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1일. 숫자 1이 겹쳐서일까. 여러 기념일도 겹쳤다. 농업인의 날, 보행자의 날, 지체장애인의 날. 해군 창설 기념일, 서점의 날, 그리고 모두 기억해 주길 바라는 유엔참전용사 국제추모의 날(턴투워드 부산)까지.
제정된 의미도 재밌다. ‘보행자의 날’은 걷는 다리(11)를 연상했다. ‘농업인의 날’은 11이 한자로 ‘十一’이라, 더하면 흙 토(土)가 된다. ‘서점의 날’ 역시 한자로 책(冊)이 11.11과 닮았다.
이렇게 다양한 기념일이 모여 의미 깊은 날. 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떠오른다. 특히 올해는 6.25 전쟁이 70주년이 된 해라 더 그럴까. 할아버지는 20대 청년으로 전쟁터에 나가 돌아오지 못했고, 그런 할아버지를 품고 홀로 농사를 지었던 할머니가 그리웠기 때문이다.
◆ 농업인의 날
“그저 세끼 잘 챙겨 먹어. 밥이 보약이고 밥심으로 사는 거야.”
텃밭의 싱싱한 푸른 빛이 나오기까지, 결코 푸르기만 하진 않았다. |
할머니는 언제나 밥이 최고라고 말했다. 생각해 보면 내가 별로 음식을 가리지 않는 건, 할머니 덕분이다. 또 도시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자연을 좋아하고 베란다에서도 농작물을 심어 본 건, 할머니 영향을 많이 받은 듯싶다.
냉장고에서 사과 하나를 꺼냈다. 잊고 지내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참 많은 수고가 들어 있다. 알고 나면 그냥 사과가 아니다. |
먹을 때는 몰랐다. 직접 키워보니 농작물은 여간 손이 가는 게 아니었다.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솎아내고, 친환경 해충약을 만들어 벌레를 잡아줬다. 그렇게 공들여 조그만 호박, 오이, 도라지, 당근 등을 얻었다. 껍질조차 버리기 아까웠다.
농업인의 날을 맞아 여러 이벤트가 진행된다. |
‘농업인의 날’은 농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농민의 의욕을 고취하려는 의도로 제정됐다. 농림축산식품부는 ‘농업인의 날’ 전후로, 코로나19에 지친 국민을 응원하고 감사의 마음을 담아 다양한 행사를 진행한다. 온라인과 비대면 중심으로 김장 재료, 한우, 한돈 등 최대 50% 할인행사를 연다.
온라인 행사도 눈여겨 볼 만하다.(출처=농협하나로마트) |
특히 올해는 코로나19와 긴 장마, 수차례 태풍 등으로 더욱 피해가 극심했다. 이 행사들이 고생한 국민, 농업인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면 좋겠다.
◆ 턴투워드 부산, 유엔참전용사 국제추모의 날.
이 날은 또한 ‘턴투워드 부산(Turn Toward Busan)’, 6.25전쟁에 참전한 유엔군 희생을 기리는 날이다. 전 세계가 그들을 기려, 11월 11일 11시 부산을 향해 1분간 묵념을 한다.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희망의 꽃을 접어 걸었다.(왼쪽) 영국 축구 선수들이 유니폼에 포피를 붙인 모습.(오른쪽) |
엊그제 TV로 영국서 열린 축구 경기(EPL)를 봤다. 유니폼에 꽃 모양을 단 선수들이 눈에 띄었다. 궁금해 물었더니, 아이는 ‘포피데이’를 알려줬다. 지난 8월 전쟁기념관 전시에서 접어 본 희망의 꽃 양귀비가 떠올랐다. 영국은 11월 11일 ‘포피데이(Poppy Day)’를 전후로 많은 이가 양귀비 꽃 모양의 배지나 모형을 달고 다닌다.
한 때 포피 배지를 국제축구연맹(FIFA)에서 금지하기도 했었으나, 2017년 11월 다시 승인을 받았다. 11월 11일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이 선언된 날이다. 이날을 기려 캐나다 및 영연방국가 등은 현충일(Remembrance Day)로 지정해 추모 행사를 연다.
10일 부산 유엔기념공원에서 6.25전쟁 유엔참전용사 추모 평화음악회가 진행되고 있다.(사진=저작권자(c) 뉴스1, 국가보훈처 제공,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국가보훈처는 11월 11일 부산 유엔기념공원에서 ‘턴투워드 부산, 유엔참전용사 국제추모식’을 열 계획이다. 특히 올해는 ‘유엔참전용사 국제추모의 날’이 법정기념일로 정해진 첫 해라 의미가 특별하다. 앞선 10일 ‘유엔참전용사 추모 평화음악회’가 열렸고, 10~12일까지 ‘유엔 참전국 장병 평화캠프’가 진행된다.
미국 뉴욕 타임스퀘어 , 영국, 태국 등 주요 건물 대형 전광판을 통해 유엔참전용사 감사 영상이 흐를 예정이다.(출처=국가보훈처) |
미국 뉴욕 타임스퀘어와 영국 런던, 태국 방콕의 대형 전광판에는 6.25전쟁 참전 유엔군 용사 추모 영상이 송출된다. 무려 4만896명. 6.25전쟁 때 해외참전용사 사망자와 실종자를 합한 숫자다. 이 많은 목숨이 이름도 모르는 우리를 위해 이 땅에서 사라졌다.
온 세상이 평화롭기를.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그들은 원하지 않았을까. 용산 전쟁기념관 내부. |
누구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있다. 그렇기에 인간이다. 무언가를 위해 가장 소중한 걸 희생하는 건, 절대 아무나 할 수 없다. 인생에서 단 한 번. 삶의 마지막 순간 타인을 위해 낯선 곳도 불사한 그 각오에 숙연해진다. 그래서 난 ‘턴투워드 부산’에 더더욱 마음이 아리다.
포피(양귀비)대신 난 보훈처에서 제작한 태극기 배지와 국방부에서 만든 해군 배지를 가방에 달았다. |
기념식에 참석 못 하는 대신, 배지 두 개를 가방에 달았다. 올해 6.25전쟁 70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에서 미발굴 전사자를 기리기 위해 만든 ‘태극기 배지’와 국방부에서 ‘진심 고맙군’ 이벤트로 받은 배지다. 항상 내 가는 곳에 함께 하며, 그들에 대한 고마움을 더하고 싶다.
보이지 않는 여러 곳에서 묵묵히 애쓴 사람들이 있어서 오늘이 있다고 생각한다. 각각 다른 돌이 모여 큰 성벽을 쌓듯. 그 힘을 믿는다. |
평소 종종 잊고 사소한 일에 불평하고 투덜거린다. 그럴 때, 묵묵히 자기 자리에서 열심인 사람을 생각하면, 삭막한 삶도 조금은 유연해지지 않을까.
여러 기념일이 한 날에 모였다. 11월 11일은 그래서 더 아련하고 고맙다.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을 만들어 준 많은 이가 세상에 있었고, 지금도 있다는 걸 떠올려 주는 날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