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굽다리접시(고배) 하나를 제대로 그리려면 꼬박 반나절이 걸렸습니다."
문화유산 발굴조사가 끝나면 조사기관은 출토 유물의 형태와 크기, 단면 등을 실제 치수에 맞게 그린 '실측도면'을 발굴조사 보고서에 남긴다. 사진만으로는 담기 어려운 유물의 구조와 특징을 기록하는 작업이다. 문제는 이 과정이 오롯이 사람의 손에 의존한다는 것. 유물의 형태와 두께, 단면과 곡선을 일일이 측정해 도면으로 옮겨야 한다. 숙련된 전문가도 유물 한 점을 완성하는 데 4시간 이상이 걸린다.
오랜 시간과 전문인력이 필요한 실측 작업에 첨단기술을 끌어들인 기업이 있다. 문화유산 디지털 기록 솔루션 기업 '캐럿펀트'다. 동국대학교 WISE캠퍼스에서 고고미술사학을 전공한 이건우 대표는 대학 시절 직접 유물을 실측하며 기존 방식의 한계를 절감했다. 고고학 연구에도 디지털 기술을 접목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2017년 캐럿펀트를 창업했다.
캐럿펀트는 국가유산청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이 추진한 국가 연구개발(R&D) 사업에 참여해 3차원 시각화 기술을 적용한 문화유산 전문 실측 소프트웨어 '아치(ARCH) 3D 라이너'를 개발했다. 3D 스캔 데이터를 분석해 유물의 시대와 재질, 형태를 자동으로 인식하고 다양한 각도에서 분석하기 쉬운 이미지를 생성한다. 4시간 이상 걸리던 작업을 약 16분으로 줄였다.
기술력을 인정받아 4월 '한국형 노벨상'으로 불리는 'IR52 장영실상'을 수상했다. 앞서 산업통상부와 국가기술표준원의 NEP(신제품) 인증을 획득했고 'CES 2025 혁신상'도 수상했다. 캐럿펀트의 기술은 문화유산 기록 방식을 어떻게 바꾸고 있을까. 부산에서 열린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로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이 뜨거운 요즘, '아치 3D 라이너'를 개발한 이 대표에게 개발 배경과 기술 원리, 그리고 문화유산 기록의 미래를 물었다.
'아치 3D 라이너'는 어떤 소프트웨어인가요.
한마디로 말하면 유물 한 점의 실측도면을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을 4시간에서 약 16분으로 줄여주는 소프트웨어입니다. 우리나라는 건설 공사에 앞서 매장문화유산 발굴조사를 의무적으로 진행합니다. 매년 10만~16만 점의 유물이 출토되는데, 이 많은 유물을 사람이 일일이 실측하다 보니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듭니다. 그 병목을 해결하기 위해 개발했습니다. 작동방식은 간단합니다. 3D 스캔 데이터를 입력하면 유물의 시대와 재질, 형태 정보를 분석해 연구자가 활용할 수 있는 수준의 실측도면을 자동 생성합니다.
기술이 무엇을 바꿨습니까.
시간과 정확도입니다. 기존에는 사람이 직접 측정하고 도면을 그린 뒤 다시 디지털화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사람마다 해석이 달라질 수 있고 인적 오류도 발생합니다. 반면 3D 스캐너는 0.025~0.05㎜ 수준의 정밀도를 갖고 있습니다. 사람이 육안으로 측정하는 것보다 훨씬 정확한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고 이를 바탕으로 실측하기 때문에 인적 오류도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3D 스캔만 하면 실측도면이 완성되나요. 현장에선 어떻게 사용하나요.
별도의 전용 장비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연구기관에서 사용하는 3D 스캐너로 유물을 360도 스캔한 뒤 데이터를 소프트웨어에 입력하면 됩니다. 스캔에는 보통 5분도 걸리지 않습니다. 저희는 소프트웨어만 서비스합니다. 3D 스캐너는 각 기관이 필요한 장비를 선택해 구매하면 됩니다.
고고학 전공자가 왜 실측 자동화에 뛰어들었습니까.
사실 저는 석사과정까지 고고학을 전공했지만 실측을 잘하지 못했습니다. 유물 하나를 실측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러다 '이걸 기술로 해결할 수는 없을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실측처럼 반복적인 작업은 기술이 대신하고 연구자는 연구와 분석에 더 많은 시간을 쓰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에는 혼자 프로그래밍을 공부했고 이후 엔지니어를 찾아다니며 팀을 꾸려 캐럿펀트를 창업했습니다. 창업은 처음부터 경북에서 하고 싶었습니다. 문화유산이 풍부한 경주와 가깝고 기술 인력을 확보하기 좋은 곳을 찾다 보니 포항이 가장 적합했습니다. 특히 포스텍과 협력하기 좋은 환경이라는 점이 결정적이었습니다.
