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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호>꽃신

2007.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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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목과 모시를 쌀풀로 여러 겹 붙여 백비를 만들어야 해. 그리고 광목이랑 베도 똑같이 해서 며칠 동안 밖에 두고 말리는 거지. 그러면 낮엔 햇빛에 마르고 새벽엔 이슬에 젖는 걸 반복하면서 빳빳하게 말라. 햇볕이 너무 강해도 안 되니 백비를 만드는 건 가을이 제격이야.”

5대째 가업을 잇고 있는 화장(靴匠) 황해봉(54) 씨의 작업실 한구석에는 광목과 베로 만들어진 백비가 잔뜩 쌓여 있다. 가을 햇볕에 잘 말려진 백비는 빳빳하니 그 끝이 칼날과 같다. 광목으로 만들어진 것은 신의 울타리용으로 겉감으로 쓰이고, 베가 들어간 것은 꽃신의 안쪽에서 기둥 역할로 쓰이게 된다. 백비를 만들고 나면 멧돼지 털을 바늘로 삼아 신발의 무늬인 ‘눈’을 새기고 그 이후엔 신창작업이 이어진다. 하루 6시간씩 꼬박 며칠 동안 작업에 매달리면 어느새 곱디고운 꽃신이 완성돼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꽃신은 돌쟁이 어린아이 발에, 백년가약을 맺는 새신부의 발에 신겨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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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이 신는 태사혜, 당초 문양을 넣은 여자들의 당초와 운혜, 비오는 날 신는 기름을 먹인 유혜 등 20여 가지의 꽃신은 모두 가죽을 자르고, 붙이고, 두드리기를 반복하며 총 70여 가지의 공정을 거쳐야 완성된다. 16세부터 어깨너머로 배워오던 황씨가 할아버지에게 본격적으로 기술을 전수받게 된 것은 군대를 제대한 직후였다.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기술을 전수받고 있었지만 이미 연로한 탓에 눈이 어두워 배움이 더딜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당뇨로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자 황씨는 유일한 화혜장 전수자가 됐다.

“내 대에서 기술이 끊어지면 안 되잖아. 제대하고 본격적으로 할아버지에게 기술을 전수받았는데 그때 이미 할아버지는 여든이 넘으신 연세였지. 내가 마음이 더 급하더라고.”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가업이 그의 대에서 끊겨선 안 된다는 고집도 있었지만 기실 어릴 적부터 보아오던 꽃신의 아름다움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처마 지붕처럼 살짝 올라간 신코의 부드러운 곡선, 화사한 빛깔과 섬세히 놓아진 자수의 화려함까지 유년시절부터 평생을 옆에서 지켜봐왔음에도 꽃신의 고고한 아름다움에 여전히 반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1983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화장의 맥은 잠시 끊겼지만 1997년 전승공예대전 특별상과 대통령상 수상에 이어 2004년에는 황씨가 중요무형문화재 116호 화혜장으로 인정돼 그 맥을 잇고 있다. 고종의 신을 만들던 조선왕조 최후의 왕실 갖바치의 기술이 손자 황씨에 의해 올곧이 살아난 것이다.

“신분제가 무너진 뒤엔 꽃신 주문이 줄을 이었어요. 그땐 정말 남부러울 게 없었다고 하더라고. 사대부에서나 신던 귀한 꽃신을 너도 나도 신어보려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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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변함에 따라 고무신이 들어오고, 이후엔 구두가 유행하면서 꽃신은 점차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져갔다. 엄마가 신고 왔던 고운 꽃신을 소중히 보관했다 딸이 시집갈 때 다시 신겨 보냈던 모정도 같이 잊혀져갔다. 결혼식을 앞둔 몇몇을 빼고는 이젠 꽃신을 찾는 이들은 거의 없다. 풀로 만들다 보니 딱딱한 꽃신은 “풀집이 나야 발집이 난다”는 말처럼 구두와 운동화에 비해 불편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황씨는 풀기를 좀 빼서 부드러운 꽃신을 만들었지만 그나마도 요즘은 통 찾는 사람이 없다며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그의 웃음엔 꽃신을 신고 재 너머 시집가는 누이의 뒷모습을 배웅하는 소년과 같은 쓸쓸함이 배어나왔다.

그럼에도 손에 굳은살이 박이도록 신을 만드는 것은 자신의 대에서 기술이 끊어져선 안 되기 때문이다. 다행히 둘째아들이 꽃신에 관심도 많고 재주도 있어 후계자를 이어갈 수 있다는 든든함이 그를 안심케 한다.

“남들이 봐서는 똑같이 하나의 신발로 보이지만 내가 보기엔 어제 한 거랑 오늘 한 거랑 다르거든. 좀 잘못된 게 있다고 느끼기도 하고… 기능은 끝이 없어요.”

수백 켤레의 꽃신을 만든 최고의 솜씨건만 장인에게 만족은 있을 수 없다는 황해봉 화혜장. 장인은 자신과의 싸움을 계속해야 한다. 그리고 그의 대에서 이룬 성과는 그의 할아버지가 그러했듯, 그의 아들의 손에 의해, 그리고 또 그 다음 세대로 장인의 혼으로 이어질 것이다.
[RIGHT]사진 안홍범 / 글 이명아 객원기자[/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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