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T_IMAGE]3,original,left[/SET_IMAGE]날마다 먼 길을 걷고 걸어 그대에게 갑니다. 지난 몇 년 동안 민족의 젖줄 낙동강 1,300리를 걷고, 또 지리산 둘레 850리를 두 번, 그리고 제주도와 내륙을 걸어 어언 1만 리를 훨씬 넘게 걸어 그대에게 가고 또 가지만, 이 길은 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대는 어느새 내 몸과 마음속 깊숙이 들어와 있기 때문이지요. 이토록 너무 가까이 있지만 이따금 내가 내 마음의 갈피를 못 잡듯 문득 그대 또한 도대체 어찌할 수 없는 ‘너무나 먼 당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대에게 발로 쓰는 편지를 씁니다. 족필(足筆)을 아시는지요? 연필과 볼펜과 만년필, 그리고 모필(毛筆)과 혁필로 쓰는 육필은 익히 알겠지만, 족필에 대해 아시겠는지요?
걷고 걷다 문득 생각했습니다. 내 몸이 바로 움직이는 붓이요, 펜이라는 것을! 시나 편지나 글은 책상에 앉아 머리와 손으로만 쓰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이야 진작에 알았지요. 하지만 그마저 뜨거운 가슴과 온몸으로 쓰는 것이 아닐까 추상적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야 알고 또 알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느린 속도로 걷다 보니 아무래도 시와 편지는 손으로, 머리로, 가슴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발로 쓰는 것이라는 것을. 내 온몸이 하나의 붓이 되어 한 발 한 발 힘찬 획을 그으며 걷다 보면 그것이 바로 한 편의 시가 되고 편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온 세상이 거대한 원고지라면 나는 그 원고지의 빈칸마다 발자국을 찍으며 시를 쓰고 그대에게 편지를 씁니다. 행선(行禪)의 자세로 가는 길에 비님이 오시고, 꽃님이 피어나시고, 새님들이 날아오십니다.
빨리, 서둘러, 정신없이, 앞만 보고 가는 길에는 자주 붉은 신호등만 켜질 뿐입니다. 가는 길, 즉 과정이 중요하지 않으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삶이 거꾸러질 때까지 우리의 등을 밀어붙이는 것입니다. 직선과 곡선의 조화 없이 어찌 그림이 되고, 속도와 반속도의 조율 없이 어찌 노래가 되겠습니까.
걷고 또 걷다 겸허해지고 겸허해진 뒤 마침내 한 마리의 자벌레와 갯지렁이인 줄 알 때 바로 그 순간의 모습이, 바로 지금 여기 이곳에 부활하는 예수님이자 부처님의 모습이 아니겠는지요? 세상 도처가 성당이요, 교회이자 법당입니다. 산과 바다와 들과 강, 농촌과 병원과 공장과 교도소와 삼팔선, 이 모두 우리의 서원이자 학교입니다.
새삼 뭐 그리 대단한 일이겠습니까만, 내가 쓰는 족필의 시와 편지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아직은 내 발자국이 비뚤 비뚤 일체원융(一切圓融)의 동그라미 하나 제대로 못 그렸을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SET_IMAGE]4,original,right[/SET_IMAGE]이제 나의 족필은 겨우 지리산에 거대한 원 하나, 엄마의 ‘ㅇ’, 오옴의 ‘ㅇ’, 생명평화의 ‘ㅇ’, 사랑의 ‘ㅇ’, 울음소리의 ‘ㅇ’자 하나 썼습니다. 제주도 한라산을 돌며 또 하나의 글자를 쓰고, 부산과 거제도·통영·고성·마산·창원·진해·김해·울산 등을 돌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글자 하나씩을 쓰고 또 쓰고 있습니다.
행여 한 달 만에 겨우 단 한 글자의 편지를 보내더라도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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