 5월 10일자 조선일보.
그러자 반년 가량 빈집인 채로 방치됐던 이 아파트에 입주 희망자들이 넘쳐났다. 분양 당일(5월 9일) 추첨 현장인 개봉동 주공아파트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13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당시 조선일보는 다음과 같이 상황을 전했다.

“광화문에서 택시로 약 30분. 큰 길가에 ‘어서 오십시오. 여기서부터 시흥군입니다’라는 팻말이 스산해뵈는 허허벌판. 여기에 5~6동의 아파트가 덩그라니 서 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도하는 임대주택인 것이다. 9일 아침 8시부터 집주인인 주택공사조차 깜짝 놀랄만한 인파가 이 아파트 광장과 주변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300가구 아파트 가운데 250가구에 대한 입주자를 추첨 선정하는 이날은 개봉동이 생긴 이래 아마 처음일만큼 붐볐다.
총 신청자 3339명. 뺑뺑이 돌리기 추첨기의 알맹이를 3000개밖에 준비 못한 주공 담당이사는 현장에 몰려든 군중을 돌아보고는 ‘큰일났다’고 비명같은 환성을 질렀다. 당첨번호가 호명될 때마다 어느 구석에선가 ‘와’하는 환호가 들리는 듯 하나 수 천명의 웅성거림 속에서 250명의 목소리는 금방 삼켜져버린다.”(1972년 5월 10일자)

전세아파트를 월세로 돌려라

대성공에 힘입어 건설부는 임대주택제도를 확대하기로 하고 분양하지 못한 주택을 대상으로 전세 아파트제를 실험해보기로 했다. 아무래도 월세보다는 전세제도가 자금 회수가 빠르기 때문이다. 대상은 한강시영아파트 22평형 48가구. 당초 748가구를 지어 그동안 340만원에 분양해왔으나 250가구가 분양되지 않은 상태였다. 임대용 48가구의 전세금은 분양금의 절반 이하인 150만원이었다.

그러나 135만원에 집을 사는 것도 주저하는 마당에 그보다 더 비싼 전세금을 낼 사람은 많지 않았고 임대 신청창구는 한산했다. 결국 정부는 월세형 임대아파트에 주력하기로 결정했다. 같은해 11월에 추가공급한 개봉동 임대아파트 160가구에는 951명이 몰려 6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임대아파트에도 투기꾼 북적

1970년대 임대아파트는 임대기간이 1~2년 내외로 짧았던 까닭에 투기대상이 됐다. 임대아파트에 대한 원정투기꾼을 다룬 1979년 5월 15일자 조선일보.
이후 정부는 임대아파트를 지속적으로 공급했지만 공급량은 많지 않았다. 정부 재정의 한계 때문이었다. 1973년 정부의 일반회계예산 중 주택건설 투입분은 191억4000만원으로 전체의 3%에도 미치지 못했다. 주택보급률이 훨씬 높은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도 5~10%의 예산을 투입하는 것에 비하면 무척 낮은 수준이었다. 임대주택 건설재원은 훨씬 적었다. 1971~1980년까지 임대주택 건설에 정부가 투자한 돈은 828여억원에 불과했다.

정부는 주공을 통해 1980년까지 임대주택 6만4947호를 건설했다. 그러나 공급량이 적었을 뿐 아니라 임대기간도 짧았다. 당시 주공은 건설재원 확보를 위해 1~2년 정도만 임대하고 분양하는 방법을 취했기 때문에 주거안정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고 투기를 유발하기도 했다.

1979년 5월 광주경찰서는 서울에서 내려와 공무원을 매수, 무주택 증명서를 사들여 서민용 임대아파트를 무더기로 분양받으려 했던 원정투기꾼을 붙잡았다. 이들이 임대아파트를 노린 것은 임대권만 따내면 비싼 값에 다시 임대를 할 수 있고, 임대기간이 끝난 뒤에는 싸게 분양받아 프리미엄을 받고 팔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붙잡혔던 한 투기꾼은 “서울에서는 몇억원씩 투자했어도 말썽이 없었는데 시골이라서 까다롭게 군다”며 어이없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이밖에 분양전환 때 분양가를 둘러싸고 입주자와 주공간 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1970년대의 임대주택은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한 셈이다.

