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굴암은 여러 차례에 걸쳐 수리와 보수가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 의하면 숙종 29년(1703)에 종열(從悅)이, 영조 34년(1758)에는 대겸(大謙)이 석굴암을 중수했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 말기에 울산병사 조예상(趙禮相)에 의해 크게 중수되었으나 세인에 잊혀졌다가 1909년에 우연히 발견된다. 당시의 자료에 의하면 "천장 3분의 1이 이미 추락하여 구멍이 생겨 그 구멍에서 흙이 들어오고 있어 그대로 방치할 경우 모든 불상이 파손될 위험이 있다"고 적혀 있을 정도로 보존 상태가 극히 불량하였다. 특히 본존불의 코는 깨지고 연화대도 심하게 갈라지고 깨져 있었다.
석굴암이 발견된 이듬해인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마자 석굴암의 조각상들을 일본으로 반출하려고 획책했다. 그러나 이들의 음모를 눈치챈 현지 관리가 석굴암 반출을 거절하자 총독 데라우치가 현지를 시찰하고 석굴암을 제자리에 두되 현지에서 보수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이때부터 석굴암의 수난은 시작된다. 우선 석굴암 보수에 동원된 인력들이 모두 기차철로를 부설하는 토목기술 인력이었다. 당연하게 그들은 기차 철로의 터널처럼 석굴을 수리하겠다는 원칙을 세우고 1913년 10월부터 석굴 천장 부분에 목제 가구(假構)를 설치하여 해체공사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1914년에는 본 공사에 들어가 석굴을 완전히 해체하고 1915년 9월에 공사를 끝냈다. 이때 석벽을 보강하기 위해 석벽 뒤에 시멘트를 석 자나 발랐다. 그러나 1917년 누수 현상과 습기 등으로 바닥과 천장 위로 물이 스며들기 시작하자 일본인들은 1920년부터 1923년까지 천장의 방수를 위해 대대적으로 재보수공사를 실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습기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1927년에는 푸른 이끼를 없애기 위해 증기 세척을 했다.
해방 후에도 1947년, 1953년, 1957년에 고온 증기를 사용하여 불상을 세척했다. 당시는 불상을 몇 년마다 닦아주는 것을 최상의 보존방법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돌의 가는 입자가 떨어지는 등 훼손이 계속되자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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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의 제1차 보수장면. |
그 후 1961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대대적인 보수공사에 착수하였지만 근본적인 처방 없이 일본인들이 만든 콘크리트벽 배후로 약 1미터 가량의 공간을 두고 또다시 콘크리트로 된 돔을 씌우고 그 위에 미봉책으로 두터운 봉토(封土)를 덮었다. 더구나 개방되어야 할 석굴 전면에 목조 암자를 설치하면서 광창과 소감실 창구를 모두 없애버리고, 지하수 배수시설을 설치했다. 그러나 학자들의 예상과는 달리 습기 문제가 좀처럼 해결되지 않자 1966년 당국에서는 공기냉각장치를 설치하여 기계적인 방법으로 습기와 온도를 조절하기 시작했다.
1913년 10월 일본인들이 보수할 때 석굴암을 완전 해체한 후 석벽을 다시 쌓으면서 두께 석 자의 콘크리트를 싸서 발랐음은 앞에서 설명했다. 이 대목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현대의 기적을 들라면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 중에서도 고층 건물을 빼놓을 수가 없다. 미국의 시카고나 뉴욕을 가면 고층 빌딩의 숲으로 싸여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대형 고층 건물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사실 19세기 중순까지 만해도 100미터 이상의 건물은 상상할 수 없었는데 갑자기 전 세계는 고층 빌딩들로 뒤덮이기 시작한 것이다.
고층 빌딩을 세울 수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고층빌딩을 건설할 수 있는 재료인 시멘트와 콘크리트 건축 방법이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시멘트는 기존 건축재료인 흙벽돌과는 전혀 다른 개념의 건축재료이다. 점토가 주성분인 흙벽돌은 물을 섞으면 입자들 속의 빈 공간이 없어지면서 밀도가 높아지고 이후 물이 증발되면서 입자들이 단단해진다.
