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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과 더불어 생겨난 마을 ‘해방촌’, 예술을 품다

계단·골목 곳곳이 예술작품으로…마을의 독특한 역사와 어우러져 정감

2013.08.14 정책기자 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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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해방촌 고개를 추어오르기에는 뱃속이 너무 허전했다. 산비탈을 도려내고 무질서하게 주워 붙인 판잣집들이었다. 철호는 골목으로 접어 들었다. 레이션 곽을 뜯어 덮은 처마가 어깨를 스칠 만치 비좁은 골목이었다. 부엌에서들 아무데나 마구 버린 뜨물이, 미끄러운 길에는 구공탄 재가 군데군데 헌데 더뎅이 모양 깔렸다.“

‘해방과 더불어 생겨난 마을’이란 뜻의 해방촌. 이범선 작가는 소설 ‘오발탄’에서 과거 해방촌의 환경을 위와 같이 묘사한다. 해방촌의 정확한 구역 명칭은 서울시 용산구 용산2가동(용산1가동 일부 포함)이지만, 역사적 의의 때문에 해방촌이란 명칭으로 더 익숙하게 불린다. 일제 시대 해방촌은 일본군 제20사단 사격장과 같은 군부 시설을 중심으로 한 일본인들의 거주 지역에 불과했지만, 광복을 맞아 해외에서 귀환한 사람들, 그리고 북에서 월남한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남산 산기슭에 동네가 형성됐다.

해방촌 입구에 위치한 미군기지. 광복후 일제가 쓰던 관사를 점거해 실향민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켰다. 실향민들은 관사를 떠나 현재의 해방촌 지역에 다시 자리 잡았다.
해방촌 입구에 위치한 미군 기지와 경고 표지판. 미군은 광복 후 일제가 쓰던 관사를 점거해 실향민들을 다른 곳으로 이주시켰다. 실향민들은 관사를 떠나 현재의 해방촌 지역에 다시 자리 잡았다.

 
이후 1950년 6. 25 전쟁으로 피난 온 이들까지 합류하며 해방촌은 광복과 6.25 전쟁이라는 두 거대한 근현대사의 파도에 쓸려온 이들을 보듬어 안고, 서울 소시민들의 애환과 새로운 시작을 담은 공간으로 여겨졌다. 

분단 이후에도 해방촌은 끈임없이 변화와 융화를 반복했다. 6-70년대에는 요꼬(스웨터) 산업을 중심으로 봉제 공장과 대규모 시장이 번성하기도 했다. 근래에는 이태원 주변의 물가와 집세가 싼 곳을 찾아 해방촌에 정착한 1,000여 명의 외국인 주민들과 함께 이국적인 음식점과 카페들이 급증했다. 이로 인해 해방촌은 현재 ‘제2의 이태원’이란 별칭의 글로벌 문화 명소로 부상하고 있다.

(좌)신흥 시장의 모습. 40여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80년대 요꼬 사업의 쇠퇴로 철수한 빈 가게들의 흔적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우) 외국인 주민 유입으로 늘어난 서양식 음식점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해방촌의 모습. (좌)4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신흥시장. 80년대 요꼬 사업의 쇠퇴로 철수한 빈 가게들의 흔적도 여전히 남아있다. (우)외국인 주민 유입으로 늘어난 서양식 음식점들.

 
용산구청은 이 같은 해방촌의 역사와 변화의 흔적을 녹여내는 동시에 노후된 거주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해방촌에 예술 작품을 설치하는 ‘해방촌 예술마을 사업’을 시작했다. 이와 같은 참신한 사업 의도에 힘입어 ‘해방촌 예술마을 조성 사업’은 안전행정부에서 지원하는 국고보조금 교부 대상에 선정돼 지난해 5월부터 본격적인 예술마을 조성에 들어갔다.