경기부양에 임대주택도 '동참'

1978년 8·8조치로 차갑게 식은 주택경기를 되살리기 위해 정부는 1982년 1월 14일 경기대책을 발표했다. 여기에 임대주택 건설사업을 육성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정부의 임대주택 건설량은 수요에 비하면 극히 적기 때문에 민간업자들도 임대주택을 많이 짓도록 유도하겠다는 것이었다. 장기임대주택의 등장이었다.

1981년 주공의 조사에 따르면 앞으로 매년 12만~15만 가구씩 2001년까지 모두 314만4000가구분의 임대용 주택을 지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1980년 당시 19조원이 필요했다. 이는 1980년 정부의 일반회계 예산이 6조4860여억원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규모였다. 도저히 정부의 힘만으로는 필요한 임대주택을 건설하기 힘들었다. 결국 정부는 민간자본을 임대주택 사업으로 유인하기 위해 세제 및 금융지원방안을 마련했다. 자금회전이 느린 임대주택의 특성상 건설비가 큰 부담이 되기 때문에 이를 상쇄할 유인책을 쓴 것이다.

건설부는 1982년 임대주택을 건설하는 민간업자에게 국민주택기금을 연리 10%로 융자하고 택지의 양도세와 취득·등록세를 면제하는 한편 재산세의 50%를 감면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사업은 지지부진했다. 이에 정부는 1983년 3월 19일 주택건설종합계획을 확정해 민간에게 임대주택건설자금을 연리 5%로 낮춰 빌려주기로 했다. 대신 단기임대로 인한 투기를 막기 위해 임대기간을 5년으로 늘리는 조치를 취했다. 이어 투기를 막기 위해 도입한 채권입찰제로 거둬들인 돈을 모두 임대주택건설에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1984년에도 민간 건설업자 유인 정책은 이어졌다. 민간업체에 대한 국민주택자금 이자율을 3%로 낮추고 토개공이 조성한 택지를 조성원가로 공급하기로 했다. 또 임대주택 건설촉진법을 제정해 민간 건설업체의 임대주택 건설 지원을 명문화했다. 한편 5년 임대 후 분양하는 방식의 임대주택 역시 투기대상이 된다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같은해 20년짜리 장기임대주택을 공급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예산 없이 벌인 장기임대주택 사업

그러나 늘 예산부족이 발목을 잡았다. 게다가 5공화국은 물가안정이 정치적·정책적 지상 과제였다. 이는 임대주택 사업에도 영향을 미쳤다. 정부가 임대주택 건설에 내놓은 예산은 이전 정부 때보다 적은 708억원에 지나지 않았다.

제5공화국은 임대기간 20년짜리 장기임대주택을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지만 예산 부족으로 이듬해 포기하고 만다. 20년짜리 장기임대주택 건설계획을 전하는 1984년 5월 15일자 조선일보.
정부는 1983년 채권입찰제를 도입할 때 ‘채권을 판 돈은 국민주택기금과는 별도로 전액 임대주택을 짓는데 사용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듬해 예산동결이라는 대전제 아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5년짜리 장기임대주택과 함께 공급하기로 했던 20년짜리 장기임대주택 공급도 예산문제로 흐지부지됐다.

1984년 정부 예산을 들여 20년짜리 장기임대주택을 건설하기로 하고 시범지구격인 광명 철산지구와 안양 석수지구에 총 1000호를 건설했다. 보증금 200~300만원, 임대료 매달 3만2000~4만8000원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재정문제로 20년 장기임대주택 건설은 중단된다.

사실상 장기임대주택 사업 중단

공약에서 매년 20년짜리 장기임대주택을 2만호씩 짓기로 약속했던 여당과 달리 건설부는 1985년 3월 사업 축소를 발표했다. 총 2만1000호의 임대주택을 짓되 이 중 4000호만 20년짜리로 짓기로 한 것.
또 건설부는 별도의 예산이 확보되지 않는 한 앞으로도 계속 5년짜리를 짓겠다며 사실상 사업중단을 선언했다. 2만1000호를 모두 20년짜리로 지을 경우 건설자금이 20년동안 묶여 6년째부터 자금이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정부의 지원이 끊기자 사업주체였던 주공도 20년짜리 장기임대주택건설을 중단하고 만다. 2년간 건설된 20년짜리 장기임대주택은 총 5000호에 불과했다. 그나마 입주자의 지속적인 분양요구로 5년도 안돼 분양으로 전환되고 말았다.