그러나 시멘트는 수화작용으로 물과 결합하면서 강도를 주는 칼슘실리케이트(CaSiH)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물질을 형성한다. 시멘트가 세월이 지날수록 단단해지는 것은 일단 굳어진 시멘트 속에서도 계속적인 결합작용이 일어나 칼슘실리케이트의 양이 갈수록 늘어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멘트는 원래 건물을 짓기 위해 발명된 것이 아니다. 시멘트는 1756년 영국의 존 스미턴이 발명했는데 그는 흙으로 만든 도자기를 불 속에서 구으면 단단해지는 것에 착안하여 점토질이 섞인 석회석을 불에 구워 가루를 낸 후 물에 섞었다. 이 재료는 놀랍게도 일단 물기가 사라진 후 시간이 지날수록 더 단단해지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이 재료의 색깔이나 모양이 포틀랜드 섬에 있는 석재와 비슷하여 '포틀랜드 시멘트'라는 이름으로 명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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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보수 전의 모습(1910년대). |
1867년 프랑스의 모니에는 흙으로 구워서 만든 질그릇 화분이 자주 깨지자 시멘트와 모래를 섞은 후 물을 넣었다. 예상대로 콘크리트 화분은 매우 단단했지만 콘크리트 화분은 인장력(끌어당기는 힘)에 약했고 역시 잘 부셔지는 단점이 있었다. 이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철사그물을 넣었더니 콘크리트 화분은 매우 견고했다.
모니에가 화분을 견고하게 만드는 것에 만족하는 동안 독일의 바이스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모니에의 특허 중에서 철사 대신에 철근을 넣는다면 보다 강도가 높을 것이며 이 재료로 토목공사에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감추고 모니에에게 접근하여 그의 특허를 산 후 철근콘크리트 공법으로 변형시켰다.
그러나 프랑스의 건축기사인 안느비크는 더욱 대담한 생각을 했다.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하면 고층건물도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곧바로 자신의 아이디어를 정리하여 특허로 제출했고 1892년에 특허를 얻었다. 존 스미턴이 시멘트를 발명한지 130년이나 지나서 드디어 시멘트의 대량 사용처를 찾은 것이다.
마침 철근콘크리트는 1871년에 시카고에서 일어난 화재로 시가지의 2/3가 완전히 전소되었는데 19세기 말 미국의 호황에 힘입어 고층 건물을 짓고자하는 건축가들의 모임인 시카고학파의 주목을 끌었다. 설리번을 정점으로 하는 시카고학파는 철근 콘크리트가 고층 건물을 짓는데 적합하다고 생각하자 그들의 새로운 건축에 철근 콘크리트기법을 사용했다. 20세기를 대표할 수 있는 마천루 시대를 연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 실무자들이 석굴암을 해체 복원하면서 습기로부터 완전하게 차단하고 구조적으로도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 가장 안정한 공법을 찾았는데 이때 그들의 주목을 끈 것은 당시 세계적으로 가장 각광받고 있는 최첨단 건축기법 중에 하나인 콘크리트였다. 미국의 시카고에서 시작한 마천루가 철근콘크리트로 만들어지는 등 당시에 가장 단단한 구조물이자 방수 등에 적격이라는 평가가 있으므로 일본인들이 재빨리 도입한 것이다. 소위 당시로서는 최첨단기술을 석굴암 복원에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때 과학자들은 시멘트에서 나오는 탄산가스(CO2)와 칼슘(Ca)이 화강석 벽을 손상시킨다는 것을 몰랐다. 최첨단 공법인 콘크리트는 당장에는 가장 단단하고 시공이 편리한 공법으로 각광을 받았으나 화강석과는 상극이었다. 현재는 시멘트의 단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외국에서 시멘트로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건설한 경우 적어도 건물이 준공된 후 2∼3년 동안은 작품을 전시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 대상물이 우리나라가 자랑하는 간판급 문화재인 석굴암이라는 점이다. 더구나 보수공사 때마다 첨단 기술을 사용했음에도 습기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했으므로 석굴암의 훼손 상태가 날로 심화되고 있으니 보다 근본적이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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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변형했던 석굴암의 배치(좌)와 바로 잡은 모습(우). |
학자들은 석굴암의 훼손은 보수할 당시부터 이미 예고된 일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오늘날의 석굴암은 당초에 건설되었던 석굴암과 구조가 크게 달라졌기 때문에 즉 석굴암의 본래 모습대로 만들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게 된 필연의 결과라는 뜻이다.