용산구청 도시디자인과 관계자와 사업 담당 업체 ‘스페이스 브랜딩’의 김대영 대표는  “해방촌은 관광 명소로 유명한 남산 소월길, 녹사평역 경리단길, 이태원과 가까운 중간 지역이다. 이와 같은 교통 이점과 해방촌의 스토리를 살려 위의 지역과 연계·방문해볼만 한 산책 탐방 명소로 만드는 것이 목표”라며 “시끌벅적한 기존의 외국인 상업 관광 지역과는 또 다른 매력이 있다.”고 설명했다. 

해방촌 예술마을(HBC 아트힐)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다양한 표지들. 해방촌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해방촌 예술마을(HBC 아트힐)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다양한 표지들. 해방촌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해방촌 예술마을의 특징은 조성 주체가 바로 해방촌과 끈끈한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란 점이다. 다양한 국적의 해방촌 주민들, 그리고 인근의 중·고등, 대학생들까지 한 뜻으로 뭉쳐 해방촌을 탈바꿈시켰다. 올해 1월까지 계속된 사업때문에 추운 겨울에도 벽화 작업에 동참했던 한 외국인 학생은 “고생이라기보단 한국에서 내가 살았던 곳을 직접 가꾸고 가는 특별한 경험이자 값진 인연이었다. 내가 다시 한국에 왔을 때에도 작품이 계속 잘 남아있으면 좋겠다.”라는 바람을 전했다.

해방촌에 거주하는 75살 정승연 할머니도 “예전엔 외국인들이 담벼락에 마구 락카로 낙서하고 간 곳도 많아 보기 흉했어. 그런데 예술마을 사업을 하면서 많이 깨끗해졌지. 그림 그릴 장소 정할 때도 구청 직원들이 일일이 돌아다니며 집주인들한테 양해구하고 어떤 그림을 그릴 건지도 다 설명하더라고. 그래서 그런지 여기 사람들이 크게 반대하거나 작업 도중 마찰을 일으킨 일은 별로 없었던 것 같아.”라고 의견을 전했다.

(좌)벽화 작업에 참여하기 위해 기다리는 외국인 주민들과 서울대 건축학과 학생들. (우) 학교 등하교길 담벼락을 꾸미는 보성여고 학생들 (출처= 해방촌 예술마을 홈페이지, 공식 페이스북)
(좌)벽화 작업을 앞두고 모인 외국인 주민들과 서울대 건축학과 학생들. (우)학교 등하교길 담벼락을 꾸미는 보성여고 학생들 (출처=해방촌 예술마을 홈페이지, 공식 페이스북)
예술 사업 참여자들은 팝아트와 전통미를 아우르는 다양한 예술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윗줄 작품들은 팝아트적 기법으로 알록달록 활발하게 꾸민 주차장과 주택가.(왼쪽부터) 아랫줄은 우리 전통의 떡살과 사군자를 그린 담벼락과 공터. 떡살은 외국인들이 직접 그렸다.
예술 작업자들은 모던과 전통을 넘나드는 다양한 예술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윗줄 작품들은 팝아트적 기법으로 알록달록한 색으로 활기차게 꾸민 주차장과 주택가. 아랫줄은 우리 전통의 떡살 문양과 사군자를 그린 담벼락과 공터. 떡살은 외국인들이 직접 그렸다.

 
마을에 대한 애정을 듬뿍 담아낸 해방촌 예술마을의 매력은 더욱 따듯하고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볼품없고 낡은 모습을 숨기는 대신, 이를 정감있게 드러내며 주변과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마법을 건다.

