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내가 이렇게나 시력에 의지하고 있었구나’
시각차단 안경을 쓰자 답답함과 긴장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생전 처음 느껴본 어둠이었다. 쓰지 않았으면 깨닫지 못했을 테다.
12월 인권주간을 맞아 장애인 입장에서 박물관을 체감해보고 싶었다. 가까운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공간 오감’을 방문했다. 이곳 ‘공간 오감’은 지난해 9월 개관, 큰 호응을 받았다. 이 공간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박물관 문화유산을 경험하고 서로 공감하며 의견을 나눈다는 취지가 특히 좋았다. 더욱이 첫 전시로 국립중앙박물관의 대표 소장품인 국보 반가사유상 두 점을 다양한 감각으로 느껴볼 수 있다는 점에 꽤 솔깃했다. 시각장애인은 안경없이, 비장애인은 시각차단 안경을 쓰고 반가사유상의 제작 과정과 시대에 따른 차이 등을 다각도로 체험하게 된다. 무엇보다 비장애인, 장애인이 비슷한 환경에서 체감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이전 휠체어를 타거나 저시력 안경을 잠깐 써본 적은 있었지만 오롯이 장애인 관점에서 1시간 반 동안 문화를 체험해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과연 어떤 느낌을 받을까, 몹시 궁금했다.
박물관으로 가는 동안 휠체어나 지팡이를 짚고 간다고 생각해봤다. 장애인 인권에는 장애인 이동권이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지하철역에서 박물관까지 ‘박물관 길’로 조성돼 폭도 넓고 엘리베이터도 있었다. 또 박물관에도 점자가 부착된 손잡이와 함께 휠체어 전용 경사로가 있어 쉽게 이용할 수 있었다.
‘공간 오감’에 도착해 오리엔테이션을 들은 후 점자와 한글로 각자 이름이 적힌 예쁜 이름표를 받았다. 이어 시각차단 안경을 쓰고 안내자 말에 집중하며 서로 어깨에 손을 올리고 천천히 따라갔다. 앞이 보이지 않는 만큼 이런 작은 협력이 꽤 도움이 된다는 걸 알게 됐다. ‘공간 오감’ 내부에서는 해설 터치판이 있었다. 해설 터치판은 휠체어와 사람 키 높이를 고려해 두 군데씩 부착돼 있었다. 점자로 돼 있어 시각장애인은 점자로 읽고 비장애인은 기기를 터치해 듣는다. 영어로도 돼 있어 외국인도 가능하다. 단, 앞이 보이지 않는 만큼 집중이 되서 그럴까. 다른 생각없이 온전히 프로그램에 몰입해 볼 수 있었다. 이곳서 체험할 두 반가사유상(복제품)을 6세기 후반과 7세기 전반의 사유상이라고 불렀다 (사실 연도는 추정할 뿐이란다).
특히 각 반가사유상의 향을 맡는 과정은 몹시 흥미로웠다. 두 반가사유상에서는 각각 다른 향이 느껴졌다. 후각으로 향을 기억하면 나중에 이 향을 맡을 때 이 날 만난 반가사유상을 떠올릴 수 있겠지. 청각, 후각, 시각, 촉각 등 8가지 감각으로 반가사유상을 체감하니 꽤 풍성하게 느껴졌다.
다양한 활동을 한 후 반가사유상을 그리며 프로그램은 끝이 났다. 작별 인사를 하던 담당자는 관객들에게 박물관 본관에 있는 ‘사유의 방’을 꼭 들려보라고 권유했다. 추천한대로 박물관 본관에 있는 ‘사유의 방’을 들렸다. ‘사유의 방’은 국보 반가사유상 2점 만이 있는 공간이다. 확실히 이번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그런지 이전과는 의미가 다르게 다가왔다.
이런 좋은 프로그램은 어떻게 만들게 됐을까. 또 사람들 반응은 어땠을까. 이를 준비한 학예사와 교육안내자에게 몇 가지 질문을 했다. 다음은 오지언 학예사(국립중앙박물관) 및 교육 안내자와 일문일답.