석굴암은 원래 일반 건물과 같이 주벽은 이중 돌로 축조되어 있었으며, 그 두께는 1.2미터 또는 1.5미터 정도였다. 지붕에는 판석을 덮어 빗물을 처리하였고 출입구는 개방된 구조였다. 남천우 박사에 의하면 출입구 상부에는 광창이 있었고, 주벽인 10개의 소감실 배후에도 창구가 있었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수리과정에서 이러한 원형이 모두 변형되었다고 지적했다.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인 이태녕 박사는 석굴암은 본래 지하에서 용출되는 물이 굴의 바닥에 있는 암석 기초층을 관통하여 흐르도록 만들어져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의 보수공사 때 이 지하수를 다른 곳으로 방출되도록 구조를 변경한 것도 석굴암 훼손에 한몫 했다고 지적했다. 원래의 배수방법은 굴 안의 온도를 조절하는 역할을 해서 벽면에 결로 현상이 생기는 것을 막았는데 이를 변경하였기 때문에 습기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일제가 1910년대 처음으로 석굴을 보수하기 이전에 했던 기초 조사의 평면도를 보면, 원형 주실의 뒤쪽과 2시 방향의 바로 옆면에 샘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샘물의 양은 10초에 1리터나 되는 많은 양으로 일년 내내 쏟아져 나왔다.
결로 현상이 집중적으로 일어나는 여름, 차가운 샘물이 석굴 밑의 석재 아래로 흐르면 바닥면의 온도가 낮아진다. 벽면이나 석불의 외면에 비해 바닥 면의 온도가 낮으면 이슬은 바닥 면에서만 생긴다. 이러한 원리를 석굴암을 만든 신라의 석공들이 터득했기 때문에 일년 내내 샘물이 콸콸 쏟아지는 샘물 바로 옆에 석굴을 짓고 그 밑바닥으로 샘물을 흘러보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석굴암에서 습기가 생기는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석굴 내부가 숨을 쉬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한마디로 밀폐구조를 강요했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라는 것이다. 원형대로라면 완전히 개방된 구조이기 때문에 대기의 온도가 상승하면 내부의 표면 온도도 통풍에 의하여 함께 상승하므로 결로가 생기지 않는데, 광창과 창구를 모두 막고 전면을 목조 암자로 만들었기 때문에 상황을 악화시켰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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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의 골국석굴도. 겸재가 보고 다닌 영남지방의 여러 풍물과 함께 화첩에 석굴암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석굴의 모습이 여느 법당과 다르지않다. |
1960년대의 석굴암 보수공사 때 현재 목조 전실이 세워진 곳 주변에서 건물의 초석과 신라시대로 추정되는 다양한 기와조각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목조 전실이 틀림없이 존재했으므로 목조 건물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건축했다는 것도 논쟁거리이다.
석굴암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판단되는 중국 돈황의 여러 석굴에도 목조 전실이 있었으며 영조 9년(1733)에 정선이 그린 『교남명승첩(嶠南名勝帖)』에 나오는 경주군 양북면 안동의 「골굴석굴도」에도 석실 입구에 전실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8세기 중엽의 경주부 지도에 목조 건물로 씌워지지 않은 석굴과 그 옆에 목조 암자가 별도로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 지도에는 석굴의 위쪽에 '골굴'이라는 목조 암자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문중양 박사는 1961년 보수 공사를 담당한 사람들이 정선의 그림을 보고 석굴이 목조 암자로 되어 있다고 이해하고 현재와 같이 전실을 목조 건물로 덮어 버렸지만 이는 정확한 자료를 확인하지 않은데서 온 착오라고 지적했다.
