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많은 세월이 흘러갔네. 달리기를 잘한다고 해서 내 별명은 ‘구보(驅步)’ 씨. 내가 열 살 때 광복을 맞았어. 박태원은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1934)이라는 세태 소설에서 구보 씨의 눈으로 본 서울 풍경을 이야기했지. 나도 그 소설에서처럼 우리가 살아온 지난 시절을 얘기하려고 해. 앞으로 광복 70년의 기억을 돌아볼 거야.
내가 열 살 때 뭘 먹었나를 더듬어 보면 보리밥과 짠지밖에 생각이 안 떠올라. 어린 나이에 광복이 뭔지나 알았겠어? 허기진 배를 채우면 그날은 땡잡은 거지. 보리개떡에 된장국, 소금에 절인 무짠지를 주로 먹었어. 감자나 옥수수도 자주 먹었어. 그래도 우리 집은 조금 형편이 나아 그나마 다행이었지. 하루 두 끼 먹은 친구들도 많았어. ‘물배’라고 알아? 물로 배를 채운 거지. 미군정을 거쳐 1948년에 정부가 수립됐지만 곧 6·25전쟁이 일어났고 굶주림은 계속되었지. 전쟁 통에는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음식 찌꺼기를 모아 끓인 꿀꿀이죽을 먹었어. 요즘 젊은이들은 입도 못 대겠지만 그 구수한 냄새를 지금도 잊을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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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가루 배급을 타가는 광부 가족(1964년). |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옥수수죽이나 수제비를 많이도 먹었지. 미국이 식량 원조를 해준 거야. 동회나 면사무소 앞뜰에 쌓인 밀가루 포대가 아직도 눈에 선해. 한·미 국기를 배경으로 두 손이 악수하는 장면이 그려진 갈색 포대 말이야. 아버지가 배급받은 포대를 열면 밀가루나 옥수숫가루가 가득 들어 있었어. 어머니는 그걸로 죽이나 수제비를 쑤고 찐빵도 만들어주셨지. 그때의 찐빵 맛은 요즘 무슨 베이커리 빵 저리 가라야. 밀가루가 배급되자 물로 끼니를 때우던 친구들도 점점 줄어들었지. 하지만 1960년대 초까지도 식량난이 극심했던 것 같아.
“진지 잡수셨습니까?”, “밥 먹었니?”
구보 씨가 10대 때는 어른이나 친구를 만나면 늘 이렇게 인사했어. “안녕하세요?”는 그다음 문제였지. 끼니 걱정이 없을 때나 하는 인사법 아니겠어? 정부에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66)을 추진하자 식량 문제는 좀 나아졌던 것 같아. 그런데도 해마다 흉작이 계속되었어. 여전히 쌀이 부족할 수밖에. 그래서 귀한 쌀밥을 ‘옥(玉)밥’이라고도 했어. 생일이나 제사 때 겨우 쌀밥 구경하는 집도 많았으니까. 그러자 정부에서는 혼·분식을 하라고 강조했지.
“복남이네 집에서 아침을 먹네. 옹기종기 모여 앉아 꽁당보리밥.~~보리밥 먹은 사람 신체 건강해.”
이건 ‘혼·분식의 노래’ 가사야. 구보 씨가 서른에 접어들어 가정을 꾸리던 1960년대 중반부터 시작해서 1970년대 내내 전국 학교에서는 이 노래를 불렀어. 쌀만 먹지 말고 반드시 보리를 섞어 먹어야 한다고 했지. 모든 음식점에서는 밥에 25% 이상의 보리쌀 등 잡곡과 면류를 25% 이상 혼합해 팔아야 했고, 학교에서는 점심시간마다 쌀밥에 보리 등 잡곡이 25% 이상 섞여 있는지 도시락 검사를 했어. 혼·분식을 안 하면 점수를 깎는 일도 있었으니까. 정부에서는 혼·분식이 애국의 길이라고까지 강조했으니, 지금 정부에서 하는 쌀 소비 촉진 운동을 보면 구보 씨는 만감이 교차하지. 정말 세상 좋아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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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양 컵라면 광고 포스터(1972년). |
라면 맛은 첫 키스의 추억과도 같았지. 구보 씨가 알아본바 1963년 일본에서 기술을 도입해 개발한 ‘삼양라면’이 우리나라 라면 제품 1호야. 정부의 혼·분식 장려 정책에 딱 맞아떨어졌고, 개당 가격이 10원이라 인기가 정말 대단했지. 밥을 대신할 대중 식품으로 떠오른 거야. 점점 저 지긋지긋한 ‘보릿고개’를 벗어나기 시작하더니 1971년에 통일벼가 개발되어 쌀 수확량이 엄청 늘어났어. 그래서 쌀밥도 마음대로 먹을 수 있었고, 이런저런 밀가루 음식도 같이 먹었지.
양보다 질 추구하는 세태…어머니 손맛 정말 그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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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의 혼· 분식 장려에 따른 급식 장면(1977년). |
그리피스(W.E. Griffis)가 쓴 <은둔의 나라 한국>(1882)이라는 책 제목을 들어본 적이 있을 거야. 그 책에서는 한국인의 대식(大食) 습관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어. “밥 많이 먹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며, 잔치의 평가는 음식의 질이 아니라 양에 있다. 말을 하다가는 한입 가득 먹을 수 없어 식사 중 거의 말이 없다. 조선 사람들은 언제든지 먹을 준비가 돼 있다.”
음식의 양보다 질을 추구하는 요즘 세태에 비춰보면 구보 씨는 놀라울 뿐이야. 고칼로리 음식을 자주 먹다 보니 이제 우리는 비만을 걱정하게 된 거야. 1990년대 후반부터는 동서양의 재료와 조리법을 섞어 만든 ‘퓨전’ 요리가 유행하더니 푸드 스타일리스트라는 직업까지 등장했어. 퓨전 요리로도 부족해서 이제는 ‘웰빙’ 요리야. 어떻게 하면 살이 안 찌면서도 맛있게 먹을까를 궁리하는 거지. 자연식과 전통식에 대한 관심이 정말로 대단한 것 같아.
우리가 그만큼 발전한 거야. 그런데 보리밥과 짠지만 먹고 자라던 구보 씨 입장에서는 다 좋은데 아쉬운 구석이 딱 하나 있어. 외식을 자주 하다 보니 ‘복남이네 집’처럼 가족끼리 옹기종기 모여 앉아 밥 먹는 자리가 점점 줄어든다는 거야. 외식이 편하긴 하지만 좋은 식재료를 골라 정성껏 음식을 만들던 우리 고유의 부엌문화가 사라지는 것 같아서 말이야. 생각해보면 없는 살림에도 어떻게든 맛있게 밥상을 차리려고 있는 정성 없는 정성 다 쏟으신 어머니는 최고의 푸드 스타일리스트셨어. 구보 씨는 어머니의 그 손맛이 정말 그리워.
글 · 김병희 (서원대 광고홍보학과 교수·전 한국PR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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