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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스플레인에서 걸스플레인으로

2018.04.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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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이나 버스 안에서 또는 음식점에서 부부나 남녀 간 대화를 유심히 들어본 적이 있는가. 십중팔구까진 아니더라도 비슷한 현상을 자주 볼 수 있다. 대체로 남자가 여자 말을 가로막고 말한다. “그게 아니고…그건 말이야…” “당신, 이거 알아?” “아니, 그것도 몰랐단 말야?” “가만있어봐. 오빠가 설명해줄게”
 
여성이 얌전하게 경청하거나, “아, 그런 거구나”라고 맞장구를 쳐주거나, “역시 우리 오빠가 똑똑해”라고 대꾸해주면 남자는 더 득의양양해진다. 목소리 톤은 계속 올라간다. 그런데 참다 못한 여자가 “그건 나도 아는데”라고 시큰둥하게 대꾸하면 남성은 잠시 정색을 하고 “아니, 그러니까… 그게 말이지”하면서 자신이 아는 지식을 총동원한다. 한국에 유독 많이 존재하는  ‘오빠’와 ‘아빠’들이다. 

나도 아내와 TV 시사 프로그램을 볼 때 그런 버릇이 있다. 당연히 아내는 정치 뉴스에 어두울 거라 생각하고, 내 딴에는 아내의 이해를 돕기 위한 (진짜) 선의로 백그라운드 브리핑을 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게 어쩌다 한두 번이라면 괜찮은데, 반복하다 보면 그 결과는? 짐작하는 바다. 그걸 피하려다 생긴 버릇이 TV 뉴스를 보면서 (마치 들으라고 하는 듯) 독백하는 거다.
 
대합실에서 차를 기다리거나 음식점에서 혼자 밥을 먹으며 TV 뉴스를 보는 중년 남자들을 한번 보라. 뭔가 자꾸 중얼거리는 사람이 분명히 있다. 대화 상대가 없는데도 말이다. 칭찬이든(칭찬은 거의 안 하지만) 비판이든 비난이든 자기 생각을 내뱉는다. 할 말이 없으면 “세상 참 말세야” “쳐 죽일 년놈들”이라고도 욕을 해야 직성이 풀린다.        

이제는 많이 알려진 용어가 됐다. ‘맨스플레인(mansplain)’이란 단어다. ‘남자(man)’와 ‘설명하다(explain)’를 결합한 단어다. ‘남성이 여성에게 거들먹거리거나 잘난 체하며 설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용어는 나온 지가 좀 됐지만, 미국의 저명한 페미니스트 리베카 솔닛이 쓴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2015년 국내 출간, 원제 ‘Men Explain Things To Me’)라는 책에 언급하면서 널리 퍼졌다. 책이 나온 2010년에 뉴욕 타임스가 ‘올해의 단어’로 선정했고, 2014년에는 옥스퍼드 사전 온라인판에 등재됐다. 이 책은 여러 언론사가 ‘올해의 책’으로 선정했다.

칼럼에 언급된 리베카 솔닛의 저서.
칼럼에 언급된 리베카 솔닛의 저서.

작가는 책에서 자신의 에피소드를 소개하며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남녀 간 대화 방식이 실은 거대한 구조적 폭력의 씨앗이라고 말한다. 남자들은 왜 그토록 아는 척을 하고 설명하려고 들까?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 바탕에는 남성의 권력, 남성 우월적 문화, 사내의 자존심, 남성의 책무에 대한 가부장적 인식, 여성은 그것에 대해 무지할 거라는 전제가 무의식적으로 깔려있기 때문이다. 여성의 존재를 무시하거나 여성의 발언을 인정하려들지 않는 이런 태도가 여성의 침묵을 강요하고 여성혐오와 여성비하, 더 나아가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지는 젠더불평등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내 세대의 남자들은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여자가 주장을 내세우면 “설친다, 드세다, 피곤한 여자다”라는 소리를 들었다. 여학교 교훈에 가장 많이 등장한 덕목은 ‘정숙(貞淑)’이었다. 그런 마초적 토양에서 성장한 남자들이 바로 오늘날의 ‘꼰대’고 ‘개저씨’가 됐다.

솔닛은 후속작 격인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2017년 국내 출간, 원제 ‘The Mother of All Questions’)라는 책에서는 여성의 삶과 말에는 일종의 ‘정답’이 강요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남성은 그들이 생각하는 여성성이나 여성적 가치에 부합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자꾸 묻고 유도한다는 것이다. 여성은 남성과 동일한 인간 개체가 아니라, 어떤 지위나 상황에 있든 결국은 ‘여자’로 환원되게끔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여성의 역사는 ‘침묵의 역사’였다고 단언한다.

‘맨스플레인’은 결국 뒤집어보면 여성 발언권의 상실과 결핍을 말하는 것이다. 그 사실을 비로소 우리 모두에게 상기시켜주는 매우 절묘한 조어다. 2016년 봄 강남역 10번 출구 살인사건이 촉발한, ‘#살아남았다’는 여성들의 분노의 외침은 사실상 최초의 집단적 ‘걸스플레인’이었다. 여혐의 전선인 일베와 대척점에 있는 여성들의 남혐 사이트 메갈리아는 ‘미러링(mirroring)’을 전략으로 삼는다. 남성의 언어 문법에 대해 그 방식 그대로 되갚아주는 복수다. ‘김치녀’가 ‘한남충’으로, ‘된장녀’는 ‘강된장남’으로 둔갑하는 것이다.
 
미투 운동이 확산되며 ‘미투플레인’이란 말이 여성운동가들 사이에 등장했다. 남성의 잣대로 미투를 여성에게 설명하려 들거나 ‘진짜 미투’와 ‘가짜 미투’를 판정하려는 태도를 비판한 말이다.

처음에는 남성들이 미투에 꼬리를 내리고 침묵했다. 이어 소통과 회의 공간에서 여성을 배제하는 ‘펜스 룰(Pence Rule)’로 방어막을 치더니 이제는 서서히 미투에 대한 목소리를 높여가고 있다. 객관적 관찰자인 양 하면서 가해자 입장에서 변명해주고, 상황에 대한 자의적 해석을 내리고, 피해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다 믿을 수 없다는 투다. 전문가들은 남성의 이런 심판자적 자세가 미투의 취지와 본질을 흐리고 2차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미투를 남녀대결 국면으로 오도할 수도 있다.

진정 미투 운동을 지지하는 남성이라면 지금은 경청해야 할 때다.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공감해야 한다. 남자들은 그동안 충분히 읊어대고 짖어댔다. 이제는 걸스플레인이 필요한 시점이다. 사실 너무 늦었다. 여자들은 이제 막 입을 뗐다. 너무 오랫동안 참고 참았다.

내 나이쯤 되면 이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남자는 자고로 여자의 말을 잘 들어야 만사형통한다고. 특히 세 여자의 말, 어머니 아내 그리고 내비양(내비게이션 안내).

한기봉

◆ 한기봉 언론중재위원/칼럼니스트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부국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로 글쓰기와 한국 언론에 대해 강의했다. 언론보도로 피해를 본 사람과 언론사 간 분쟁을 조정하는 언론중재위원이다. hkb82107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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