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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모차르트와 리스트가 데뷔한 뒷골목

[정태남의 클래식 여행]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Bratislava)

2022.02.03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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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바키아는 지리적으로 보면 유럽의 심장부에 위치한 내륙국가로 역사적, 문화적 관점으로 보면 이웃 나라인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와 공유하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

사실 이 나라들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1918년까지 몇 세기 동안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합스부르크 제국에 속한 ‘한 가족의 나라’였으며, 체코는 오스트리아가, 슬로바키아는 헝가리가 관할했다. 슬로바키아의 수도 브라티슬라바(Bratislava)는 당시 독일어로는 프레스부르크(Pressburg), 헝가리어로는 포조니(Pozsony)였다.

브라티슬라바 시가지의 심장인 중앙광장.
브라티슬라바 시가지의 심장인 중앙광장.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약 60킬로미터 정도 거리에 위치한 브라티슬라바는 이런 역사적 배경과 지리적 위치 때문에 헝가리의 입김이 강한 곳이면서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의 외곽도시 같은 성격을 띄고 있었다.

브라티슬라바 시가지의 심장은 중앙광장이다. 이 광장에서 한 블록 서쪽에 있는 미할스카, 즉 ‘미하엘 거리’는 브라티슬라바에서 가장 예쁜 골목길로 손꼽힌다. 이 길은 조금 더 넓고 우아한 벤투르스카(Ventúrska) 거리와 직선으로 이어진다.

벤투르스카 거리의 팔피 궁(오른쪽)과 데 파울리 궁(왼쪽).
벤투르스카 거리의 팔피 궁(오른쪽)과 데 파울리 궁(왼쪽).

벤투르스카 거리의 첫 번째 황갈색 건물은 데 파울리(De Pauli) 궁이다. 이 건물은 현재 브라티슬라바 대학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건물은 한 어린 천재 피아니스트가 생애 첫 독주회를 가졌던 장소이다.

그의 이름은 독일식으로는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헝가리식으로는 리스트 페렌츠(Liszt Ferenc)이다. 그는 쇼팽과 함께 19세기 전반에 유럽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뛰어난 기교를 자랑하던 피아니스트였으며 37세 이후부터는 연주가보다는 작곡가로 활동하면서 수많은 피아노 명곡과 오케스트라 명곡을 남겼다. 국제적 명성을 얻은 그는 19세기 유럽 음악계를 주름잡는 황제나 다름없었다.

데 파울리 궁 외벽에 부착된 청동 명판에는 리스트의 옆모습과 슬로바키아어로 된 문구가 있다. 이 문구를 번역하면 “9살에 이 연주회를 발판으로 개선의 길을 걷기 시작하다”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 연주회는 소년 리스트가 데 파울리 궁에서 가진 데뷔 연주회를 말한다. 그리고 ‘개선의 길’이란 리스트가 음악가로서 대성공의 길을 가게 된 것을 말한다. 사실 소년 리스트가 이곳에서 가진 독주회는 그의 미래를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데 파울리 궁. 왼쪽 벽에 리스트 기념명판이 보인다.
데 파울리 궁. 왼쪽 벽에 리스트 기념명판이 보인다.

리스트는 현재 오스트리아 영토 안에 있는 라이딩(Raiding)이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서 210년 전인 1811년 10월 22일에 태어났다. 당시 라이딩은 행정상으로는 헝가리 관할 지역이었고 헝가리 지명은 도보랸(Doborján)이었다. 이런 연유로 그를 헝가리 음악가라고 한다. 그의 아버지 아담 리스트는 헝가리 귀족 에스테르하지 후작의 토지 관리인으로 일하면서 후작의 궁정 오케스트라에서 첼로를 연주하곤 했다.

어린 리스트는 여섯 살 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자마자 신동으로 주목받다가 아홉살이 되던 1820년 11월 26일에 데 파울리 궁에서 정식 데뷔 연주회를 가졌는데, 당시 이 음악회를 보러 이 도시의 귀족이란 귀족은 모두 참석했다. 어린 리스트는 몇몇 귀족이 내민 난해한 곡의 악보도 그 자리에서 거침없이 연주하여 참석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연주가 끝난 후 그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완전한 음악 교육을 시킬만한 재정적 여유가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귀족들은 즉시 기부금을 모았고, 더 나아가 6년 동안 그를 후원하기로 했다. 이에 힘입어 그의 아버지는 고정된 급료를 받는 일자리를 아예 포기하고 어린 아들의 장래를 위해 고향을 떠나 제국의 수도 빈으로 이주했다.

빈에서 리스트를 처음 가르쳐본 체르니는 그가 장차 위대한 피아니스트가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용기를 북돋워 주며 무료로 레슨을 해주었다. 리스트는 나중의 엄청난 국제적인 명성을 누렸으니, 체르니의 말은 빈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만약 어린 리스트가 이곳 귀족들의 후원을 받지 못했더라면, 또 아버지의 과감한 결단이 없었더라면, 또 스승 체르니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과연 ‘개선의 길’을 제대로 걸을 수 있었을까?

1762년, 6살의 모차르트가 팔피 궁에서 연주한 것을 기념하는 명판.
1762년, 6살의 모차르트가 팔피 궁에서 연주한 것을 기념하는 명판.

데 파올리 궁에서 남쪽으로 약 100미터 쯤 가면 팔피(Pálffy) 궁을 볼 수 있다. 이 바로크 풍의 건물은 1747년에 헝가리 백작 레오폴트 팔피가 세운 것인데, 슬로바키아가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분리되어 독립한 해인 1993년부터 2012년까지 오스트리아 대사관으로 사용되었다. 이 건물 입구 벽면에는 1762년 모차르트가 여섯 살 때 이곳에서 연주했다는 명판이 보인다. 그러니까 리스트가 데 파울리 궁에서 데뷔한지 약 60년 전의 일이었다.

어린 모차르트는 1762년 10월 13일 빈의 쇤브룬 궁전에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를 포함한 황실가족과 대신들 앞에서 처음 연주했고, 약 두 달이 지난 다음 이곳 헝가리 귀족들의 요청으로 12월 11일 이곳에 와서 ‘프레스부르크 데뷔’ 연주회를 가졌던 것이다. 이 연주회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어린 모차르트는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개선장군처럼 대대적인 환호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벤투르스카는 음악사에서 ‘개선의 길’을 걸은 두 명의 대 음악가가 어릴 때 데뷔한 아주 특별한 뒷골목인 셈이다.

정태남

◆ 정태남 이탈리아 건축사

건축 분야 외에도 음악·미술·언어·역사 등 여러 분야에 박식하고, 유럽과 국내를 오가며 강연과 저술 활동도 하고 있다.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동유럽 문화도시 기행>, <이탈리아 도시기행>, <건축으로 만나는 1000년 로마>,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 외에도 여러 저서를 펴냈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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