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6월 근로복지공단 대전병원(이하 대전병원) 재활전문센터. 보조장치에 몸을 의지한 한 환자가 떨리는 다리로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몇 걸음을 채 떼지 못해 숨을 고르자 치료실 안에 긴장감이 돌았다.
"잘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물리·작업치료사의 격려에 환자는 다시 이를 악물었다. 다른 한쪽에서는 또 다른 환자가 굳은 손의 감각을 되찾기 위해 작은 블록을 쥐었다 놓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재활기구가 움직이는 소리, 치료사들의 응원, 그리고 포기하지 않으려는 환자들의 의지가 한 공간 안에서 뒤섞였다.
이들에게 재활은 단순히 신체기능을 회복하는 치료가 아니다. 사고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기 위한 치열한 여정이다.
산업재해는 예고 없이 찾아온다. 한순간의 사고는 한 사람의 일상과 미래를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치료와 재활은 길고 그 과정에서 경제적 부담과 심리적 위축, 사회적 고립감까지 감당해야 한다. 회복이 더딜수록 '다시 예전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도 커진다.
때문에 산업재해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치료만이 아니다. 다시 삶을 이어갈 수 있다는 희망, 자신을 믿을 수 있는 용기를 되찾는 일이다.
2026년 대한민국 산재간호대상 수상자인 김시영 간호사는 지난 34년 동안 그 여정을 함께해왔다. 병상에서 처음 환자를 만난 순간부터 재활치료, 사회 복귀를 준비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환자들의 곁을 지키면서 수많은 도전과 변화를 지켜봤다. 치료 의지를 잃은 환자를 격려하고 작은 회복에도 함께 기뻐했으며 때로는 가족들의 고민까지 귀 기울였다. 그에게 간호는 상처를 돌보는 일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이 다시 제자리를 찾아갈 수 있도록 돕는 과정이었다. 환자들이 다시 일상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도록 한결같이 곁을 지켜온 김 간호사를 만났다.
2026 산재간호대상 수상자가 됐다.
최종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전화를 받고도 쉽게 믿기지 않았다. 수상자 명단을 다시 확인하고 나서야 실감이 났다. 그동안 간호사로 근무하면서 대전병원장상과 근로복지공단 이사장상을 수상한 경험이 있지만 이번 산재간호 분야에서 상을 받은 것은 처음이다. 34년 동안 현장에서 묵묵히 걸어온 시간을 인정받은 것 같아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산재간호라는 분야가 낯설다. 일반 간호업무와 어떤 점이 다른가.
산재간호는 산업재해를 겪은 근로자가 다시 일상생활과 직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회복 전 과정을 도와주는 것이 핵심이다. 산재 환자는 치료 기간이 길고 재활이 필요한 경우가 많아 신체적 회복뿐 아니라 심리적 안정까지 함께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의료진은 물론 재활치료사, 사회복지사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와 협력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단순히 치료를 돕는 데 그치지 않고 환자가 다시 자신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끝까지 함께한다는 점이 산재간호의 가장 큰 특징이다.
산재간호사가 되려면 별도의 자격이 필요한가.
산재간호를 수행하기 위해 일반 간호사와 다른 별도의 자격증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간호사 면허를 취득한 뒤 산재 환자를 돌보며 전문성을 쌓아가면 된다. 우리 병원은 산재전문병원인 만큼 다양한 산재 환자를 접할 기회가 많아 관련 경험과 전문성을 자연스럽게 쌓을 수 있는 환경을 갖추고 있다. 또 산재간호대상이라는 명칭 때문에 산재간호만 전담하는 간호사에게 주는 상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이 상은 근로복지공단이 1991년 제정한 '나이팅게일상'이 2024년 산재간호대상으로 바뀐 것이다. 간호 전문성 향상에 기여한 우수 간호사라면 모두가 자격이 있다.
응급실과 중환자실에서 근무한 경험이 산재 환자를 이해하는 데 영향을 미쳤나.
1992년 입사할 당시 대전병원에서 중환자실 운영이 본격화되면서 중환자실과 응급실을 중심으로 근무했다. 생명을 다투는 현장에서 수많은 환자를 돌보며 치료와 처치만큼 중요한 것이 환자와 보호자의 불안을 이해하고 다독이는 일이라는 것을 배웠다.
회복 과정을 지켜보면서도 신체적 치료만으로는 온전한 회복이 이뤄질 수 없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꼈다. 환자가 다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하는 일 역시 의료진의 중요한 역할이었다.
