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득한 어린 시절, 종종 이모를 따라 부산행 기차를 탔다. 꼬마에게 그 시간은 꽤 따분했다. 보채진 않아도 지루함을 달래느라 머릿속은 몹시 분주했다.
좀 커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안 오는 잠을 청하고 책도 보다가 늘어지도록 음악도 들었다. 그런 내게 획기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KTX라는 고속열차가 생긴다고 했다. “들으셨어요? 부산까지 3시간도 안 걸리는 열차가 생긴데요.” 흥분한 내 목소리에 할아버지, 할머니는 “너무 어지럽지 않겠냐. 그때까지 건강해서 꼭 타봐야겠구나”라고 했다.
KTX 개통 전, ICE(이체, 독일 고속열차)와 TGV(떼제베, 프랑스 고속열차), 신칸센(일본 고속열차)을 타본 적이 있다. 그런 열차가 우리나라에 생겨 부산까지 간다니. 설렘으로 기다렸다. 개통일이 연기될 때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더 오래 사시길 바랐다. 그렇지만 정작 개통했을 때는 해외에 있어 타지 못했다. 그런 KTX가 벌써 개통 20주년을 맞았다.
지난 4월 1일, KTX는 개통 20주년을 맞아 다양한 행사를 펼쳤다. 그 전후로 KTX를 타게 됐다. 열차를 타고 가며 20주년을 축하하는 메시지(랩핑, 영상 등)를 보고 행사 소식을 들었다. 그 중 옛 서울역이었다가 문화예술공간이 된 문화역서울284에서 열리는 무료 전시회가 궁금했다. 열차 이야기를 옛 역사에서 본다니, 그 사실 만으로도 달려갈 이유는 충분했다.
KTX 개통 20주년 기념 전시 ‘여정 그 너머’
이제는 문화예술공간으로 더 친근한 문화역서울284. 그곳에서 4월 21일까지 KTX 개통 20주년을 기념한 철도문화전 ‘여정 그 너머’가 열리고 있다. 철도박물관 소장품과 기술 분야 전시품을 비롯해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는 예술가들의 철도 관련 작품을 볼 수 있다.
생각한 대로 공간과 전시는 맞춤옷 같았다. 단순히 타임라인만 보는 전시가 아니라서 더 좋았다. 옛 기차에 추억이 밀려 왔지만, 최근 기술을 보며 미래도 꿈꿔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기억에 남은 건, 예술적인 시각에서 풀어낸 KTX 모습이었다. 철로가 그려진 바닥을 걸어 끝에 있는 거울까지 가는 동안 변화하는 아치를 지난다. 나는 끝없는 철도 위 어디쯤 와 있을까. 생각해보면 열차는 꽤 이성적이면서 감성적이다. 최신 기술로 낭만적인 여행장소로 데려다 주니까.
VR 시트맵 서비스 등 향상된 코레일 앱
열차 예매를 위해 평소처럼 앱을 눌렀다. 전에 못 보던 새로운 문구가 보였다. 좌석 선택 화면 위를 보면 열차 내 VR 시트맵 서비스가 있다. 버튼을 누르자 내가 선택한 객실이 화면에 나타났다. 마치 현재 객실에 서 있듯이.
사실 VR(가상현실)은 이제 우리에게 익숙하다. 그렇지만 좌석을 미리 보고 선택할 수 있다는 건, 대단히 편리했다. 난 보통 장시간 탈 때면 조용히 가고 싶어 맨 앞이나 맨 뒷좌석을 선택한다. 그렇지만 바로 앞에 화장실이 있는 객실이 걸리기도 한다. 그럴 때면 오가는 사람들로 가장 분주한 기차여행이 되는 거다. 이런 불편함만 사라질까. 이 밖에도 콘센트나 창문 등 선호하는 좌석을 알 수 있어 편리하다.
더 빨라지고 편리해지는 KTX-청룡
무엇보다 기대되는 건 5월부터 개통되는 KTX-청룡이다. KTX-청룡은 100% 우리 기술로 만든 국내에서 가장 빠른 열차다. 부산까지 2시간 10분대 주파가 가능해 현재보다 약 20여 분 단축된단다. 용산에서 광주-송정까지는 1시간 30분대. 서울 시내에서 막힐 때보다 빠르다는 이야기다. 부산에 사는 사촌들과 광주에 거주하는 동생과 좀 더 자주 만나게 될까.
KTX가 20살을 먹는 동안 나와 내 주변에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난 오송에 거주할 때는 매주 KTX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경강선이 개통되고는 짧은 시간에 바다를 보고 왔다. 내 주변에는 KTX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매일 서울서 KTX로 출·퇴근을 하는 지인도 있고 주말마다 다니는 친구도 있다. 우리는 그 기술을 제대로 누렸다. KTX가 없었다면 가능했을까.
코레일에 따르면 그동안 KTX가 달려온 누적 운행 거리는 6억4581만km란다. 지구를 1만6000바퀴 이상 돌았다는 소리다. 이제 5월이면 순수한 우리 기술로 만든 KTX-청룡이 운행을 시작한다. 무엇보다 우리 기술로 더 빨라진 열차를 탈 수 있다니, 뿌듯하다. KTX는 놀랄만큼 변화했지만, 꼬마 때 설렘은 그대로다. 앞으로 KTX는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대한민국 정책기자단 김윤경 otterkim@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