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시정부의 발자취와 황푸군관학교 한인 청년들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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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6주년을 맞은 지금, 우리는 그 긴 여정을 다시금 성찰하고 있다.
흔히 '상하이 임시정부'로 부르지만, 임시정부는 1919년 수립 이후 중국 전역을 옮겨 다니며 27년 동안 항일 독립운동을 이어간 '움직이는 정부'였다.
그 여정에서 광저우는 단순히 지나치는 장소가 아니라, 무장투쟁과 외교 전략이 교차하던 결정적 분기점이었다.
특히 1938년 가을, 임시정부는 일본군의 남하를 피해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를 거쳐 광저우에 도착했고, 이곳에서 중대한 전환기를 맞았다.
당시 국민당 정부는 항일 전선의 강화를 위해 임시정부에 협력하고 있었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임시정부는 광복군 창설을 위한 토대를 다졌다.
이는 독립운동의 무게중심을 외교 중심에서 군사 중심으로 이동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 시기, 광저우 황푸군관학교에서 훈련을 받던 조선 청년들 또한 조국의 해방을 위한 열망으로 가슴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 총을 들고, 민족의 미래를 위해 싸우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임시정부의 이상은 그들 속에서 실천으로 살아났고, 광저우는 그 의지를 더욱 굳건히 다지는 역사적 공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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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푸군관학교
광저우가 무장투쟁의 거점으로 부상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결정적 요인은 바로 황푸군관학교의 존재였다.
1924년, 쑨원이 창설하고 이후 장제스 체제 하에서 중국 혁명군 간부 양성의 본산으로 기능한 이 군관학교는, 동아시아 반제국주의 청년들에게 폭넓게 문호를 개방하였다.
조선의 독립운동가들 역시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임시정부는 민족해방을 위한 체계적 군사훈련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유망한 청년들을 황푸에 진학시키는 전략적 결단을 내렸다.
이 과정에서 한인 청년들은 본격적인 군사교육을 받게 되었고, 이는 단순한 전술 습득을 넘어 무장 조직의 구성, 지휘 체계 운용, 게릴라전 운영 등 실전 기반의 전략 역량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다.
황푸군관학교 출신 조선 청년들은 훗날 한국광복군의 주요 간부로 성장하였으며, 해방 이후에는 군사 체계와 정치 이념 형성 과정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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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황푸는 조선 청년들에게 무기 뿐 아니라 체계적 항쟁의 정신과 기술을 전수한 공간이었고, 그곳에서 축적된 경험은 무장 독립운동의 실질적 추진력을 만들어냈다.
광저우라는 지리적 공간은 이렇게 외교와 군사의 두 축이 결합한 복합적 전환의 무대가 되었으며, 황푸군관학교는 그 중심에서 조선 독립운동의 방향을 바꾼 핵심 축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광저우 체류는 오래가지 못했다.
같은 해인 1938년 10월, 일본군이 남하하여 광저우를 점령하자, 임시정부는 다시 급박한 철수를 단행해야 했다.
고작 두 달 남짓 머문 도시였지만, 이 시기 광저우는 무장 투쟁의 기틀이 정립되고, 조선 청년들의 조직적 항쟁 의지가 분출된 중심지였다.
임시정부는 류저우, 치장 등을 거쳐 결국 충칭에 정착하게 되었으며, 이 철수 과정은 단순한 도피가 아니라 조직적 생존 전략의 일환이었다.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광저우에서 이미 주요 자료와 인력을 분산시켜 보존하고 있었으며, 실제로 광저우 점령 직후에도 행정 체계가 붕괴하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사전 대비 덕분이었다.
이는 '대한민국임시정부사'와 '백범일지' 등에 기록된 사실이다.
이 과정에서 조선 청년들은 문서 이송, 연락망 유지, 후방 경로 확보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고, 일부는 철수 중 적의 포위망에 희생되기도 했다.
이름 없이 사라진 이들의 헌신은 공식 기록에 다 담기지 않았지만, 임시정부 체계가 다시 충칭에서 복원될 수 있었던 기반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절대 작지 않다.