낡은 외벽과 도시가스 측정기는 참새들이 모여드는 아기자기한 가을 나무가 됐다. 복잡한 거미줄같이 얽힌 주택 가스관들은 오색 무지개로 변해 집을 휘감는다. 이와 같은 풍경을 계속 감상하다보면 주택의 낡은 환풍구, 무심하게 놓고 간 화분까지도 예술 작품의 일부로 보이는 아름다운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좌)신흥 시장 근처 골목의
(좌)신흥시장 근처 골목의 작품 ‘나무와 새’. 시장의 이미지를 밝고 활기차게 하기 위해 도입했다. (우)작품명 ‘무지개를 따라서’. 건물 밖 노출된 가스관에 다채로운 색을 입혀 부정적 시선을 없앴다.
무심하게 놓은 화단, 낡은 환풍구는 벽화와 어울려 마치 작품의 일부처럼 보인다.
화단과 낡은 환풍구는 벽화와 어울려 마치 작품의 일부인 것처럼 자연스러워 보인다.

 
한국 거주 2년차, 시끄러운 서울 소음을 피해 한적하고 교통이 편리한 해방촌에 자리잡은 주민 댄씨도 주변 환경과 함께 호흡하는 예술마을 작품들에 대해 호평했다. “미국 동네에도 예술 작품이 있긴 했지만 기념을 목적으로 한 조각상이나 기념비가 전부였다. 이곳은 계단, 골목 등 소소한 곳의 벽화가 많아 재미있다.”고 관심을 표했다.

“내·외국인, 세대를 막론하고 주민 모두가 허물없이 어울리는 해방촌만의 인간적인 매력이 예술마을 사업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으면 좋겠다.”는 그의 말을 통해, 역사를 통해 자연스럽게 형성된 해방촌의 ‘이방인 포용 문화’를 체감할 수 있었다. 인터뷰 도중 댄을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를 건네는 이웃, 그리고 이웃의 인사에 자연스레 화답하는 댄의 풍경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5월 봄날에 만난 댄씨. 익살맞은
5월 봄날에 만난 댄씨. 익살맞은 ‘소와 게으름뱅이’ 벽화 옆에 자리 잡았다.

 
해방촌 예술마을의 백미는 작품들이 ‘역사’와 ‘변화’, ‘희망’을 이야기한다는 점에 있다. 예술 기법과 디자인을 통해 주제를 표현한 점은 여타 다른 예술마을이나 벽화마을과 차별화된 해방촌 예술마을만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러한 스토리텔링 작품의 매력이 집약된 곳이 바로 해방촌 108계단이다. 후암동과 해방촌 끄트머리를 잇는 지점에 뜬금없이 우뚝 솟은 이 계단은 바로 일제 시대에 호국신사로 향하던 길이었다.

“계단 위쪽에 일본 전쟁 군인들을 기리던 신사가 있었어. 지금의 센테니얼 기독국제학교 근처 주택가 자리에 있었는데 없어졌지. 계단만은 고친 것 하나 없이 그대로 남아있어.” 30년 넘게 해방촌에 거주해온 주민 황옥자 씨가 필자에게 108계단에 대해 설명해줬다.

과거 호국 신사로 향하는 길이었던 108 계단의 모습. 계단 입구를 알리는 문틀 모양의 조형물이 방문자들을 환영한다.
과거 호국 신사로 향하는 길이었던 108 계단의 모습. 계단 입구를 알리는 문틀 모양의 조형물이 방문자들을 환영한다.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가파른 회색 계단 담벼락, 촘촘히 붙은 연립주택의 불편한 동거를 예술마을 사업은 ‘봄날의 희망’을 담은 예술로 치유했다. 우중충한 계단 중앙 정원엔 새와 나비를 날아들게 해 친근함을 불어넣었다.

삭막한 담벼락엔 자작나무와 그래피로 표현한 진달래가 피어났다. 울퉁불퉁한 시멘트벽의 질감은 더 이상 을씨년스럽지 않았다. 추위를 이겨내고 꿋꿋하게 자란 꽃과 나무의 아름다움에 입체감을 더할 뿐이었다. 거칠고 모진 근현대사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희망을 키워온 해방촌의 이야기를 보는 듯 했다. 그리고 새싹이 움트고 형형색색의 산새들이 모여드는 ‘해방촌 희망나무’는 이와 같은 역경을 이겨낸 해방촌의 미래와 희망을 담은 출사표였다.

