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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10]동아시아의 패자, 고구려

임기환 한신대 학술원 교수

2004.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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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서기 전후 무렵에 건국하여 668년에 멸망한 한국의 고대 국가의 하나이다. 전성기인 5세기 경에 그 영역은 북으로는 송화강(松花江: 지금의 중국 길림성) 유역에 미쳤고 남으로는 한국의 한강(漢江) 유역과 경상북도 북부지역에 이르렀으며, 서로는 요하(遼河 : 지금의 중국 요녕성) 서쪽에까지 확장되었고, 동으로는 연해주(지금의 중국 길림성 및 러시아) 지역에 이르렀다. 이러한 넓은 영토를 바탕으로 국력이 강화되어, 5세기 이후에는 동북아시아에서 독자적인 세력권을 구축하고, 중국 왕조와 더불어 동아시아 국제질서을 움직여가는 중심 국가의 하나가 되었다.

국호와 종족 : ‘고구려(高句麗)’라는 나라 이름에서, ‘구려(句麗)’는 성(城)·읍락(邑落) 등을 의미하는 고구려 말이고, ‘고(高)’는 크다는 뜻의 한자어로, 이를 합하여 ‘큰 고을’ 또는 ‘큰 성’이란 뜻으로 쓰인 것으로 추정한다. 5세기 이후에는 고구려를 줄여 ‘고려(高麗)’라고 불렀다. 고구려를 세운 족속은 압록강 중류 유역에 거주했던 맥(貊)족이었다. 이들은 기원전 5-4세기경부터 압록강 중류 지역에서 거주하였으며, 그후 고구려 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부여(夫餘) 방면에서 이주해 온 일부 예(濊)족이 합쳐져 고구려인(人)을 이루었다.

국가의 성립 : 기원전 3세기 무렵부터 철기(鐵器) 문화가 보급되면서 고구려 국가가 성립할 수 있는 사회 기반이 마련되었다. 그런데 한(漢)나라가 고조선을 침략하면서 기원전 107년에 고구려 지역에 현도군(玄ꟙ郡)을 설치하였다. 이 지역 토착 세력인 고구려인은 현도군에 대해 강력하게 저항하였으며, 그 결과 현도군은 점차 요동 지역으로 중심지를 옮겨갔다. 현도군을 몰아낸 뒤 여러 소국(小國)들은 고구려왕을 대표로하는 연맹체 국가를 형성하였다. <<삼국사기>>라는 역사책에는 고구려의 建國 說話가 실려 있는데, 여기에는 주몽(朱蒙)이 부여(夫餘)에서 남쪽으로 내려와서 압록강 유역의 토착세력과 함께 나라를 세운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는 1세기 경 태조왕(太祖王)대에 이르러 고구려족 전체를 통솔하는 보다 강력한 국가로 발전하였다. 지배체제가 정비되고, 왕권을 중심으로 국가 내부의 군사적 동원력이 확대되면서, 대외적인 정복활동과 영역의 팽창도 크게 이루어졌다. 먼저 농산물․해산물 등 물자가 풍부한 동옥저(東沃沮)․동예(東濊) 지역을 복속시키고, 중국 군현(郡縣)에 대한 조직적인 대규모 공격을 지속적으로 수행하였다. 초기 고구려의 성장은 중국 군현 세력을 축출하기 위한 투쟁으로 계속 이어져 있다.

제도 정비와 대외 활동 : 4세기에 접어 들어 고구려는 중앙집권(中央集權)적인 국가 체제를 구축하는데, 특히 소수림왕(小獸林王)대에 율령(律令)이 반포되면서 제도적인 정비를 이루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국력을 기른 고구려는 중국이 ‘5호(胡)16국(國)시대’ 라는 혼란기로 접어들자 이를 이용하여 본격적인 대외 정복활동을 펼쳐 나갔다. 먼저 미천왕(美川王)은 313년에 낙랑군과 대방군(帶方郡)을 정복하여 한반도 내에 있던 중국 군현을 완전히 축출하였다. 비옥한 농경 지대인 낙랑군, 대방군 지역을 확보함으로써 고구려의 국가 발전에 중요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어 고구려는 요동(遼東) 지역으로 진출하여 그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선비족(鮮卑族)인 모용씨(慕容氏)가 세운 전연(前燕)과 치열하게 각축전을 벌였다. 342년에 고구려는 전연의 침입을 받아 수도 국내성이 함락되는 국가적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또 남쪽으로 진출하면서는 백제(百濟)와 공방전을 치루었다. 371년에는 백제가 평양성(平壤城)까지 침공해왔으며, 이 전투에서 국왕인 고국원왕(故國原王)이 전사하는 타격을 입었다.

고국원왕대에 서쪽과 남쪽 방향에서 이루어진 대외 팽창이 거듭 실패하자, 고구려는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새로운 지배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개혁 정책을 펼쳤다. 고국원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소수림왕(小獸林王)은 율령(律令)을 반포하고, 태학(太學: 최고 수준의 교육기관)을 설립하였으며, 불교(佛敎)를 받아들여 널리 보급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로써 고구려는 보다 안정되고 강력한 집권적 지배체제를 수립할 수 있었다.