광저우는 비록 짧은 체류지였지만,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의지와 실천, 그리고 희생이 맞닿은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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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저우, 무장 투쟁의 전략적 기지로 떠오르다
1938년, 중일전쟁의 격화 속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와 우한을 거쳐 남부 도시 광저우에 도착했다.
이 시기 광저우는 단순한 피난지가 아니라, 임시정부의 항일 무장 노선을 현실화할 수 있는 군사적 기반이 모색된 전략적 전환점이었다.
특히 중국 국민당 정부와의 외교 협력을 본격화하면서, 무장 투쟁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다.
광저우 체류 시기에는 김원봉을 중심으로 한 무장 세력이 중국군과 협력해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이는 임시정부가 직접 주도한 조직은 아니었지만, 훗날 한국광복군과의 통합 논의로 이어지는 토대를 제공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조선의용대는 광저우를 출발점으로 일본군을 상대로 한 심리전과 후방 교란 작전에 나섰고, 이러한 활동은 이후 임시정부 계열 무장 세력과의 결합 흐름으로 이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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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통합 과정을 실무적으로 정비한 인물로는 권준(權晙)을 빼놓을 수 없다.
권준은 황푸군관학교 제4기 졸업생으로, 김원봉과 같은 시기에 중국 정규 군사 교육을 받은 항일 무장 전문가다.
이후 충칭에 본거지를 두고 한국광복군을 창설한 임시정부 내에서 그는 군무부 주임 참사로 임명되어, 병력 편성, 훈련 체계 수립, 군사 행정 운영 등 군 조직의 실질적 기반을 다지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광저우는 무장 독립운동의 기틀이 정립되고 실천 의지가 분출된 중심지였다.
조선의용대를 통한 무장 투쟁의 실천이 시작된 장소이자, 훗날 권준 등 임시정부 인사들이 한국광복군 체제를 통해 무장 독립운동을 제도화해 나갈 수 있었던 발판을 마련한 전략적 기지였다.
이처럼 광저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무장 노선의 이정표를 세운 장소로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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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저우는 조선 독립운동가들에게 결의와 실행, 그리고 희생이 응축된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준비된 전략과 결단은 곧 광복군 창설, 연합국과의 공조, 그리고 해방 후 국가 체계 형성으로 이어지는 장대한 독립운동 전개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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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워진 흔적, 다시 세우는 기억
오늘날 광저우 시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흔적을 찾아보는 일은 쉽지 않다.
전란과 도시 개발로 인해 대부분의 관련 건물은 사라졌고, 표지판조차 남아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사라진 장소를 기억 속에서 되살리려는 노력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현지 학계와 시민단체, 특히 '우리역사연구회'는 황푸군관학교 내 조선인 기숙사, 조선의용대 출정지 등 주요 지점에 대한 문헌 고증과 현장 조사를 바탕으로 유적지 탐방을 추진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현지 조선족 후손들과 한국 전통문화에 관심을 가진 중국 시민들이 생생한 구술 증언을 제공하며 복원 작업에 힘을 보태고 있다.
광저우와 한국 사이에는 그렇게 '기억의 다리'가 놓이고 있으며, 그 다리 위에는 시대의 아픔과 희망, 그리고 실존했던 인물들의 흔적이 교차한다.
최근에는 이 기억의 다리를 견고하게 해주는 중요한 작업도 이루어졌다.
단행본 '황푸군관학교의 한인』이 출간되며, 광저우에서 훈련을 받은 조선 청년들의 결의와 투쟁을 입체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이 책은 황푸군관학교 입교자들이 단순한 군사 훈련생이 아니라, 조선 해방의 전략을 기획하고 실천했던 지식형 전사들이었음을 밝혀낸다.
광저우 현장 탐방 중 기자는 이 책의 저자이자 '우리역사연구회'를 이끄는 강정애 박사를 직접 만났다.