코로나19 초기에는 현장 지원에 참여했다. 당시에는 감염에 대한 두려움이 워낙 커 확진 자체를 낙인처럼 받아들이는 분위기도 있었다. 환자들이 심리적으로 크게 위축되는 모습을 보며 의료진의 정서적 지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산재 환자를 대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이 있다면.
산재 환자는 사고 이후 신체적 고통뿐 아니라 직장 복귀와 생계 문제, 가족에 대한 책임감까지 함께 짊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진료나 처치 과정에서도 환자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으려고 한다. 지금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가장 걱정하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재활이 길어질수록 불안은 커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경과와 향후 치료 계획을 자세히 설명드리고 환자가 치료 과정을 믿고 따라올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보호자와의 소통도 중요하다. 가족이 환자의 상태를 함께 이해하고 지지할 수 있어야 회복도 빨라진다고 믿는다.
산재 환자를 위한 맞춤형 회복 프로그램도 운영해왔다.
2017년부터 프로그램 운영에 본격적으로 참여했다. 당시에도 여러 재활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었지만 환자의 특성과 회복 단계에 맞게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표준화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프로그램 내용을 보완하고 교육 자료와 안내 책자를 만드는 등 운영 기반을 다지는 일부터 시작했다.
회복 프로그램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나.
산재 환자의 치료부터 사회 복귀까지 전 과정이 포함된다. 사고 직후에는 응급치료와 수술 등 병원 내 치료 또는 상급의료기관과의 연계를 통해 급성기(초기) 치료를 받게 된다. 상태가 안정되면 본격적인 재활치료에 들어간다. 환자의 상태에 따라 8주에서 12주 정도 집중재활을 진행하고 신체기능 회복뿐 아니라 직장과 사회 복귀 가능성을 평가하는 프로그램도 함께 진행된다. 개인차는 있지만 대부분 6개월 이상 장기적인 관점에서 치료와 재활이 이뤄진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산재 환자가 있다면.
2020년 출근길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은 환자가 대전병원으로 전원 온 적이 있다. 여러 차례 대수술을 받았고 뼈이식과 피부이식, 발목고정술까지 시행해야 할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다. 의료진도 정상적인 보행이 쉽지 않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처음 병원에 왔을 때는 침상 생활도 버거웠다. 하지만 꾸준한 치료와 재활을 통해 휠체어를 타게 됐고, 다시 목발 보행을 통해 마침내 스스로 걸을 수 있을 만큼 회복했다. 그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며 재활은 기적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는 시간의 결과라는 것을 느꼈다. 회복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끝까지 환자 곁을 지키는 간호사가 되고 싶다.
산재 환자를 돌보면서 산업안전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을 것 같다.
병원을 찾는 산재 환자의 사고 유형은 정말 다양하다. 건설 현장이나 제조업 현장에서 발생한 추락·끼임 사고부터 교통사고, 반복 작업으로 인한 근골격계 질환까지 원인도 각각이다. 환자를 가까이에서 만나면서 산업 현장의 안전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실하게 느낀다. 예기치 못한 사고도 있지만 환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기본적인 안전수칙만 지켰어도 막을 수 있었던 경우가 적지 않다. 치료와 재활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고 예방을 위한 사회적 관심과 안전 문화의 정착이다. 산재 환자를 돌볼수록 '다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치료'라는 말을 실감한다. 더 안전한 대한민국이 되길 항상 바란다.
34년 동안 현장을 지켜온 원동력은 무엇이었나.
간호사는 환자를 돌보는 직업이지만 현장에서는 동료 간호사들과의 협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3교대 근무 환경에서 서로의 컨디션과 업무 상황을 이해하고 업무를 이어받는 과정이 반복되기에 동료 간의 신뢰가 곧 환자 안전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현장을 지킬 수 있었던 것도 힘든 순간마다 서로를 지지해준 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간호사로 근무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환자에게는 물론 동료와 후배들에게도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싶다. 힘들다는 이유로 사명감을 잃지 않는 동료가 되기 위해서도 계속 노력하겠다.
그와 인터뷰를 마치고 "다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치료"라는 한마디가 오래 남았다. 병원은 사람을 치료하는 곳이지만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는 곳이기도 하다. 김 간호사처럼 긴 회복의 시간을 묵묵히 지켜온 사람들이 있기에 오늘도 누군가는 다시 일상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디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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