Q. 이 프로그램 기획 취지가 궁금하다.
A. 처음 기획과정을 함께 하진 않았지만, 시각적인 박물관을 좀더 다양한 감각으로 누려보면 했던 걸로 알고 있다. 이번은 첫 전시로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설문을 받아 보완해나가고 있다. 처음에는 시각장애인이 대상이었는데 이제 장애인, 비장애인으로 바뀌었다. 앞으로 또 어린이나 외국인으로 확장할 생각도 있다.
Q. 개관 1년 2개월 정도 되었다고 알고 있다. 외국인들도 찾고 있을까.
A. 얼마 전 한국에서 이 프로그램을 체험한 외국인이 자국 내 SNS에 올려 외국인들이 온 적이 있다. 또 한국 거주하는 외국인 대학생들도 찾고 있다.
Q. 장애, 비장애인들이 이 프로그램을 보고 어떤 점을 좋아했는지 궁금하다.
A. 요즘은 장애인도 박물관 유물을 느껴보도록 촉각 모형 등을 활용하는 교육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특히 시각장애인은 평면화된 작품들은 100% 가늠하기 어려운데 3D 복제품으로 완성된 걸 만져보고 무늬와 형태를 좀 더 체감하며 만족해한다. 이건 장애인뿐만 아니라 비장애인도 비슷하다. 비장애인 역시 문화유산을 전시장에서 만져볼 기회는 드물지 않나.
Q. 진행하는 동안 비장애인과 장애인의 다른 점도 있었을까?
A. 향을 표현할 때, 비장애인은 사물에 비유한다면 장애인들은 좀 더 섬세하게 이야기하는 것같다. 예를 들어 비장애인은 “바다향이 난다”고 하면 장애인은 “여름에 전철을 탔을 때 시원하게 에어컨 돌아갈 때 나는 향같다”고 묘사를 한다, 상황, 배경 등을 많이 섞는달까.
12월 10일은 세계 인권의 날이다. 1948년 12월 10일 UN총회에서 세계 인권 선언이 채택된 것을 기념, 각국에서는 매년 12월 10일을 ‘세계 인권 선언일(국제인권기념일)’로 기념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이를 기념하며 각 지자체에서는 9일부터 13일 혹은 19일까지 인권주간으로 지정해 다양한 프로그램과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얼마 전, 장애공감주간이 있어서였을까. 나는 이번 인권주간에 장애인 인권에 관해 생각해보고 싶었다. 장애인 인권 침해 등의 사례도 많지 않은가. 그런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좀 더 장애인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싶어 이 프로그램을 다녀왔다. 다녀온 이후 어느정도 장애인 인권에 가까워 졌을지는 모르겠다. 그렇다해도 확실히 프로그램을 본 후 생각이 달라졌다. 비장애인, 장애인이 같은 체험을 해본 셈이니까.
“야 저기 하늘봐봐, 오늘 구름 참 신기하다. 잔잔하게 깔려 있어”
누군가의 목소리에 하늘을 바라봤다. 문득 시각장애인들 생각이 났다. 그 하늘의 구름을 고스란히 볼 수 없음에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비장애인이 이런 상황을 천천히라도 조금씩 이해해나간다면, 세상은 한층 밝아지지 않을까.
“엄마, 안경을 쓰고 앞이 안 보일 때는 ‘공간 오감’이 무척 큰 줄 알았어. 내가 여기서 한 시간 넘게 있었을 줄은 몰랐네.”
앞이 안 보이니까 막막하게 느껴져서 그랬을까. 시력차단 안경을 벗고 보니 ‘공간 오감’은 그렇게 넓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른 곳도 비슷하지 않을까. 비장애인이 보기에 가는 길이 짧고 편리하다 해도 어두운 세상에선 매우 길게 느껴질 수 있다. 물론 상황이 다른 만큼 누구나 모든 걸 똑같이 느낄 수는 없다. 그렇지만 작은 공감과 이해는 생각보다 타인에게 크게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리고 그 공감은 보이지 않는 비장애인과 장애인 사이의 유리 벽을 허무는 힘이 돼주지 않을까. 분명 인권역시 타인에 대한 공감과 이해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믿는다.
▶ 국립중앙박물관 ‘공간 오감’ 프로그램 안내 바로가기 https://modu.museum.go.kr/notice/43
▶ 국가인권위원회 누리집 바로가기 https://www.humanrights.go.kr/base/main/view▶ 인권 상담 : 국번없이 1331, 혹은 방문상담, 수어상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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