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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호>신록의 산색을 보고도 모르십니까?

2006.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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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지리산의 산빛을 보노라면 눈이 맑아지다 못해 눈물이 날 지경입니다. 산벚꽃이며 산복사꽃들이 지고 마침내 연초록의 바람이 산을 뒤덮으면 시력은 배가 되고, 세상이 너무 잘 보이다 못해 문득 어지러울 정도이지요.
이러할 때 하동군 화개면의 햇차라도 한 잔 마시며 눈을 감으면 몸속의 피마저 신록으로 흐르는 듯합니다.

저 산이 마치 자기 최면에 걸린 듯하니, 나 또한 덩달아 온몸이 연초록의 잎이 된 듯 자기 최면에 걸리니 이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 일이며, 충만한 기운이 내내 샘솟는 일인지요.

내가 아직 젊은 20대일 때 눈 밝은 선배에게 호를 하나 받은 적이 있는데 청람(靑嵐)이었습니다. 호를 갖는다는 게 왠지 쑥스러워 잘 쓰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에 고이 간직해 왔지요. 그런데 해마다 5월이면 청람이란 놈이 불쑥불쑥 두더지처럼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곤 했습니다.

청람의 뜻은 ‘오월에 이는 푸른 산 기운’입니다. 말하자면 지금 이 순간 신록의 산색을 낳는 미완의 바람으로서 연초록에서 초록으로 넘어가는 과정의 산 기운인 것이지요. 결과만을 좇지 말고 내내 과정을 사랑하라는 뜻이 너무나 좋아서 오히려 부담스러웠던 것도 사실입니다.

날마다 첫 마음,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뜻으로 어린이 날, 어버이 날, 스승의 날, 부처님 오신 날이 산색과 더불어 함께 하니 이 얼마나 좋은지요. 거기에다가 4·19와 5·18 또한 바로 지금의 산색이 아니겠는지요.

남원시 운봉읍의 바래봉하며 하동군 악양면의 성제봉, 그리고 세석평전의 붉은 철쭉꽃들이 신록의 산색에 슬프디 슬프고, 아프디 아픈 화룡점정을 찍으니 비로소 지리산은 지리산다워지는 것입니다.

실상사 수월암의 연관 스님이 운서 주굉이 쓴 ‘죽창수필’을 다시 선역해 펴냈는데, 그 제목이 또한 ‘산색’입니다. 나는 ‘산색’의 첫 장을 들여다보다 단 두 문장에 무릎을 치고 말았지요.
“날쌘 말은 채찍 그림자만 보고도 내달린다. 송곳이 살갗에 꽂혀서야 알아채는 것은 둔한 말이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경구인지요. 신록의 산색을 보고도 깨닫지 못한다면 무엇을 보고 살아 있음의 묘미를 알아채겠습니까.

[SET_IMAGE]4,original,left[/SET_IMAGE]지금은 다만 잠시라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저 산색이 주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날마다 초심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미완의 과정을 대충 건너뛰려는 자세부터 버려야 하지 않겠는지요.

우리네 삶의 지난한 과정이 바로 신록처럼 푸르되 그 푸름을 강요하지 않고, 철쭉꽃처럼 붉되 그 붉음을 무리하게 강요하지 않는 마음 또한 소중합니다. 스스로 그러한 산색이 주는 자기 최면과 말씀을 경청하며 5월의 지리산을 바라봅니다.

굳이 송곳에 깊이 찔려야 알겠는지요. 피를 토하는 철쭉꽃들을 연초록의 산색이 슬그머니 감싸고 있습니다. 그러하니 철쭉꽃 또한 더욱 붉을 수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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