한정된 예산을 가지고 임대주택 건설 확충과 이를 통한 주택경기 활성화라는 목표를 갖고 있었던 정부는 이후에도 민간건설 촉진을 위한 유인책을 내놓았다. 그러나 그다지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1982~87년까지 공급된 임대주택은 총 12만9637호였는데 민간부문이 건설한 임대주택은 6만413호로, 전체의 50%에도 미치지 못했다. 애초 세웠던 민간부문 건설 70%라는 목표에 크게 미달하는 수치다.

그렇다고 정부가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것도 아니다. 빠른 시간 내에 많은 집을 짓기 위해 정부는 자금회수가 빠른 분양주택 건설에 치중했다.

그나마 임대주택 마저 중산층용으로 둔갑

이 시기 건설된 장기임대주택은 1970년대의 임대주택에 비해 진일보한 측면이 있었다. 임대기간을 1년에서 5년 혹은 20년으로 늘렸기 때문이다. 다만 20년짜리는 5000호밖에 건설되지 않았고, 공급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5년짜리는 투기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저소득층을 위한 임대주택도 아니었다. 당시 입주대상자는 청약저축 가입자였다. 즉 청약저축에 가입할 정도의 ‘경제력’을 가진 이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극빈층을 배려하지 못한 임대주택정책이 십여 년간 지속되는 상황에서 1980년대 후반 집값과 전세값이 급등하자 이를 감당할 수 없었던 저소득층의 주거환경은 점점 열악해졌다.

6공화국 "영구임대주택 25만호"

제6공화국은 저소득층의 주거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영구임대주택 25만호 건설을 추진했다. 첫 입주가 시작된 서울 번동의 영구임대주택단지를 보도한 1990년 11월 6일자 중앙일보.
6공화국이 출범한 1988년은 정부가 체제 위협을 느낄 정도로 주택문제가 심각한 해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주택 200만호 건설계획을 내걸었는데, 여기에 영구임대주택 25만호 건설계획이 포함됐다. 영구임대주택 건설계획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내용이었다. 5년 동안 빌려주고 분양하는 것이 아니라 영구적으로 임대, 안정적인 주거를 보장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선 대규모의 재정지원이 필요했다. 정부는 영구임대주택 건설비의 85%를 재정에서 지원하기로 했다. 이전 정부들은 임대주택 건설에 적극적으로 재원을 투자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수 조원의 돈을 쏟아붓기로 했으니 당시로선 놀랄만한 일이었다.

예산이 넉넉하지 않았던 것은 과거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체제안정’이라는 시급한 정치적 목표 때문에 청와대와 건설부는 경제기획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업을 강행했다. 이 시기 임대주택 건설에 투자된 정부재정은 총 3조2177억여원으로 역대 정부 최대였다.

사업은 문희갑 청와대 경제수석의 지휘 하에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건설부는 생활보호대상자 등 극빈층이 25만여 명이라는 보건사회부의 통계에 따라 목표량을 25만호로 잡았다. 영구임대주택 건설계획은 1989년 3월 30일 서울 도봉구 번동 영구임대주택 기공식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한다.

한 달 3만5000원도 부담스럽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 영구임대주택 보증금은 170만원, 임대료는 월 3만5000원으로 생활보호대상자 등 극빈층에게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 1989년 말 건설부가 6대도시 영세민 407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조사대상자의 30.8%가 영구임대주택에 입주하지 않겠다고 밝혔는데, 주거비 부담이 59.4%로 가장 큰 이유였다.

한 푼의 교통비도 아까운 영세민의 일터와 동떨어진 곳에 건설되는 것도 문제였다. 이런 까닭에 1990년 3월 서울 노원구 중계동 영구임대주택 시범단지의 경우 입주 예정자의 13.2%인 745명이 임대보증금, 임대료, 관리비 부담 등을 이유로 입주를 포기했다.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것이 문제였지만 상황은 다른 쪽으로 전개됐다. 영구임대주택 내 빈집이 생기자 생보자 등 극빈층의 주거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됐다고 보는 의견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재경부, 사업축소 관철

당시 건설부 주택국장이었던 이동성 씨의 말이다.
“사업 계획 수립 단계부터 경제기획원은 재정지원을 안 하려고 했다. 경제기획원 예산실 입장에서는 갑자기 몇 조의 돈을 주택에 쏟아붓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경제기획원 예산심의관이 청와대 문희갑 경제수석에게 야단을 맞기도 했다. 문희갑 수석이 밀어부쳐 재정지원 계획을 수립하긴 했지만 예산을 맞추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빈집이 나오고, 생보자 수가 19만명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니까 거부할 여지가 생긴 것이다.”

