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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호>햇살이 더 어둡다

2005.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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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T_IMAGE]3,original,left[/SET_IMAGE]지리산에 눈이 오십니다. 북풍을 타고 내려온 이 눈보라는 시베리아에서 길을 떠나 삼팔선을 넘어 안동을 지나 지리산까지 숨 가쁘게 달려왔겠지요. 눈보라는 세상의 모든 길을 지우고 또 지우며 인간의 길에 대한 재해석의 화두를 던집니다.

순식간에 고립된 산중의 외딴 집, 읍으로 가는 길이 사라지고 산 아랫마을이 자꾸 멀어집니다. 그러나 고립은 홀로 격리되는 것이 아니라 홀로 높게 서는 것. 안상학 시인의 절창 <맹인부부>를 읽다 ‘햇살이 더 어둡다’는 이 한 구절에 무릎을 칩니다.

길을 보지 못하는 그들이
길을 묻는다. 침술원이 어디냐고
길을 보지 못하는 그들에게
저기 있어요. 손으로 가리키다가
말문이 막힌다.

소매를 잡고 길을 간다.
횡단보도 앞에 서서 눈을 감아본다.
두 눈 멀쩡히 뜨고 살면서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엄살떤 적 있었던가.

침술원 문을 열고 들어서니 캄캄하다.
귀를 쫑긋 세우는 맹인 침술사
불도 켜지 않은 채
맹인부부의 손을 잡고 인사를 나눈다.
거리로 나서는 순간 눈앞이 캄캄하다.
햇살이 더 어둡다.

그렇지요. 반달곰처럼 겨울잠이나 푹 자려다 벌떡 일어나 창밖을 내다봅니다. 세상의 온갖 풍문과 낙서들이 흰 눈의 수많은 지우개로 지워져 한 장의 거대한 백지가 되었습니다.

저 거대한 백지의 세상은 아무래도 구름의 흰 발자국이 아니겠는지요. 잡다한 길들이 사라지고 흘러가는 저 구름의 환한 길이 이 땅에 뚜렷이 새겨진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눈 속에 덮인 일상적이고 상투적인 길에만 마음을 주다 보니 크고 환한 길을 잃어버린 맹인들이었습니다. 그러니 햇살이 더 어두울 수밖에요. 당대의 시인들이 부쩍 ‘길’에 대해 수많은 시를 써왔지만 대개는 오히려 길이 길에 막혀 혼돈의 길로 빠지는 형국이 많았습니다.

저 눈밭에 덮인 옛길을 찾으려 하거나 새로운 길을 내려고 이리저리 뛸 것이 아니라 한 발 물러서서 저 눈밭의 세상이 그대로 길이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겠지요. 잠시 가던 길을 잃었다고 무어 그리 조급할 게 있겠습니까? 잃은 길도 길입니다. 살다 보면 눈앞이 캄캄할 때가 있겠지요. 그럴 때는 그저 눈앞이 캄캄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바로 그것이 길이 아니겠는지요?

혼돈의 시대, 욕망 과잉의 시대, 폭력의 시대에 안상학 시인의 ‘햇살이 더 어둡다’는 선언은 새로운 반성과 뼈아픈 참회를 요구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믿어왔던 합리주의적이고 이성적인 ‘햇살’은 정작 혼돈 그 자체이자 욕망이었고, 남성우월주의의 폭력이었습니다.

이 짧은 문장 하나가 문명적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21세기의 새로운 패러다임인 생명평화의 화두를 던지고 있습니다.

눈이 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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