개발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문화유산 분야는 다른 산업처럼 기존 기술을 그대로 가져다 적용하기 어려웠습니다. 결국 핵심기술을 기초부터 직접 개발해야 했고 '아치 3D 라이너'를 완성하기까지 7~8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 과정에서 국립문화유산연구원과 국립해양유산연구소가 초기 테스트와 검증을 지원해줘 기술을 고도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실측시간을 줄이는 것이 발굴조사를 어떻게 바꿀 수 있습니까.
실측시간만 줄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보고서 작성과 발굴조사 완료까지 걸리는 시간도 함께 단축할 수 있습니다. 매장문화유산법상 발굴이 끝난 뒤 2년 안에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기관도 많습니다. 지금은 실측도면 제작을 자동화하는 단계지만 앞으로 축적된 데이터에 인공지능(AI)과 대규모언어모델(LLM)을 접목한다면 보고서 작성도 훨씬 수월해질 것으로 봅니다.
유물 기록, 어디까지 자동화가 가능한가요.
토기류는 대부분 자동 실측이 가능합니다. 3D 스캔 데이터를 활용해 탁본도 자동으로 생성할 수 있습니다. 기존에는 한지를 대고 먹으로 탁본을 떴지만 이제는 스캔 데이터의 깊이 정보를 이용해 1초도 안 되는 시간에 탁본 이미지를 생성할 수 있습니다. 유물을 한번 스캔하면 실측도면과 탁본을 모두 자동으로 만들 수 있는 수준까지 기술이 발전했습니다.
AI가 모든 유물을 알아서 기록하는 날이 올까요. 아직 넘지 못한 기술의 벽은 무엇입니까.
형태가 매우 특수하거나 분류 자체가 어려운 유물은 자동화가 쉽지 않고, 금속 유물은 녹이 형성되는 방식이 제각각이라 이를 어떻게 해석할지가 중요한 연구 과제입니다. 궁극적으로는 문화유산 기록 전 과정을 자동화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현재는 유물 실측이 중심이지만 금속과 목재 등 다양한 재질의 유물은 물론 유적까지 자동 기록할 수 있도록 기술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장기적으로는 사람이 직접 개입하지 않아도 현장에서 유물을 기록하고 분석할 수 있는 수준까지 발전시키고 싶습니다.
AI가 고고학자 연구까지 대신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실측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데이터를 계속 축적하고 학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데이터가 많아질수록 AI의 판단도 정교해집니다. 처음에는 연구자를 돕는 도구 정도를 생각했는데, 데이터를 학습한 AI가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발전하는 모습을 보면서 놀랐습니다. 지금은 시대와 재질, 형태가 비슷한 유물을 찾아주고 연구자가 어떻게 해석할지까지 예측하는 수준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서로 다른 장소에서 출토된 도자기 파편 두 점이 같은 유물이라는 사실을 AI가 먼저 찾아낸 사례도 있었습니다. 앞으로는 연구 주제를 제안하거나 논문 작성까지 도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아치 3D 라이너'를 사용하는 기관은 얼마나 되나요.
현재 약 66개 기관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서울대학교박물관을 비롯한 대학 박물관 상당수와 국립문화유산연구원, 국립해양유산연구소 등 주요 국립기관에서 활용하고 있습니다. 재단법인 문화유산 조사기관으로도 도입이 점차 확대되고 있습니다.
'IR52 장영실상' 수상은 어떤 의미인가요.
'CES 혁신상'이 기술력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계기였다면 장영실상은 국내 산업기술 분야에서도 기술을 객관적으로 검증받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문화유산 분야의 기술도 국가 산업기술로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문화유산 분야도 충분히 기술 혁신을 이끌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 같아 더욱 뜻깊어요.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현장의 우려는 없었나요.
사업을 시작한 지 9년 정도 됐는데 초기에는 거부감이 훨씬 컸습니다. '고고학은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이라는 인식이 강했고 실측 담당자들은 '일자리가 없어지는 것 아니냐'는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반복 작업을 줄이고 연구에 더 집중할 수 있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인식이 바뀌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장영실상과 CES 혁신상 수상 등 여러 성과가 알려지면서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는 분위기로 많이 바뀌었습니다.
캐럿펀트가 이루고 싶은 목표는 무엇인가요.
고고학은 시장이 작아 다른 기업이 쉽게 뛰어들지 않는 분야입니다. 그래서 기술 발전에서 소외될 위험도 있습니다. 저희는 고고학이라는 특수한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핵심기술을 가진 기업이 되고 싶습니다. 현재 미국과 튀르키예, 사우디아라비아 등에서도 협력 제안이 오고 있습니다. 한국이 반도체뿐 아니라 문화유산 기록 기술에서도 세계 최고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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