강 박사는 "황푸군관학교는 조선 청년들에게 단순한 무기 사용법 이상의 것을 가르쳤다. 이곳은 독립운동의 기획력과 전술적 실행력을 함께 키워낸 실천의 군사학교였다"고 말하며, 현재도 관련 명단 정리와 사료 복원, 현장 조사 등을 지속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녀가 제공한 명단에 따르면 1920년대부터 1930년대 후반까지 80여 명의 조선인이 황푸군관학교 본교 또는 우한 분교에 입학하거나 교관으로 활동한 것으로 나타난다.
실제 규모는 이보다 훨씬 더 클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단지 군사훈련을 받은 인물들이 아니라, 조선의용대 창설과 한국광복군 편제에 실질적으로 참여하며, 일제에 맞선 무장 독립운동의 핵심 전선에 섰던 주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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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의 연속성을 실천한 인물, 황푸군관학교 출신 독립군 권준
대한민국 무장 독립운동사에서 군사 실무의 핵심 인물로 평가받는 권준(權晙, 1895~1959)은 해방 후에도 군 창설과 보훈제도 정비를 통해 독립운동의 연속성을 실천한 인물이다.
그는 황푸군관학교 제4기 졸업생이자 한국광복군 창설의 실무 책임자 중 한 명으로, 임시정부 군무부 주임 참사, 광복군 참모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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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직후 충칭에서 귀국한 권준은 미군정 하에서 광복군 출신 장교들과 함께 초기 군사정책 자문에 참여했다.
이후 1946년 대한민국 군 창설을 본격화하면서 그는 제106여단장, 제103사단장, 서부지구경비사령관 등을 거쳐 초대 수도경비사령관(현 수도방위사령부 전신)으로 임명됐다.
이는 광복군 출신 인사로서 국군 창설 핵심 보직에 오른 최초 사례 중 하나로, 그의 조직력과 군사 전문성이 높게 평가된 결과였다.
권준은 정치 전면보다는 군사행정과 보훈제도 정비에 주력하며, 광복군 계열 무장 독립운동의 정통성을 국군 창설과 연결하는 데 집중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후방에서 인사와 작전, 보급 관련 군사행정 임무를 수행했으며, 이후에는 광복군 계보 복원과 독립군 공로자 예우 사업에도 힘을 보탰다.
그의 일생은 "현장에서 말없이 일하는 군사 실무자"의 전형이었다.
실제로 권준은 생전 정계에 진출하지 않고도 수많은 군사 기반 제도와 병력 관리 체계를 설계·운영하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군의 뼈대를 세운 인물로 회고된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독립운동 공로를 기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현재 권준의 유물과 인물사진은 디지털상주문화대전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의 광복군 훈장, 장교증명서, 군령봉 등이 공개돼 있어 후대 국민에게 독립군 출신 군 지도자의 실상을 생생히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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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 80주년을 앞두고, 우리는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광저우에서의 체류는 비록 짧았지만,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결정적인 시기였다.
무장투쟁의 확대, 외교채널의 재정비, 독립군 인력 양성이라는 세 축이 이곳에서 동시에 추진되었고, 그것은 곧 '행동하는 임시정부'로의 전환을 상징한다.
광저우는 단순한 피난처가 아니라, 새로운 도약의 전초기지였다.
2025년, 광복 80주년을 앞둔 지금, 우리가 마주한 질문은 분명하다.
물리적 흔적은 사라졌지만, 그 정신과 역사는 되살릴 수 있는가.
이국의 땅에서 청춘과 생명을 걸고 민족의 자존을 지키고자 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일은, 단지 과거를 추모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어떤 가치를 지켜야 하는지,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되묻는 일이다.
광저우의 길을 다시 걷고, 그 시간의 숨결을 기록하며 후대에 전하는 작업은 일부 연구자의 과제가 아니다.
그것은 곧 우리 모두가 역사와 공동체에 대해 맺어야 할 '기억의 약속'이자,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단절 없이 이어가기 위한 실천이다.
우리는 기억할 것인가, 그리고 다시 걸을 것인가.
그 질문이 다시 우리 앞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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