물론 석굴 바닥의 샘물을 통한 습도 조절 문제도 계속 논쟁거리이다. 내부 바닥 밑으로 찬 샘물이 흐르게 함으로써 온도 차이로 인한 벽과 천장의 결로 현상을 막았다면 바닥의 돌을 마치 구들을 놓듯 질서정연하게 시공해야 했을 텐데 1960년대의 보수공사 때 이러한 효과를 고려한 바닥 구조가 확인되지 않았으므로 샘물로 인한 습도 조절 문제는 단언할 수 없다고 말한다.
여하튼 반론에 대한 반론이 있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현재도 석굴암의 훼손은 계속되고 있으므로 보다 현실적인 문제, 석굴암의 문제점을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데는 모든 학자들이 입을 모은다.
이를 위해 수많은 학자들로부터 대안이 제시되었으나 가장 근본적이고 항구적인 방법은 석굴을 원형대로 다시 재축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대부분이다. 지금과 같은 인공적인 조절은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이므로 석굴암을 완전히 해체하고 다시 옛 모습 그대로 재조립하는 방법이 최선이라는 뜻이다.
참고적으로 전 서울대 물리학교 교수인 남천우 박사는 석굴암 보존 방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석굴암 보존의 위기는 개악 수리공사 때문에 생긴 결과다. 그래서 연구 보고를 핑계로 관람객의 출입을 금지시키고 말썽의 소지를 없애려는 편법까지 동원했다. 그러나 구조를 그대로 두고서도 습기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 즉 배후에 만든 이중돔 사이 공간의 온도를 밤중 대기온도보다 4, 5℃ 높게 유지시켜 주고 출입문을 개방하면 결로 현상은 생기지 않는다. 이렇게 하면 관람객의 출입도 가능해지며 공기 건조 장치도 필요 없고 진동과 소음도 저절로 사라진다. 굳이 수억 원을 새로 들여서 기계실을 밖으로 옮겨야 할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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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중엽의 경주부 지도. 목조 건물로 씌워지지 않은 석굴 옆에 목조 암자가 있으며, 석굴의 위쪽에 '골굴'이라는 많은 목조 암자들이 있다. |
석굴암의 원형 복원을 위해서는 그와 관련된 모든 분야에서 주도면밀한 검토가 이루어지고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유물답게 국제적 차원에서의 공감대도 형성할 필요가 있다. 한치의 오차도 없는 과학적인 평가를 기초로 하여야 함은 물론 주위 자연 환경과의 조화도 신중히 검토할 필요가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석굴암을 완전히 해체하고 원형대로 재축하는 것에도 반론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석벽을 콘크리트로 싸서 발랐기 때문에 콘크리트를 떼어내는 공사가 어렵다고 주장한다. 일부 전문가들은 본래의 석재에서 콘크리트를 완벽하게 제거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세계적인 문화유산을 검증되지 않은 방법을 적용해 복원할 수 없으므로 현재 상태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제2, 제3 석굴암>
우리나라 석굴은 경주의 석굴암 외에도 단석산 신선사 마애석불(국보 199호)과 군위삼존석굴(국보 109호)이 있다.
경주시 건천읍 산내면에 있는 단석산은 해발 827미터로 주변의 산 중에서 가장 높다. 옛 신라에서는 중악이라 불렸는데, 김유신이 15세에 화랑이 된 뒤 17세에 삼국 통일의 포부를 안고 입산하여 난승이라는 도사로부터 체득한 신술로 큰 바위를 단칼에 자른 뒤부터 단석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전설도 내려온다. 단석산의 신선사 마애석불은 높이 12∼15미터의 화강암으로 된 자연 암벽의 동·남·북향에 새겨진 불상군이다. 동쪽 바위에는 6미터 높이의 보살 입상을 양각했으며, 북쪽 바위 오른쪽에는 높이 9미터의 석가불, 왼쪽 상부에는 입상 3구, 남쪽 바위에는 6미터의 입불 등 모두 10여 구의 석불이 있다. 불상의 조성 연대는 6세기 말에서 7세기 초로 추정된다.
