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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호>논두렁 우체통

2006.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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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휴가철입니다.
지난해 이맘때도 더웠고 백 년 전, 천 년 전의 이맘때도 더웠듯이 그대 또한 여여하신지요? 산중의 외딴집에 살다보니 따로 휴가나 휴양지가 필요 없지요. 다만 문득 문득 세상 소식이 그리울 뿐입니다.

‘먹고 살기 힘들다’는 말이야 오늘의 무더위처럼 어제도 그랬고 백 년 전, 천 년 전에도 그랬겠지요. 다만 좀 더 행복해졌느냐 아니냐의 체감 온도가 문제지요. 가난은 곧 불행으로 이해되는 세상이 많이 아쉽습니다. 오히려 가난해서 행복한 청빈(淸貧)의 삶, 자발적 가난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인지, 그것이 내내 궁금할 뿐입니다.

산중의 외딴집에 살다보니 대문이 필요 없습니다. 훔쳐갈 게 없으니 아예 자물쇠도 필요 없고요. 지리산에 스며들어 살면서 도시처럼 잠금장치를 한다는 게 참으로 우스워 나날이 그야말로 열린 집입니다.

비록 빌린 집이기는 하지만 사시사철 ‘너와 나의 경계가 없다’는 뜻의 피아산방(彼我山房) 글씨가 적힌 북 하나를 걸어두고 삽니다. 잘 아는 후배들이나 산꾼들이 지나다가 내가 있건 없건 차를 끓여 마시고 잠을 자고 가기도 합니다. 도무지 보족한 게 없는 셈이지만, 그래도 내게 꼭 필요한 것이 하나 있기는 합니다. 바로 빨간 우체통이지요. 미안해서, 머나먼 산길을 올라와야 하는 우편집배원에게 미안해서, 산중에 사는 주제에 시집이며 원고청탁서며 바깥소식 많은 게 미안해서, 산 아랫마을 논두렁 전봇대의 하얀 종아리에 마치 영역 표시처럼 붉은 양철통으로 만든 우체통 하나를 매달아놓았지요.

“워째, 싸게 싸게 답장을 안 하능겨.”
마치 재촉이라도 하듯이 보랏빛 붓꽃이 피고 또 피는 앞마당에서 논두렁 우체통까지 장장 2km 정도 됩니다. 자물쇠도 대문도 없는 마당에서 논두렁 우체통까지 가는 길에 일급수의 문수골 저수지와 열일곱 기의 무덤이 있고, 차나무와 대나무와 미루나무의 푸른 그늘과 논밭의 고라니, 너구리, 멧돼지 일가들이 우글거리지요.

이따금 방사한 북한산 반달곰도 기웃거리는 산길 2km. 그러니까 착한 초식동물들 같은 논두렁 우체통에서 붓꽃 피는 우리 집 앞마당까지의 거리, 꼭 그만큼이 모두 나의 정원인 셈입니다.

어쩌다 저물녘에 들르면 멀리 서울에서 보내온 행사 팸플릿이 나를 기다리고, 풋과일처럼 싱싱한 얼굴의 청첩장과 일용할 양식인 원고청탁서와 모친상에 와주셔서 고맙다는 감사의 편지가 논두렁 우체통에서 덥석 따스한 손을 내밉니다. 날마다 논두렁 우체통은 온 지구적인 셈이지요. 사나흘 출타했다 돌아오면 나보다 먼저 나팔꽃 한 송이가 손길을 뻗어 여성시인의 첫 시집을 더듬더듬 점자처럼 읽고, 비바람이 불고 어쩌다 우체통이 텅 비어 덩달아 내 가슴도 텅텅 비는 날이면 우체통 저도 많이 외로운지 우편집배원의 오토바이 소리를 냅니다.

그뿐인지요. 이따금 귀뚜라미, 여치들이 논두렁 붉은 우체통 속에 들어가 어린 청개구리와 더불어 노래를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한 날이면 나는 누가 이들을 보냈는지 안 봐도 다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그리운 누군가가 있어 우표도 없이, 발신 주소도 없이 텅 빈 논두렁 우체통 속으로 환삼덩굴 그 부드럽고도 까칠한 손길을 뻗어오는지 다 알 수 있습니다.
[RIGHT]<시인>[/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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