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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을 찍어 내는 시대, 김치가 있어 행복한 겨울

2007.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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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T_IMAGE]2,original,left[/SET_IMAGE]김장을 하러(정확히는 김치를 얻으러) 고향에 내려갔다. 팔순 노모는 올해도 마을 어른들을 불러 김장을 하셨다. 힘이 드신지 ‘올해까지만 …’이라 하셨다. 그러나 그 소리는 10년도 넘게 계속되고 있다. 배추와 양념값이 올랐지만 올해도 백 여 포기를 담아 자식들에게 다 나눠 주신다. 딸들에게는 네 상자, 아들인 내게는 여섯 상자가 돌아왔다. 어머니의 은밀한 차별에 나는 빙그레 웃었다.

묵직한 김치 상자를 차에 실으며 올해도 고향의, 어머니의 김치를 먹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어머니에게는 죄송했지만 나는 행복했다. 누구나 어머니가 담근 김치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을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오감으로 느꼈던 그 맛, 그 냄새, 그 빛깔. 고향에서 올라오는 김치에는 어김없이 고향이 들어 있었다. 김치에서 우러난 ‘그때 그 맛’은 늘 감동이었다. 김치맛은 마을마다 다른 것이 아니라 집마다 달랐다. 그 옛날에 장맛이 그랬듯이. 올해도 어머니가 살아 있어 그 맛을 보게 됨이 얼마나 다행인가.  

김장은 거의 첫눈이 올 때쯤에 시작된다. 겨울 내내 모든 먹을거리는 김치와 궁합을 맞췄으니 김치는 반(半)식량이었고, 그래서 김장은 겨울 농사인 셈이다. 김장은 여인들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 남정네의 힘이 보태져야 했다. 소금독을 나르고, 구덩이를 파서 김칫독을 묻고, 여인네가 건네주는 갓 버무린 김치 맛을 감별해 줘야 했다. 김치가 맛이 없으면 그해 겨울도 맛이 없었다.

김장하는 날은 절인 배추, 간국물, 김치속, 양념 등이 마당을 가득 채웠다. 회색빛 초겨울 풍경에 울긋불긋 물감을 뿌린 듯했다. 이웃 품앗이 일손이 몰려들어 이른 아침부터 시작한 김장은 어둠이 내려서야 끝이 났다. 정겨운 울력이었다. 그것은 푸른 채소를 붉게 물들이는, 탈 없이 겨울나기를 서로에게 빌어 주는 의식 같은 것이었다. 웃음으로 버무린 김장김치는 얼마나 먹음직스러웠던가. 그날만은 김이 무럭무럭 나는 하얀 쌀밥에 새빨간 김치가닥을 얹어 먹었다. 우리 살아 있는 동안 그 맛을 어찌 잊을 것인가.

김장철이 지난 요즘 방방곡곡에서 정성이 포기마다 꽉꽉 들어찬 김치가 차에 실려 밤낮없이 도시로 올라오고 있을 것이다. 부모의 정은 겨우내 서서히 발효될 것이다. 그 김치들은 끼니마다 새끼들의 밥상에 올라 그들의 겨울을 지켜줄 것이다.

추석 같은 명절에는 자식들이 일제히 선물 꾸러미를 들고 고향을 찾고, 삭풍이 부는 겨울에는 김장 김치나 쌀 등이 고향에서 일제히 서울로 보내지는, 이런 정(情)의 교환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나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 장 담그는 것이 신기한 일이 되어 버렸듯이 김장을 하는 것이 점차 귀한 일이 되어 가고 있다. 왜간장이 장독대에서 간장독을 밀쳐 냈듯이 공장 김치가 밥상에서 `어머니 맛을 밀어내고 있다. 김장을 포기하는 가정이 늘고 있다. 번거로워서… 솜씨가 없어서 … 싸게 먹혀서 김치를 사 먹는다고 한다. 이제 김치는 주요 수입품이 되고 말았다.

어느새 우리는 식단마저 비슷비슷해졌다. 똑같은 맛의 된장과 간장을 사 먹는다. 공장에서 맛을 찍어 내고, 사람들은 그 맛에 길들여졌다. 집마다 고을마다 존재했던 고유한 맛을 잃어버렸다. 맛까지도 획일화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먹거리도 유행을 탄다. 방송에서 토마토가 건강에 좋다면 너나없이 먹어 치워 값이 배로 뛴다. 올리브유가 좋다고 하면 너도나도 수입에 열을 올린다. 몸에 좋다면 우루루 우루루 몰려다닌다.

우리 주변에서 건강에 좋다고 반짝 인기를 끌다가 이내 시들해진 먹거리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음식에 들이는 시간과 공력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깊은 맛은 사라지고 겉절이만 횡행하고 있다. 머잖아 우리 입맛이 표준화되어 기호나 부호로 표기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먹이로 사육되는 동물들이 사철을 지내지 못하고 도륙되는 속도전에서 새록새록 익어 가는 고향의 김치가 곁에 있음이 얼마나 큰 행운인가.

김치 담는 솜씨가 젊고 고운 손으로 전수되지 못하고 노인들의 주름진 손끝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음이 안타깝다. 우리 시대의 어머니들이 세상을 뜨면 더 이상 김치는 고향에서 올라오지 않을 것이다. 그 맛,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어머니 맛도 이 땅에서 사라질 것이다. 전통음식이 소멸하고 맛이 획일화되어 상품으로 진열되는 이 시대에, 아직까지 살아 있는 고향의 맛이 눈물겹다. 고향이 무너지고, 농촌 정서가 흔들리고, 그 속의 어른들이 하나 둘 세상을 뜨고 있다. 그런데도 부모로 자식들에게 남길 고유의 맛 하나 지니지 못함이 부끄럽다.

‘김장 대란’이란다. “김장은 하셨나요?”가 요즘 인사말이란다. 철이 지났지만 김장 못한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김장 비용이 지난해보다 2배도 넘는다고 한다. 우선 배추값이 금값이란다. 작년에는 너무 싸서 배추를 밭에 그대로 버려둔 농민들이 많았다. 눈, 비를 맞으며 얼어서 썩어 가는 배추밭 풍경이 보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 그 앞에서 모두가 죄인이 되어야 했다. 한데 올해는 재배면적이 줄고 그나마 작황이 나빠서 배추값이 폭등했단다. 지난 가을 줄창 비가 왔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배추값이 한 해는 껌값이요, 이듬해는 금값이라니 우리 농정이 정말 원시적이라는 느낌이다.

김장 대란은 없는 사람에게는 직격탄일 것이다. 서민들은 김장 김치를 끓여 먹고, 볶아 먹고, 지져 먹고, 부쳐 먹고서야 겨우 겨울을 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음식점에서도 ‘김치 인심’이 사나워질 것이 뻔하다. 중국산 김치가 빠르게 음식점 식탁을 점령할 것이다. 그러면 또 안전문제가 불거질 것이다. 그래서 따져 보니 김치가 줄어들면 겨울 인심이 흉흉하다. 겨울이 깊어졌는데도 아직 김장 김치를 맛보지 못한 사람들이 있음이 안타깝다. 김치가 곁에서 익어야 그 겨울도 익어 갈텐데 …. 김치를 나눠 먹는 따뜻한 연말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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