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혁당사건이 무죄판결을 받았다. 억압받던 시대의 희생자들은 이미 억울하게 떠났고 가족들은 30여 년 깊이 묻어두었던 오열을 터트렸다. 진실이 밝혀진 그 자체만으로 위안을 받아야 하는 기막힌 역사다. 다행스러운 것은 역사의 옹이진 부분에 대한 추적은 재판뿐 아니라 소설과 영화 등 여러 형태로 모색되고 있다는 점이다. 황석영은 소설 ‘오래된 정원’에서 80년대 더 나은 삶을 꿈꾸던 세대의 초상을 그렸다. 자신과 친구들이 겪었던 역사의 격동기를 관념이 아니라 한 개인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 담았고, 이 소설을 임상수 감독이 영상으로 옮겼다.
무기수 사상범 오현우(지진희 분)는 17년 만에 가석방된다. 긴 세월동안 마음에 간직한 사람 한윤희(염정아 분)는 그를 기다리다 먼저 세상을 떴다. 잃어버린 세월이 세상과 그를 단절시켰지만 한윤희는 그들이 처음 만나 함께 시간을 보냈던 갈뫼에 오현우의 자리를 만들어 두었다. 갈뫼로 찾아간 오현우를 따라 80년대의 역사가 오버랩된다. 오현우, 한윤희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겪었던 삶은 80년대를 살았던 사람이라면 모두 씨줄 날줄로 엮여 있는 직간접의 경험들이다. 오현우가 수감된 이후에는 한윤희의 삶을 통하여 새로운 여성상을 보여준다. 시인 강은교가 ‘우리가 물이 되어’에서 노래했듯이 불로 만나려고 하는 자들에게 한윤희는 흐르는 강물처럼 품을 열어준다. 오래된 정원은 오현우가 다시 세상으로 걸어 나가기 위해 에너지를 축적하는 한윤희의 품이다.
영화 ‘오래된 정원’은 한 시대에 대한 비망록에 머물지 않는다. 임상수 감독은 원작 소설과는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억압의 시대에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은 오현우뿐 아니라 그 시대를 아프게 기억하는 사람들 모두가 안고 있는 원죄일지 모른다. 그러나 영화는 80년대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키면서도 시대적 아픔을 직접 설명하거나 공감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80년대를 휩쓸었던 사회운동의 변질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드러내고, 80년대가 간과했던 개인에 대한 존중을 그리는 데 비중을 두었다.
혼자만 행복하기 미안해하다 갇혀 버린 남자와 그 사람에 대한 예의를 다하려고 긴 세월을 기다리던 여자의 아픔이 미소 속에 녹으며 영화는 끝났다. 화가 조덕현의 따뜻한 인물화와 나윤선의 ‘사노라면 언젠가는 좋은 날도 오겠지’라는 노래 가사가 영화의 여운을 오래 감돌게 했다. 역사를 보는 해석은 다를 수 있지만 우리가 지나온 곳과 가야 할 곳에 대한 이정표를 생각하게 해준다.
근현대사 4부작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 ‘극단의 시대’를 펴냈던 역사학자 존 홉스봄의 자서전 ‘미완의 시대’가 최근 선보였다. 홉스봄은 1차대전 중인 1917년 서로 적국이었던 영국인 아버지와 오스트리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굴곡 많은 20세기를 몸으로 부딪치며 살았다. 그는 인간이 유토피아적 전망을 포기하지 않고 이상을 가져야 할 필요성을 역설한다. “자유와 정의라는 이상 없이, 자유와 정의를 위해 생명을 바친 사람들 없이 인류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라고. 세상은 참으로 많이 변했다. 그러면 지금 현재 우리는 어디쯤에 서 있는가. 우리는 자기이익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이 시대에 자기중심주의의 유혹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정혜경 <자유기고가>
문의처 : 문화체육관광부 정책포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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