건설부는 영구임대주택 공급을 확대할 계획이었다. 1991년 5월 건설부는 입주자격을 확대, 제7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계획(1992~96년)에도 영구임대주택 공급 계획이 포함됐다. 1988년 이후 주택공급량이 늘고 있지만 △아직도 전체 가구의 25%, 특히 도시 지역에서는 27.8%가 단칸방에 살고 있으며 △전·월세값의 상승으로 저소득층의 주거 상태가 악화됐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기싸움’은 결국 경제기획원의 승리로 끝났고, 영구임대주택 사업은 목표했던 25만호에서 대폭 축소된 19만호 선에서 마무리된다.

한때 50년 공공임대주택도 건설

건설부는 대안으로 50년 공공임대주택을 들고 나왔다. 다만 정부의 재정지원비율은 영구임대주택(85%)보다 줄어든 50%였다. 대상은 영구임대주택 대상자보다 약간 소득이 높은 청약저축 가입자였다. 보증금은 지역에 따라 600만~800만원, 월 임대료는 6만~8만원 수준으로 정해졌다.

1993년 들어선 문민정부는 민간 중심의 임대주택 건설을 추진했다. 1993년 4월 12일자 조선일보는 이런 내용을 담은 주택건설종합계획을 자세히 보도했다.
50년 공공임대주택 사업은 ‘탈규제’와 ‘민영화’를 지상 명제로 삼은 문민정부가 들어선 뒤 우여곡절을 겪는다.
1994년 정부 지원이 중단되자 사업주체였던 주공은 재정지원분까지 국민주택기금에 의존하게 된다. 그러나 이자 등 부담이 가중되면서 이듬해 10월 주공도 사업을 접는다. 이 시기 지어진 50년 공공임대주택은 총 3만9000여 호에 불과했다. 이후 50년 공공임대주택은 서울시가 재개발 지역내 세입자용으로 건설하면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50년짜리 임대주택 사업을 포기하면서 주공은 5년짜리 공공임대주택 사업에 치중하겠다고 밝혔다. 5년짜리 임대주택은 1982년 당시 건설부가 경기부양을 위해 임대주택 건설사업을 장려할 때 등장했던 것으로, 우리나라 임대주택의 대들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업은 주공과 지자체, 민간업자 등이 정부의 재정 지원 대신 국민주택기금을 융자받아 이뤄졌다.

1982년~2005년까지 건설된 5년짜리 임대주택은 약 99만여 호로, 이 시기에 건설된 전체 임대주택(국민임대주택 제외, 119만7200여호)의 약 83%를 차지했다. 이는 임대기간이 짧을수록 자금 회수가 빠른 이점이 작용했다.

다시 민간 건설업자에게 돌아간 임대주택

문민정부는 재정 투입 대신 민간건설업자 유인이라는 카드를 꺼내들었다.
△투기 발생 △분양가격 논란 등을 이유로 1990년 민간의 임대주택 건설을 억제했던 정부는 1993년 1월 다시 민간 임대주택제도를 도입했다. 임대기간이 끝난 뒤 분양할 때 분양가 논란을 없애기 위해 임대를 시작할 때부터 분양가를 확정하도록 했다.

정부는 이후 민간 임대건설 장려책을 펼쳤다. 건설물량을 늘리기 위해선 수요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1993년 상황은 분양주택에도 미분양주택이 속출할 정도로 주택경기가 좋지 않았다. 건설부의 조사에 따르면 1993년 1월 3만6487호였던 미분양주택은 같은해 12월 7만7483호로 늘어났다. 정부는 미분양 주택을 소화해 민간건설업체의 부담을 덜어주고 임대주택 수요도 늘리기 위해 1994년 11월 임대사업제도를 실시한다.

5가구 이상의 주택을 짓거나 매입해 임대하는 임대사업자에게 양도세와 취득·등록세, 재산세, 종합토지세 등을 감면한다는 게 골자였다. 임대사업제도가 활성화되면 민간건설업체의 임대주택 건설이 늘어나 전월세 시장도 안정시킬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문민정부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민간 건설업자의 임대주택 건설을 장려하는 정책을 내놓았고, 어느 정도 성공을 거뒀다. 이 시기 건설된 임대주택은 6공 때와 비슷한 물량이었고, 이 중 민간의 건설물량이 전체의 75.5%에 달했다.

