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시골에 계신 할머니와 통화를 했다. 할머니의 목소리가 밝지만은 않아서 의아했는데, 알고 보니 동네 어르신들 대부분이 청와대로 관광을 다녀오셨다고 한다. 나와 통화할 즈음의 할머니는 아직 청와대 방문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경로당에 가면 대화에 끼어들기가 어렵다며 아쉬워하셨다.
그 이야기를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곧바로 할머니가 타고 오실 비행기 표를 예매하고, 청와대 관람 예약까지 끝냈다. 오랜만에 서울에 오시는 할머니와 무얼 하면 좋을지 찾아보던 중, ‘청와대 K-관광 랜드마크’ 소식을 접하게 됐다.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청와대 인근의 다양한 역사와 문화, 관광 자원을 바탕으로 10개의 테마별 도보 관광코스를 지정했다고 한다. 왕과 왕비의 옷을 입고 궁궐을 산책하며 왕실의 하루를 경험할 수 있는 조선 왕실 체험 코스, 한국의 근현대 건축가의 작품과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건축물을 감상할 수 있는 북촌 코스, 청와대 뒷길과 북악산 구간을 걸으며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웰니스 코스, 광화문 일대의 미디어아트를 감상할 수 있는 K-컬처 코스 등 흥미로워 보이는 코스들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내가 고른 코스는 문화산책(서촌) 코스였다.
청와대와 청와대 사랑채를 구경하고 난 뒤, 통인시장과 대오서점, 보안여관 등 7080 세대의 추억이 담긴 코스를 걷고 세종마을 음식문화거리에서 식사까지, 우리 가족에게 딱 좋은 코스였다.
나는 초등학생 때 청와대 사랑채에 구경을 갔었지만 본격적으로 청와대 내부 관람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할머니 역시 대정원을 중심으로 파릇한 잎사귀를 자랑하는 아름드리 나무들을 보고 좋아하셨고, 크리스털이 달린 금빛 샹들리에를 보고 아주 멋스럽다며 입을 다물지 못하셨다.
청와대 개방 1주년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여전히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관람객들은 대통령이 집무를 보던 공간에서 함께 기념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기록했다.
실내뿐만 아니라 날이 좋아서 그런지 푸른 지붕의 청와대가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 놓인 ‘청와대 국민 품으로’ 글자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많았다.
우리 가족은 아침 9시부터 관람을 시작했는데,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대의 관광버스가 연이어 나타났고, 수많은 관광객들이 일제히 카메라를 들고 청와대의 파릇한 아름다움을 담아갔다. K-관광 랜드마크의 핵심으로 지정된 만큼 더욱 활기찰 청와대를 기대한다.
청와대 관람을 마치고 경복궁 돌담길을 따라 서촌으로 내려가는 길은 싱그럽고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으로 가득했다. 대략 10분 정도 걸어 내려가자, 붉은 벽돌 외관의 보안여관을 만날 수 있었다.
레트로풍의 낡은 간판이 반겨주는 이곳은 1936년부터 2004년까지 실제로 운영되었던 여관이자, 동시에 문학인들의 아지트였다. 서정주, 김동리, 이상, 이중섭 등의 유명 문인과 화가들이 장기 투숙을 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할머니는 보안여관의 간판을 보면서, 옛날에는 여관이 꽤 많았다며 향수를 느끼셨다.
지금의 보안여관은 현대 예술가들의 작품이 전시되는 갤러리가 되었지만, 옛 보안여관의 골조를 그대로 살려 놓아 관람객들이 과거의 시간을 고스란히 느껴볼 수 있도록 공간이 꾸며져 있었다.
골목을 돌아 봄꽃이 핀 거리를 조금 더 걷자 서촌의 골목길이 펼쳐졌다. 마치 이곳만 시간이 느긋하게 흐르는 것처럼, 옛 서울의 정취와 낭만이 흘러나온다.
서촌에서 가장 오래된 헌책방인 대오서점 앞을 지날 때, 아버지는 젊은 시절에 종종 들러서 헌책을 사 보던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며 감탄하셨다. 아쉽게도 지금은 카페로 바뀌어 헌책을 팔지는 않지만, 문학을 공부하는 나 역시도 오랜만에 책 향기를 마음껏 들이마시며 힐링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몇십 년의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떠안고 있음에도, 서점은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마치 시간이 느긋하게 흐르는 서촌의 단정함과 소박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터줏대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서점을 지나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개량 한옥 사이를 누비자 야트막한 돌담 너머로 한약 내음이 물씬 풍기는 통인한약국이 보였다.
일반적인 카페와는 다르게, 가마솥에서 끓이는 쌍화차나 십전대보차를 마시면서 한국의 전통적인 차 문화를 체험할 수 있다. 옛것의 감성이 물씬 풍겨오는 약국에서 풍겨져 오는 건강한 약재 냄새가 어쩐지 포근하게 느껴졌다. 평소에도 전통차에 대한 관심이 많은 편이라 그런지 더 즐거운 마음으로 휴식을 즐길 수 있었던 것 같다.
한약국에서 골목을 하나만 더 내려가면, 조금 더 왁자지껄한 분위기의 상권이 펼쳐진다. 세종마을 음식문화거리다. 서촌의 맛집을 전부 모아 놓은 공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이곳에는 수많은 음식점들이 있다.
곳곳에서 고소한 음식 냄새가 풍기고, 활기가 넘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운치 있는 골목을 걸으니, 코로나19 이전의 일상을 완전히 되찾은 것만 같은 기분도 들었다. 복잡한 서울 도심 한가운데에 이렇게 시간이 멈춘 듯 분위기 있고 고즈넉한 골목이 남아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서촌이 그저 시간 속에 박제된 유물이 아닌, 살아 숨쉬는 문화공간으로 바뀌어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게 좋았다. 과거와 현재가 모두 공존하니, 할머니부터 부모님, 그리고 나까지 모두 그 공간을 향유하고 저마다의 감상으로 즐길 수 있었다. 문화 체험 혹은 관광이라고 해서 멀리 가야 있는 건 아니다. 고개를 돌리는 곳곳마다 아름다운 정취가 살아 숨쉬는 서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시간을 즐길 수 있길 바란다.
대한민국 정책기자단 한지민 hanrosa2@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