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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004.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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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분, 법과 제도

고구려는 왕과 귀족, 평민과 노비로 사회적 신분이 구성된 전형적인 계급사회였다. 개개인의 삶은 계급의 틀에 의해 일정하게 규정되기도 했다. 고구려왕은 계루부라는 특정 부족에서 배출되었고, 점차 왕실은 다른 귀족들과 뚜렷한 차별이 생겼다.

13군 태수 하례도. 고구려는 왕과 귀족, 평민과 노비로 사회적 신분이 구성된 전형적인 계급사회였다.
왕실 가족들은 커다란 특권도 가졌지만, 때로는 권력다툼에 희생되기도 했다. 고구려를 구성한 5부족 가운데 나머지 비류나부, 연나부, 환나부, 관나부 등의 부족장과 지도부는 고구려 체제에 편입되어 관직을 맡게 되면서 점차 고구려 귀족계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귀족들은 세습적으로 그 지위와 재산을 후손에게 넘겨줄 수 있었지만, 전쟁이 나면 직접 전투에 나가 싸워야 하는 책임도 가졌다. 대체로 3세기 말에는 각 부족이 해체되고 권력은 중앙에 집중되었다.

고구려에는 노비가 많기는 했지만, 생산의 주체는 평민들이었다. 이들은 농사를 지으며 국가에 세금을 내고, 노동력을 제공해야 하는 국가의 중추였다. 고구려는 전쟁에서 포로를 잡아 노비로 사용했지만, 유능한 자에게는 그에 걸 맞는 직위를 주고 적극 활용하기도 했다.
또 집단으로 복종해오는 세력에 대해서는 세금을 거둘 뿐, 생활방식 등에 대해서는 일정한 자율권을 부여해주기도 했다. 때로는 이들 집단의 군사력을 활용하기 위해 많은 비용을 지불하면서까지 고구려 세력권 안에 붙잡아 두기도 했다.

705년간의 긴 시기 동안 법과 정치제도에도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다. 373년에는 기존의 관습법과 개별적으로 시행되던 법들을 체계화된 율령으로 정비해 반포하는 등 고구려는 엄격한 법에 의해 다스리는 국가였다. 반역자는 죽이고, 도둑질한 자는 도둑질한 물건의 10배를 갚도록 했다. 고구려 사람들은 길에 떨어진 것도 함부로 줍지 않았으며, 감옥에도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로 국가 기강은 확고했다.

법에 의해 정부 조직과 지방 조직도 정비되었는데, 대체로 고구려 후기에는 전국과 수도를 5개 부(部)로 나누어 다스렸고, 지방행정조직은 대체로 성(城)을 단위로 편성했다. 큰 성에는 5부의 장관인 욕살, 중간급 성에는 처려근지, 작은 성에는 루초 등이 각각 지방관으로 임명되었다.
중앙에는 대대로, 막리지 등 13개의 관등이 있었고, 각 부서별로 해당업무를 관장했다. 5위 이상의 관등을 가진 자들이 모인 귀족회의에서는 중요한 정책이 결정되었다. 이러한 귀족회의는 초기 5부족의 지도자들이 모인 제가회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합의와 토론에 의한 정책 결정은 고구려 정치 문화의 오랜 전통이었다.

• 산업 활동

고구려가 처음 건국한 지역은 농사짓기에 적합한 곳이 아니었다. 초기 고구려는 농사와 함께, 수렵과 방목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가난한 나라였다. 고구려인들은 사냥을 매우 즐겼지만, 수렵이 중요한 산업이 될 수는 없었다. 또 넓은 초원도 갖지 못했기에 대규모로 가축을 기를 수도 없었다.

고구려는 건국초기에는 수렵과 방목으로 생계를 유지했으며 고구려인들은 사냥을 매우 즐겼다.
따라서 군사력을 육성하여 농경민의 나라인 후한(後漢)이나, 아직까지 발전이 더딘 동예와 옥저 등을 습격하여 포로와 식량을 빼앗아 고구려의 부족한 것을 채울 수밖에 없었다. 특히 포로는 유용한 노동력이 되어 고구려 경제를 활성화시켰다. 후한은 고구려가 자국인을 많이 잡아가자, 마침내는 포로 1명당 비단 40필, 어린이는 그 절반을 고구려에게 주고 포로를 돌려 받았다.

하지만 약탈경제가 오래 지속될 수는 없었다. 고구려는 점차 부가 축적되고 영토가 황해를 낀 비옥한 농경지대로까지 확대되자, 농업을 발전시키는데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철제 농기구를 널리 보급하고, 많은 양의 소를 농사에 활용했다. 폭 40cm, 무게 10kg가 넘는 커다란 쇠보습을 단 쟁기를 소가 끌어 경지를 개간하게 되면서 농업생산은 크게 증가했다.

AD 194년 식량이 부족한 봄철에 나라의 식량을 농민에게 대여해주었다가, 수확기에 받는 진대법이 시행되면서 농민들의 생활은 크게 안정되었다. 그러자 주변국에서 많은 수의 농민들이 이주해오기도 했다. 4세기 말 이후 광개토대왕 등의 정복활동에 의해 영토가 더욱 확대되어 농경지가 늘어나게 되자, 고구려는 점차 선진 농업국가로 성장하게 되었다.

농산물의 생산이 늘자, 고구려에는 상업과 도시가 발달하게 되었다. 수도였던 국내성과 평양 등지는 물론 변방에도 거대한 시장이 들어서서 한때 초원지대의 유목민, 화북 지역의 농경민과 교역하는 고구려 서부의 국제시장인 유성(요녕성 조양시)에는 한번에 3만 명의 상인이 왕래할 정도로 번창했다. 황금, 백은 같은 것을 결제 수단으로 널리 사용되었고, 철과 인삼, 비단, 담비가죽, 각종 공예품 등은 중요한 교역 물품이었다. 동남아, 남부 중국, 일본, 중앙아시아, 시베리아까지 확대된 고구려의 대외교역 망을 통해 들어온 물자들은 수레에 실려 잘 닦여진 도로와 다리를 통해 각지로 운반되어 거래되었다.

