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의 황금빛 가을 들녘은 지금 농부들의 막바지 수확의 손길로 분주합니다. 모두들 단풍 구경에 들뜨는 시절이지만 물드는 단풍잎을 바라보는 농부들은 한 해를 점검하고 반성하며, 또 감사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결실의 성과가 좋든 말든, 돈이 되든 말든 농부들은 이 청청한 가을 하늘 아래 온몸이 단풍처럼 검붉게 타오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단풍나무며 붉나무며 온 산을 물들이는 노랗고 붉은 기운에 넋을 빼앗기지만, 사실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단풍의 기운은 황금빛 들녘입니다.
아니, 그보다 아름다운 단풍은 자신뿐 아니라 누군가의 일용할 양식을 꿈꾸며 온몸을 던지는 농부들의 구릿빛 근육입니다. 아무래도 단풍은 설악산에서부터 백두대간을 타고 스스로 남하하는 게 아니라 농부들의 검붉은 얼굴과 구릿빛 근육이 이 세상의 단풍들을 불러 모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하루살이처럼 하루하루 단절의 목숨을 간신히 연명하는 듯합니다. 계절 또한 그렇게 꽃철이면 꽃들에게만 마음을 주고, 여름 휴가철이면 바다와 계곡에, 단풍철이면 단풍에만 마음을 빼앗기며 허둥댑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그처럼 단절의 시간을 모릅니다. 봄에 여름을 생각하고, 여름에 가을을, 가을에 겨울을, 겨울에 봄을 미리 온몸으로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이지요. 아니, 한발 더 나아가 봄에 가을을, 가을에 봄을 미리 살아가는 것이지요. 아무리 못난 농부일지라도 생명 그 자체는 단절이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며 살아갑니다.
굳이 한 예를 들자면, 구례 들녘에는 벼 수확을 하기 전에 미리 내년 봄에 피어날 자운영 꽃씨를 뿌립니다. 천연비료인 자운영을 먼저 흩뿌린 뒤에야 벼 수확을 시작하는 것이지요. 당장 눈앞의 수확에만 눈멀지 않고, 내년 봄 모내기를 하기 전에 자운영 꽃이 피고 그 아름다운 보랏빛 꽃물결이 구례 들녘에 피어날 것을 생각하며, 그 꽃들이 마침내 내년의 어린 벼들을 살찌게 키우리라는 부푼 마음으로 올해의 농사를 마감합니다. 그러하니 그 마감은 당연히 또 다른 시작으로 연결돼 있을 수밖에요.
추수가 끝나면 다시 마늘을 심거나 양파를 심어 놓고 혹한의 겨울을 기다리니 가을 들녘은 이미 단풍의 미혹을 넘어 내년 봄의 기운으로 충만합니다. 이처럼 풍요로운 결실마저도 당장 눈앞의 결실만이 아니라 내년 봄과 가을로 이어져 있는 것이지요. 천대받으며 별로 돈도 되지 않는 농사도 이러할진대, 우리는 지금 무엇으로 사는지 무척 궁금합니다. 목숨을 걸고 내일을 위해 오늘을 살지만, 진정 실상이 그러한지 반문하고 또 반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풍의 기운은 저 산에 있는 게 아닙니다. 설악산이며 내장산이며 지리산이 아니라 바로 구례 들녘이나 하동군 악양면 무딤이 들녘의 황금빛 물결 속에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함께 사는 농부들의 구릿빛 근육에 있는 것입니다.
머지않아 저 들녘 위로 볏짚을 태우는 연기가 오르고, 함박눈이 내리고, 배고픈 까마귀 떼들이 날아오르겠지요. 그러나 저 들녘의 흙가슴 속에는 이미 내년 봄의 씨앗들이 꼬물꼬물 싹을 틔우고 있습니다.
[RIGHT]<시인>[/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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