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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호>그곳이 바로 이곳이다

2005.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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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T_IMAGE]3,original,right[/SET_IMAGE]무련, 그대가 지나간 모든 발자국 위에 풀잎이 돋고, 그대의 눈빛이 닿은 곳마다 환하게 꽃이 피었습니다.

대체 어인 일입니까? 그대가 어루만진 나무마다 상큼한 과일이 열리고, 그대가 부른 한 소절의 노래는 어느새 그치지 않는 계곡 물소리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대가 사는 그곳에 가고 싶어 밤새 안달하다가도 ‘그곳이 바로 이곳이다’라는 화두 하나를 잡고 지리산 자락의 툇마루에 나와 공복의 담배를 피웁니다.

마음만 먹으면 가지 못할 곳이 그 어디 있겠습니까? 바이크를 타고 내달리면 두 시간 거리인 해남의 땅끝, 그곳에서 배를 타고 가면 언제나 그리운 후배 시인 강제윤이 사는 보길도가 있지요. 고산 윤선도가 <어부사시사>를 썼다는 세연정 바로 옆에 ‘동천다려’라는 전통찻집 간판을 내걸고 민박도 받는 아름다운 집, 그곳에서 잠깐씩 만난 보길도의 사계절이 어찌 그립지 않겠습니까?

제주도의 우도가 그러하고, 순천의 선암사와 고창의 선운사, 그리고 곡성의 태안사와 문경의 봉암사로 가는 숲 속의 비포장 길이 지금도 서늘한 눈빛으로 다가옵니다. 동해의 감포 앞바다나 서해의 변산반도, 남해의 금산이나 여수 향일암의 아침도 문득 지리산 노고단의 구름바다와 클로즈업됩니다.

불일폭포의 물줄기처럼 쏟아지는 그곳, 그곳의 기억들이 다시 한번 무련, 그대의 발자취로 되살아납니다. 내가 가 본 그 모든 곳에서 잠시라도 그대를 잊은 적이 없고, 그대 또한 내가 가 본 그 모든 곳에 가지 않은 적이 없었지요. 그대가 지나간 모든 자리에 풀잎이 돋고, 그대가 바라본 모든 곳에 꽃이 피어 있었습니다.

다시 피아산방의 차실로 자리를 옮겨 생각해보면, 서울에서 바라보는 지리산은 참으로 먼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지리산에서 바라보는 서울은 참으로 가깝습니다. 서울에서의 시간과 공간은 닫혀 있고, 지리산에서는 그 모든 것이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서울에서는 지리산이 보이지 않지만, 이곳에서는 서울이 아주 잘 보이지요.

신문이나 텔레비전을 보지 않아도 서울은 언제나 안팎의 피로증후군으로 그 표정이 노출돼 있고, 이곳은 그날이 그날인 듯 아무런 변화가 없으면서도 내면 깊숙이 흐르는 섬진강 물굽이와 지리산의 유장한 호흡이 나날이 새롭습니다. 언제나 허겁지겁 쫓기듯 사는 마음과 시간 혹은 공간을 늘렸다 줄였다 할 줄 아는 마음의 차이 때문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언젠가 읽은 <그곳이 멀지 않다>는 나희덕 시인의 시는 ‘그곳은 이미 내 몸속에 있다’는 말이겠지요. 그도 아니라면 그곳은 이미 이곳이요, 이곳은 이미 그곳이니 ‘바로 여기 이곳이 멀지 않다’는 어느 불경의 한 구절과 같은 말이 아닐까요?

[SET_IMAGE]4,original,left[/SET_IMAGE]굳이 화엄경의 핵심이자 연기법의 세계관을 상징하는 ‘인드라망’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이미 내 속에 그대가 있고, 그대 속에 내가 있지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서로 향하는 모든 길 위에서 문득 미아가 되었습니다.

내 얼굴에 겹쳐진 무련, 그대의 얼굴이 문득 낯선 것도 이 때문이지요. 오늘도 이것이 나의 숙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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