국민임대주택의 등장

민간의 힘을 빌려 추진된 임대주택 건설 촉진책은 주택경기에 좌지우지된다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주택경기가 바닥을 쳤던 IMF 외환위기 때 집권한 국민의 정부는 기존 체제를 바꿨다. 당시는 IMF외환위기로 저소득층의 주거환경이 날로 악화되고 있을 때였다.

정부는 정부 재정을 대거 투입해 임대주택을 건설하기로 발표했다. 주택건설 경기를 활성화하는 한편 저소득층의 주거불안을 해소한다는 취지였다. 한정된 예산에도 불구하고 정책적 우선순위에 따라 정부가 임대주택에 재정을 투입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두 번째 사례였다.

김대중 대통령의 공약인 국민임대주택 건설은 당초 계획보다 축소된 5만호를 목표로 시작됐다. 1998년 9월 25일자 조선일보.
1997년 12월 2일 김대중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대통령 후보는 서울 여의도 공동선거대책회의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집권 기간 중 영구임대주택 20만호 건설 등의 공약을 밝혔다. 이는 6공 시절의 영구임대주택 이후 중단됐던, 정부 재정을 통한 임대주택 건설정책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998년 9월 건설교통부는 정부 재정으로 무주택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한 ‘국민임대주택’을 짓는다는 계획을 밝혔다.

기존 임대주택보다 진일보

영구임대주택이나 5년짜리 공공임대주택은 무주택 저소득층에게 혜택을 주지 못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영구임대주택은 생보자 등 극빈층을 위한 것이었고 분양을 전제로 한 5년짜리 공공임대주택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이를 위한 것이었다. 그 사이에 낀 무주택 저소득층은 사각지대에 놓여있었다.
정부는 건설비의 30%를 재정지원하는 등 총 80%를 공공부문에서 부담하기로 했다. 입주자의 부담은 낮은 수준으로 결정됐다.

가격이 싸더라도 임대기간이 짧으면 임대주택으로서 큰 역할을 하지 못한다. 이를 감안해 건교부는 국민임대주택의 임대기간을 10년과 20년으로 결정했다. 또 적절한 대상자가 입주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입주자 조건을 명시했다.

10년짜리의 경우 도시근로자 가구당 월평균 소득의 70% 이하 청약저축 가입자, 20년짜리의 경우 월평균 소득이 50% 이하인 저소득층으로 제한됐다. 특히 20년짜리의 경우 청약저축에 가입할 수 없는 저소득층에게도 입주자격을 부여해 기존 임대주택보다 진일보한 모습을 보였다.

5만호 10만호 20만호- 늘어나는 국민임대주택

임대주택 20만호 건설이라는 공약은 갑작스레 닥친 IMF 외환위기로 사업구체화 단계에서 5만호로 줄어들었다. 1998년 시작한 국민임대주택 건설사업은 2500호 수준에서 시작됐다. 그리고 임대사업자 기준을 5채에서 2채로 낮춰 수요를 늘리는 등 민간 부문의 활성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경제가 회복되면서 국민의정부 임대주택 사업은 점차 활기를 띠었다. 2000년 8월 IMF는 한국의 ‘IMF체제 졸업’을 공식 선언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김 대통령은 임대주택 5만호 건설 계획에 더해 2002년까지 5만호 추가건설 계획을 내놓는다.

2001년 8·15경축사에서 국민임대주택 20만호 건설계획을 밝힌 김대중 대통령이 3일 뒤 서울 중랑구 신내동의 한 임대아파트를 방문, 단지내 주민들과 악수하고 있다.

2001년 초반 이후 전세가격이 급등하자 정부의 임대주택 정책은 보다 확대된다.
2001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김 대통령은 2003년까지 기존계획 10만호에 10만호를 더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밝힌다. 정부는 2002년까지 11만 8782호의 국민임대주택을 건설하는 성과를 거뒀다. 2003년 건설량까지 더하면 19만573호로 목표 대비 95.3%를 달성했다.

기획처 '임대주택 50만호만 지어라'

2002년 5월 정권 말기에 접어든 국민의 정부는 ‘주택정책사(史)’에서 ‘주택 200만호 건설사업’에 비견될만한 ‘임대주택 100만호 건설계획’을 발표한다. 2003년부터 10년 동안 임대주택 100만호를 건설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결과적으로 1998~2002년까지 건설한 12만호를 포함 2012년까지 총112만호를 추진하게 된 셈이다.