108계단과 맞닿은 주택가에 자리한 작품들.(좌)진달래 (우) 해방촌 희망나무. 고양이가 유유히 옆을 지나고 있다.
108계단과 맞닿은 주택가에 자리한 작품들. (좌)진달래 (우)해방촌 희망나무. 고양이가 유유히 옆을 지나고 있다.
108계단 정원과 자작나무 벽화를 지나고 있는 할머니와 손자. 조형물 속 새들이 두 사람을 지켜보는 듯 하다.
108계단 정원과 자작나무 벽화를 지나고 있는 할머니와 손자. 조형물 속 새들이 두 사람을 지켜보는 듯하다.

 
해방촌 예술마을은 기존의 벽화마을, 예술마을에 비하면 불친절하다. 널찍하게 잘 정비된 관광로, 관람하기 쉬운 작품 배치 등을 기대하고 해방촌을 찾는다면 실망할지도 모른다. 주택가와 골목 속에 꼭꼭 숨겨져 있고, 집 지붕과 같은 황당한 위치에 자리한 작품들도 있기 때문이다. 대충 둘러보겠단 생각으로 걸었다간 굽이굽이 좁은 골목과 가파른 경사길에 지쳐 시쳇말로 ‘멘붕(멘탈붕괴)’만 겪고 올지도 모른다. 필자 역시 방문자들을 위해 마을버스 정류장 등에 작품 안내 표지를 추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런 보물 찾기 같은 독특한 콘셉트가 더욱 세심한 애정을 갖고 마을을 보게 만들고, ‘일상 속 예술마을’이란 정체성을 체감시키는 매력을 낳는다. 마을 공동체 ‘카페 빈가게’의 마스터 이수희 씨는 “예술마을 사업이 일회성 개선에 그치지 않고 해방촌의 정체성을 더욱 담아냈으면 좋겠다. 오래 거주한 주민들도 의미있게 인정할 만한 해방촌의 고유 문화재산으로 계속 거듭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신흥 교회 부근 건물의
신흥교회 부근 건물에 그려진 벽화 ‘해방촌 사람들’. 겹겹이 위치한 집들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주민들을 그래픽 패턴으로 표현했다. 막대 모양은 해방촌 집들을 상징한다.

 
해방촌 예술마을의 매력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부대찌개’이다. 과거 광복 전후의 자취를 간직하고 있음과 동시에, 새로운 역사를 묵묵히 포용하며 차곡차곡 담아 끓여내, 서로의 특성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독특한 조화를 이룬다. 그리고 마을의 예술작품들은 마치 이야기꾼처럼 그런 해방촌의 공기를 과거와 현재, 미래를 오가며 보는 이들에게 전하고 있다.

8.15 해방 축제 준비로 들뜬 해방촌의 전경을 보며, 필자는 해방촌 예술 마을이 ‘역사’와 ‘힐링’을 동시에 담은 공간으로 더욱 진화하길 바라며 탐방을 마무리했다.

☞ 해방촌 예술마을 안내 홈페이지: http://www.arthill100.com
☞ 해방촌 예술마을 탐방 팁:
1) 용산 마을 버스 02번을 타면 해방촌 전역(한신아파트 입구~후암동 종점)을 쉽게 이동할 수 있다. 일부 작품들도 쉽게 만나볼 수 있다.
△108계단(후암동 종점)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등(큰빛의 집) △키스 하링을 위하여, 바오밥나무 등(신흥교회) △주택 벽화들(기업은행 정류장) △칼라 바코드, 떡살, 롤리팝, 사군자, 단청 등(한신아파트 정류장)
2) 안내가 필요할 시 해방촌 오거리의 용산 2가 주민센터(02-2199-8420)를 찾으면 관련 안내를 받을 수 있다.

정책기자 김연수(대학생) siren71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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