독자적 세력권의 구축 : 이러한 체제 정비를 시도한 개혁이 성공을 거둔 뒤에 그 뒤를 이은 광개토왕과 장수왕이 비약적인 대외 정복활동을 펼칠 수 있었다. 광개토왕때 고구려는 서쪽으로는 선비족 모용씨가 세운 후연(後燕)을 제압하며 요동(遼東)을 장악하였고, 동북으로는 숙신(肅愼)과 동부여(東夫餘)를 정복하고 북으로 부여(夫餘)를 병합하여 남만주 일대를 차지하였다. 또 남쪽으로는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유역 일대까지 세력을 뻗쳤으며, 신라(新羅)에 대해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어 장수왕때에는 평양(平壤)으로 수도를 옮기고 본격적인 남진책을 추구하여 한반도 중부 일대를 완전히 손에 넣었으며, 서쪽으로는 요하(遼河)를 건너 요서(遼西)를 사이에 두고 북위(北魏)와 힘을 겨루었다. 그리고 유연(柔然)과 동맹하여 만주 서북쪽에 자리잡은 유목 종족인 지두우(地豆于)을 분할 점령하여 지금의 흥안령 산맥에 이르기까지 세력을 뻗쳤다. 또 요하 상류의 거란(契丹)도 대부분 복속시켰다.

이처럼 광대한 영토를 개척하고 지배하면서 고구려의 국력은 강대해져 동북아시아에서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하였다. 더욱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는 중국이 남북조(南北朝)로 나뉘어 대립하고, 북방에서는 유목 국가인 유연(柔然)이 세력을 떨치며, 여기에 고구려가 하나의 세력권을 형성하는 다원적인 세력 균형 상태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하여 5세기 중반 이후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면모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추세 속에서 고구려도 국경을 맞대고 있는 북위(北魏)는 물론, 남조(南朝)와 북방의 유연과도 다각도의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다.

아울러 이러한 대외관계에 힘입어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는 물론 중앙아시아 지역과도 교류함으로써 문화적으로도 다양한 제반 문물의 수용 속에서 독자적이면서도 국제성이 풍부한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 시기 고구려의 융성과 국제 사회에서의 위치는 고구려인의 국가 의식에 반영되어 있다. 즉 지금까지 남아있는 고구려의 비문인 <광개토왕릉비>와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의 내용을 보면, 고구려는 스스로 천하(天下)의 중심 국가임을 자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대의 변동 : 6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고구려는 대내외적으로 새로운 변화의 국면을 맞게 되었다. 먼저 대내적으로는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장기간에 걸쳐 귀족세력 사이에 치열한 정쟁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귀족세력의 어느 한 파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일정한 타협 아래 연합정권을 구성하였다. 이러한 귀족연립 정권은 말기까지 계속되는데, 이는 최후의 집권자였던 연개소문(淵蓋蘇文) 역시 군사를 일으켜 반대파 귀족들을 숙청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와같은 대내적인 정국의 변화 속에서 고구려는 대외적으로도 여러 차례 위기를 맞게 되었다. 먼저 551년(陽原王 7년)에는 백제와 신라가 동맹하여 고구려의 혼란한 내분을 기회로 기습 공격해오자 이들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기고 말았다.

한편 대륙의 국제 정세도 변화하였다. 580년에 건국된 수(隋)나라가 589년에는 남조 진(陳)나라를 정복하여 3백여 년간 분열되었던 중국을 통일하였다. 중국에서의 통일 정권을 수립한 수나라는 중국 중심의 일원적인 국제질서로의 재편을 기도하였다. 먼저 북방을 차지하고 있던 돌궐을 격파하였고, 서역도 평정하였다. 마침내 동쪽의 고구려에 대해 4차례에 걸친 침공을 계속하였다. 특히 612년에는 수양제(煬帝)가 100만 명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였으나, 고구려는 이를 격퇴하였다.

멸망과 계승 : 수의 뒤를 이은 당(唐) 역시 북방과 서역을 장악한 이후에는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당나라도 수와 마찬가지로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세우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양면 공격에 시달리던 신라는 당과 군사 동맹을 맺게 되고, 이에 따라 당과 신라의 동맹 세력이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재편을 시도하게 되었다. 645년(寶藏王 4년) 당나라 태종(太宗)은 대규모 군대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마침내 안시성(安市城)에서 전투의 패배로 실패하였다.

그러나 오래 계속된 전쟁으로 고구려의 국력도 서서히 피폐해졌다. 그리고 660년에 신라와 당의 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가 멸망하게 되자, 고구려는 고립되었다. 특히 한반도 남쪽에서 군사 기지를 확보하게 된 당군이 평양성을 공격하게 되자 고구려는 남북 양쪽에서의 협공에 시달리게 되었다. 더욱 정권 장악으로 둘러싸고 내분이 일어나면서 결정적으로 국력이 약화되었다. 그리하여 668년에 마침내 나당연합군에 의해 평양성이 함락되어 고구려는 멸망하고 말았다. 약 7백년 동안 한반도와 만주지역에 걸쳐 강대한 국가와 찬란한 문화를 건설했던 고구려의 역사는 유민들과 함께 신라와 발해로 나뉘어 계승되었다.

기고: 임기환(한신대 학술원교수)

제공:해외홍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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