2001년까지만 하더라도 연간 국민임대주택 건설량은 평균 1만7000호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임대주택 100만호 계획이 등장하게 됐을까. 당시 건교부 주택도시국장이었던 이춘희(현 건교부 차관) 씨의 회고다.

2012년까지 국민임대주택 50만호를 건설하겠다던 정부의 계획은 김대중 대통령의 발언을 계기로 100만호 건설로 대폭 확대됐다. 국민임대주택 100만호 확대를 보도한 5월 17일자 동아일보.
“연간 5만호씩 짓겠다고 했는데 (예산 당국이) 돈을 안 주니까 결국 연간 2만호도 짓지 못했다. 약이 올라서 문제제기를 했다. 그리고 2002년 국민임대주택 100만호 계획을 만들었다. 사실 100만호 계획을 만들었을 때 목표는 50만호였다. 당시 주공의 건설능력이 연간 6만호 정도였기 때문에 50만호가 최대치였던 것이다. 50만호를 얻어내기 위해 100만호를 제시했는데, 기획예산처가 강력히 반대해서 50만호로 줄었다. 이 계획을 2002년 4월 3일 건교부 업무보고 때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김대중 대통령 "100만호 지어라"

그런데 업무보고에서 상황이 달라지게 된다. 김 대통령이 “정부가 바로 이런 일을 해야 하는 겁니다”라며 건교부 보고 중에서 가장 많은 칭찬을 하자 기획예산처가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기획예산처가 반대해서 대통령이 칭찬한 사업을 줄여버린 꼴이 됐기 때문이다. 결국 이 사업은 재검토를 거쳐 100만호 건설계획으로 바뀌었고 5월 16일 세상에 발표됐다.

당시 건설부는 건설량 확대 외에도 소득수준에 따라 입주자 부담률을 달리 적용키로 했다.
기존에는 소득 수준에 따라 임대기간에 차등을 뒀는데, 이를 평형으로 구분해 임대료를 차등부과한다는 내용이었다. 저소득층인 소득 1분위 계층은 기존대로 공급 금액의 10%를 부담하지만, 2분위 계층과 3분위 이상 계층은 부담이 늘어나 각각 25%, 30%를 부담하게 됐다. 나머지는 주공 등 사업주체가 10%, 국민주택기금이 40~50%, 국가 재정이 40~10%를 부담하기로 했다.

이와 함께 2002년 9월 국민임대주택의 임대기간을 기존 10년과 20년에서 30년으로 확대, 통일했다. 더 많이 짓기 위해 정부 재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임대기간을 늘려 서민의 주거안정을 꾀한 것이다.

공약에서 실천으로

일부에서는 이러한 계획을 선거용 선심정책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나 기우였다. 50년 공공임대주택을 공급하겠다던 이전 정부의 약속을 포기한 문민정부와는 달리, 참여정부는 ‘공약(空約)’이 될 수도 있었던 국민의 정부 시절의 약속을 실현해나갔다.


2002년 대통령 선거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부터 5년간 국민임대주택 50만호 건설계획을 제시했다.
집권 뒤인 2003년 5월 ‘주거복지 로드맵’을 발표한데 이어 9월에는 ‘서민중산층 주거안정 지원대책'을 발표했다. 향후 10년간 국민임대주택 100만호를 포함한 장기 공공임대주택 150만호를 건설하겠다는 것이었다. 2006년 말까지 4년간 건설된 국민임대주택은 총 35만6209호로 계획 대비 91.3%를 달성했다.

임대주택 건설은 돈문제와 직결된다. 건설비를 회수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까닭에 장기 임대주택 건설은 민간 뿐 아니라 정부에게도 부담스러운 사업이었다. 그래서 10년 이상의 장기 임대주택 건설사업은 처음에는 기세 좋게 시작됐지만 곧 자금 확보 문제에 직면, 축소되거나 중단되곤 했다.

하지만 임대주택의 역사를 보면 정부의 임대주택 건설이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정치적 의지만 있으면 아무리 예산이 부족해도 재정투자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참여정부는 국민의 정부의 주택정책을 계승·발전시켰다. 4년 내내 지속적인 재정투입을 통해 역대 정부 중 가장 많은 임대주택을 건설하는 성과를 거뒀다. 저소득층의 주거복지를 확충하기 위해서는 재정투자가 불가피하다는 역사적 교훈을 받아들인 셈이다.

이어 참여정부는 2007년 1·31대책에서 공공임대주택 비중을 총 주택량의 20%까지 늘리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내놓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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