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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대표적인 인물들

2004.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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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분노 : 고구려가 건국 초기에 비류국과 행인국과의 전쟁을 할 때에 큰 공을 세운 장군이다. 그의 업적을 대표하는 것은 BC 9년 강적인 선비족을 굴복시킨 일이다. 그는 먼저 첩자를 보내 선비로 하여금 고구려를 얕잡아보도록 정보를 흘렸다. 그런 후에 유리명왕과 함께 선비의 성(城)을 공격했다. 유리명왕이 이끈 군대가 먼저 정문을 공격하다가 퇴각하자, 선비는 군사를 내어 고구려군을 추격했다. 이때 부분노가 군사를 이끌고 성을 점령했다. 선비는 놀라 다시 성으로 돌아오다가 성 안과 밖의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아 마침내 항복하고 말았다. 그는 용맹과 지혜를 갖춘 고구려 초기 최고의 명장이었다.

• 괴유 : 그는 먼 북쪽 바닷가 출신으로 낮은 신분을 가졌지만 무예에 뛰어났다. 그는 몹시 큰 체구에 얼굴이 희고 광채가 나는 인물이었다. 서기 21년 12월 그는 대무신왕이 부여 정벌에 나서자, 왕에게 나아가 부여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울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다음해 2월 부여군과 전투가 벌어지자, 괴유는 앞장서서 나아가 부여 대소왕의 머리를 베어 버리는 큰 공을 세웠다. 이 전쟁의 결과 부여는 내분에 빠지게 되고 고구려는 더욱 발전할 수 있게 될 수 있었다. 그가 병으로 죽게 되자, 대무신왕이 친히 병문안을 갈 정도로 고구려인의 사랑을 받았다.

• 명립답부 : 165년 연나부 출신의 명림답부는 차대왕이 잘못된 정치를 하여 백성들을 괴롭게 하자, 왕을 시해하고, 새로이 신대왕을 왕위에 옹립하는 혁명을 일으켰다. 신대왕은 그에게 최초로 국상이라는 최고의 관직을 주었다. 172년 후한이 대병을 이끌고 공격해오자, 명립답부는 먼저 성벽을 쌓고 방어에 전념하여 적을 지치게 한 후, 후한의 군대가 철군할 때를 놓치지 않고 수천의 기병을 이끌고 뒤를 쫓아서 좌원 전투에서 적군을 전멸시켜 버렸다. 그는 국정을 안정시키고, 외적의 침략을 물리친 큰 인물이었다.

• 을파소 : 191년 고국천왕은 정치를 바로 잡고자 널리 새로운 인재를 추천하라고 지시를 했다. 이때 많은 사람이 추천한 인물은 안유였다. 하지만 안유는 자신보다 더 뛰어난 을파소를 천거했다. 고국천왕은 그의 말에 따라 한낮 농부에 불과한 을파소를 불러들였다. 왕은 그에게 장관에 해당되는 중외대부를 맡겼으나, 을파소는 이를 거절했다. 왕은 비로소 그의 참 뜻을 알고, 국상을 맡기며 모든 신임을 주었다. 을파소는 왕의 믿음을 바탕으로 여러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치를 바로잡아갔다. 특히 194년에 실시한 진대법은 봄철에 양식이 부족한 농민에게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수확기에 되돌려 받는 제도로 농민 생활안정에 큰 기여를 했다. 그는 고구려 최고의 재상으로 평가되고 있다. 평범한 농민이었던 을파소를 추천한 안유, 그들을 믿고 정치를 맡긴 고국천왕은 인재 선발의 모범 사례였다.

• 밀우, 유옥구, 유유 : 246년 위나라 관구검이 대병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해왔다. 동천왕은 철기병을 앞세워 초반 적군을 물리치는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자만에 빠진 동천왕은 적군가 싸우다가 크게 패배하여 궁궐을 버리고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군사들도 흩어지고, 동천왕은 마땅히 몸을 피신할 곳도 찾지 못하고 있을 때에 밀우와 유유 등이 나타났다. 밀우는 결사대를 이끌고 적군과 싸워 왕이 도망할 시간을 벌어주었다. 왕은 밀우를 생각하고 그를 구해줄 사람을 뽑았다. 유옥구가 자청해 싸움터에서 땅에 쓰러진 그를 구해왔다. 하지만 적은 계속 왕을 추격해왔다. 이때 유유는 적장에게 음식을 가지고 가서 적에게 항복하는 척하다가, 적장을 찔러 죽이고 자신도 죽었다. 적장이 죽자 위나라 군대는 흩어지고 왕은 반격할 기회를 잡아 마침내 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 목숨을 내건 이들의 활약에 고구려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 창조리 : 국상인 창조리는 늘 근심이었다. 가뭄과 지진, 서리 등 이상 기후로 인해 백성들의 삶이 곤궁해짐에도 왕이 궁궐을 증축하는 등 심한 사치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여러 차례 왕에게 간청을 했지만, 봉상왕은 임금이란 위엄을 보여야 한다며 백성들을 노역에 끌어냈다. 그러자 창조리는 여러 신하들과 함께 왕을 폐위시킬 것을 합의했다. 봉상왕의 조카지만, 왕의 미움을 받아 신분을 속이고 나라를 떠돌던 을불을 찾아내어 그를 미천왕이 되도록 했다. 봉상왕은 민심이 떠남을 알고 자살하고 말았다. 창조리는 임금이라도 백성을 괴롭히며 쫓아내야 한다는 의식을 갖고 이를 실천한 인물이었다.

• 평강공주와 온달 : 평강공주는 어린 시절 너무 많이 울어 평원왕이 달래기 위해 너무 울면 커서 바보온달에게 시집보낸다고 놀렸었다. 성인이 된 평강공주는 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몰래 궁궐을 나와서 온달을 찾아가 결혼을 했다. 그리고 온달을 가르쳐서 그를 뛰어난 인재로 변모시켰다. 온달은 나라에서 열린 사냥대회에서 1등을 해서 장군이 되었다. 나아가 북주와의 전쟁, 신라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워 임금의 사위로 인정받았다. 평민인 온달이 공주와 결혼하고, 훌륭한 장군으로 성장했다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뒷날 본래 이야기에서 다소 변질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평민이라도 노력해서 능력을 키울 수만 있다면 임금님의 사위까지도 될 수 있음을 말해주는 온달의 사례는 열려 있는 고구려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 을지문덕 : 을지문덕은 용맹함과 지혜를 고루 갖춘 고구려 최고의 명장이다. 612년 113만 3,800명의 엄청난 대군을 이끌고 수나라 군대가 고구려를 공격해왔다. 수나라 군대는 요동성을 공략하지 못해 진격이 지연되자, 별동대를 보내 고구려 수도를 향해 진격해왔다. 을지문덕은 적의 별동대를 유인하면서, 적이 지치기를 기다렸다. 적군은 식량 보급마저 끊긴 상태에서 강력한 고구려군의 방어벽에 부딪히자, 결국 퇴각을 시작했다. 이때 을지문덕은 총 공격을 명하여 살수에서 적군을 대파시켰다. 수나라 30만 5천명의 별동대 가운데 살아 돌아간 인원은 겨우 2,700명에 불과했다. 을지문덕의 공적으로 인해 고구려는 강대국의 위상을 지킬 수 있었다. 반면 수나라는 이 패배의 결과로 나라까지 멸망하고 말았다.

집필: 서길수(고구려연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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