신선사가 특이한 것은 거대한 자연석으로 이루어진 'ㄷ자형' 돌방을 법당으로 사용한 일종의 석굴사원이기 때문이다. 고대에는 바위 위에 지붕을 씌웠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자연 석실을 그대로 불당으로 전용함으로써 석굴사원으로서의 면모를 갖추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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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위삼존석불(국보 제 109호). |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에 위치한 '군위삼존석굴'은 1927년 11월 군위에 살고 있던 최두한이라는 사람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는 마을 앞 돌산 꼭대기 절벽에 틀림없이 부처님이 계실 것이라고 여겨 밧줄을 매고 절벽을 내려갔다. 그리고 예상대로 수직으로 뻗은 절벽 50미터 아래, 지상에서 6∼7미터 정도의 높이에 있는 석굴 속에서 부처 삼존을 발견했다. 석굴 중앙에는 아미타여래가 모셔져 있고 좌측에는 감로병을 들고 보관에 화불이 있는 관음보살상, 우측으로는 보관에 수병(水甁)을 새긴 지장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이 셋을 합해 '아미타 삼존(三尊)'이라 한다.
부처가 악귀의 유혹을 물리친 증인으로 지신(地神)을 불러 자신의 깨달음을 증명했다는 내용에서 유래된 항마촉지인이 한반도에서 쓰인 예는 이 석굴이 처음이다. 석불들은 석굴과 재질이 다른 것으로 보아 각각 다른 곳에서 제작되어 안치된 것으로 보인다.
이 석굴은 신라 소지왕 15년(493)에 극달화상이 창건한 것으로 거대한 화강암의 암벽에 있던 작은 동굴을 더 깊이 파내 약 4.5미터 정도의 폭과 높이의 석굴을 만든 것인데 경주의 석굴암보다 280여 년 앞선 것이다. 따라서 '제2석굴암'으로 불리지만 시기로 따지면 제1석굴암이 되며, 석굴암 건설 당시 이 석굴을 많이 참고했을 것으로 학자들은 생각한다.
신라 때에는 현대인이 상상하는 것보다 국제적인 물물교류가 활발했으므로 불교가 지배하는 신라에서 석굴사원을 세우려는 열망이 대단했다는 것은 이해가 가는 일이다. 그러나 대규모로 석굴을 만들기 위해서는 사암이나 석회암으로 된 큰 돌산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화강암이 대부분이어서 암벽을 뚫고 석굴사원을 만드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여기서 번뜩이는 신라인들의 기지를 확인할 수 있다. 조금 안쪽으로 들어간 암벽에 마애석불을 새겨 석굴과 같은 효과를 얻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천혜의 장소를 더 이상 찾기 어려워지자 조각품을 조립하여 석굴처럼 만들었다. 석굴암은 이처럼 신라인들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는 아이디어를 내놓았던 것이다.
석굴암이 세계 문화유산으로 선정될 당시의 심사위원들이 석굴암을 직접 보고 나서 극찬한 것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석굴암이야말로 질과 양을 따지는 현대에 있어서 양보다는 질로서 승부를 걸어 세계인들을 놀라게 한 것이다. 외국에서 본 거대한 건축물과 정교한 조각품들을 보고 지레 겁을 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제 우리 문화유산의 대표라고도 할 수 있는 석굴암이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 없는 자랑스러운 유물임을 알게 되었으니 선조들의 예술에 대한 안목에 절로 머리가 숙여질 것이다.
시인 고은은 석굴암에 관해 이렇게 썼다.
'자연석을 쓰지 않고 석굴암 전체가 화강석으로 된 인조 석굴이다. 돌로 바닥과 벽, 그리고 천공 모양의 둥근 천장을 쌓아 올렸다. (중략) 이 장엄하고 정교를 극한 석굴암은 이 나라가 자랑하는 신라 예술 가운데서도 으뜸이 되는 예술이다. 그 구조와 설계, 전체와 부분의 조화, 율동과 선의 오붓한 아름다움, 풍염한 표현, 그것의 보존 따위는 신라 중기의 예술이 극도로 발달한 나머지의 정화인 것이다. (중략) 석굴암은 하나의 형용사로는 도저히 찬미할 수 없다. 차라리 그렇기 때문에 단 한 마디의 형용사로써 석굴암을 찬미할 수밖에 없다.'
이종호(mystery123@korea.com · 과학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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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로는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신토불이 우리 문화유산>, <세계를 속인 거짓말>, <영화에서 만난 불가능의 과학>, <로마제국의 정복자 아틸라는 한민족>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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