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에서 황금빛이 났어요.” 지난해 가을 유난히 날씨 좋던 날 최순득(45·경주시 성건동) 씨는 경주시 동부동 어느 오래 된 주택으로 수도 검침을 나갔다. 무거운 수도계량기 보호통 뚜껑과 한참 씨름한 뒤 평소 알고 지내던 이 집 마루에 앉아 잠시 숨을 돌렸다. 전날 내린 비로 하늘은 더 없이 맑았다. 눈부신 가을 햇살을 피해 얼굴을 돌리는 순간 수돗가에서 밝게 빛나는 황금색 돌이 눈에 들어왔다.
“수돗가에 있어선 안 되는 돌 같은데, 왜 여기 놓였을까?”
최 씨는 “그 돌을 보는 순간 멍한 느낌으로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고 했다.
4년째 수도검침원 생활을 하는 최 씨에게 이런 일은 처음이었으나 바쁜 일과로 곧 기억의 저편에 묻혔다.
이 기억이 되살아난 것은 올해 9월 1일 밤, 그가 다니는 경주한림야간중고등학교 수업 도중이었다. 어려운 집안형편 탓에 초등학교 졸업장밖에 없는 것이 평생 한이었던 최 씨는 올봄부터 야간학교에서 중등과정을 공부하고 있었다.
이날 수업은 김윤근(신라문화동인회 부회장) 교장의 ‘향토문화’ 보충수업이었다. 김 교장은 최근 포항에서 발견된 신라 최고의 비석인 중성리비 이야기와 수많은 비석, 명문기와 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여러분 주위에도 이런 비석 종류가 있을 수 있으니 유심히 관찰하라”는 말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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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을 듣고 있던 최 씨에게 지난 가을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혹시 하는 마음에 수업 후 김 교장에게 알렸다.
“제가 ‘경주문화원 옆 주택가에서 본 황금색 돌에 한자가 쓰여 있고 글자 간에 줄이 그어져 있었다’고 이야기하자, 교장 선생님이 놀라서 털썩 주저앉는 거예요.”
김 교장도 이날 일을 생생히 기억했다. “통일신라시대 유행한 비문은 애들 공책처럼 줄을 그은 뒤 글을 새겼다. 태종무열왕비도, 무열왕의 둘째아들인 김인문의 비도 그랬다. 최순득 씨의 이야기를 듣고 뒷머리를 호되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최 씨와 김 교장은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국립경주박물관에 연락한 뒤 동부동 그 주택으로 달려갔다.
예상대로였다. 높이 66센티미터, 너비 40센티미터 크기의 이 비석에는 ‘十五代祖 星○○’ 등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국립경주박물관 측은 문무대왕비 상단부라고 판정했다. 문무대왕비는 신라 건국과 태종무열왕의 치적을 비롯해 백제, 고구려, 당나라 격퇴 사실 등 7세기 후반의 이야기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학계의 귀중한 자료다. 조선시대 발견됐던 문무대왕비가 다시 사라져버린 후 2백 년 만인 1961년 하단부가 발견됐고, 그간 행방이 묘연했던 상단부가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주부, 어머니, 아내, 며느리로 바쁜 생활을 보내면서 수도검침원 생활에도 열심인 최 씨는 “이번 문무대왕비 발견을 계기로 문화재 공부에 더욱 열을 올리겠다”고 말했다. 그는 문무대왕비 발견에 대해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온 덕에 문무대왕이 저를 선택해준 것 같아 가슴이 뿌듯하다”고 스스로 대견해했다.
글·이채수(매일신문 사회2부 기자)
문의처 : 문화체육관광부 정책포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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