고구려는 성의 나라라고 할만큼 성곽이 발달했다. 사진은 국내성의 모습.
고구려에는 국내성과 평양 외에도 인구 10만이 넘는 한성, 성 둘레만 16km 가까운 오골성을 비롯해 요동성, 신성, 건안성, 부여성, 책성 같이 인구가 밀집된 도시들이 성장하게 되었다. 특히 고구려 후기의 수도인 평양에는 궁성을 보호하는 내성과 북성, 관청을 보호하는 중성과 함께 일반 시민들의 거주지와 시장을 보호하는 외성을 갖춘 길이 23km의 장안성이 축조되었다. 장안성 외성은 철저한 계획도시였다.
외성 구역을 둘러싼 대동강과 보통강에는 다리가 놓여졌고, 물자 운반을 위해 운하가 건설되었다. 거주지는 1개 지역마다 세로 84m, 가로 120m로 구획되어 있었고, 수레 6대가 지나갈 큰 도로와 2대가 지나갈 작은 도로가 만들어져 있었다.

고구려는 금, 은, 철 등의 생산도 매우 많았다. 특히 고대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인 철이 부족했던 거란과 실위에게 철을 공급해줄 정도로 고구려는 철 생산이 많았다. 철 가공기술도 매우 뛰어나 성능 좋은 많은 무기류가 생산되어 고구려의 국방력을 강화시켰다. 고구려 사람들은 수레바퀴를 만드는 신, 대장장이 신, 불의 신들을 숭배하며 기술자를 우대했었다. 이로 인해 다양한 산업이 발달하였고, 산업의 발달은 곧 문화의 발전으로 이어졌고, 그것은 주변 국가에 대한 강한 구심력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 의식주 생활

고구려의 겨울 날씨는 매우 춥다. 따라서 따뜻한 주거환경은 생활에서 매우 중요했다. 고구려 사람들은 불을 피워서 바닥 돌의 온도를 높여서 열을 내어 실내를 따뜻하게 하는 온돌 난방을 개발하여 일반 주택은 물론 궁궐과 사원, 군사 초소 등에 널리 사용했다.
현대 한국의 주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온돌 난방은 고구려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에서는 온돌로 방 전체를 따뜻하게 하지 아니하고, 방의 일부분에만 온돌을 놓는 부분 난방을 했다. 대신 실내에 평상, 좌상, 의자 등의 가구를 놓고 그 위에 앉아서 생활했다.

고구려 여성들은 색동치마, 점무늬 치마 등 다양한 치마를 입었지만 때로는 편한 바지도 입었다.
활동성이 편한 바지와 저고리는 고구려 남성들의 기본 의상이었다. 치마(裳)를 입는 중국인들과 달리 고구려는 북방 유목민들과 같이 말타기에 유리한 바지를 입었다. 또 윗옷의 여밈도 대체로 좌측으로 여미게 하여 활쏘기를 할 때에 편리하도록 했다. 또한 단추가 없이 허리띠로 옷을 고정시켰는데 이것 역시 활동성을 고려한 것이다. 여성들은 주름치마와 색동치마, 점무늬 치마 등 다양한 치마를 입었지만, 때로는 편한 바지도 입었다. 또 화려한 문양이 장식된 겉옷을 많이 입었다.

고구려 남자들은 대체로 두발을 머리 꼭대기에 모아 방망이처럼 묶은 상투형 머리를 많이 했고, 여기에 모자를 썼다. 여성들은 다양한 머리모양을 했는데, 가발을 사용하기도 했다. 고구려에서는 비단을 비롯한 다양한 옷감을 생산되었고, 염색기술도 발달했기 때문에 복식은 매우 다채롭게 발전했다. 노비들조차 색깔과 무늬가 있는 옷을 입었다. 대체로 남성들은 실용적이고 활동적인 옷을, 여성들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도 편안한 옷을 즐겨 입었다.

고구려인들은 다양한 식생활을 즐겼는데, 조와 쌀, 콩 등이 중요한 곡식이었다. 보리, 밀, 기장, 수수 등은 보조적인 곡식이었으며, 후기로 갈수록 쌀의 소비량이 많아졌다. 식사법은 초기에는 곡식을 가루로 내어 토기에 물을 붓고 가열함으로써 죽으로 먹었으나, 곧 시루에 곡물을 쪄서 먹다가 점차 무쇠 솥에 밥을 해먹었다. 고구려를 대표하는 음식으로는 양념을 한 고기구이 요리인 ‘맥적’이 있다. 현대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인 불고기의 원조가 된다.

고구려 사람들은 ‘맥반’이란 식탁에서 ‘조두’라 불리는 좋은 그릇을 비롯해 여러 개의 그릇에 음식을 담아 놓고 수저와 젓가락을 사용해 식사를 했으며, 고기를 썰기 위한 ‘오자도’라는 작은 칼을 이용하기도 했다. 또한 배추나 아욱, 무 등은 소금에 절여 먹었다. 이 음식에 뒷날 고추가 첨가되는데, 이것이 현대 한국의 대표적 음식인 ‘김치’이다. 고구려는 콩의 원산지답게 콩을 이용한 된장과 간장 등의 장류를 잘 만들어 먹었으며, 술도 잘 빚어 먹었다.

집필: 서길수(고구려연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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