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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FTA 진짜로 하는 겁니까?”

[실록 경제정책]⑪ 한미 FTA의 시작과 고민, 그리고 남은 과제

“정치적으로 손해지만 국가경제 위해 반드시 해야 한다”

2008.02.14 특별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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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 위기, 미-이라크 전쟁, 신용불량자와 카드채 사태…. 돌아보면 먹구름 뿐이었다. 2003년 위기 상황에서 출범한 참여정부는 신중한 경기조절 등으로 살얼음판 위를 조심스레 건너갔다. 인위적인 경기부양과 결별하는 대신 경제체질을 튼튼히 하고 중장기적 성장잠재력을 키우는 데 주력했다. 단기적 성과보다는 근본적인 해결을 추구하고, 본질적 문제 접근을 통한 제도화에 초점을 맞췄다. 혁신경제와 공정한 시장, 한미자유무역협정(FTA)등 적극적 개방정책, 금융허브 추진을 비롯한 금융산업 선진화정책, 지속적인 연구개발(R&D)투자 확대, 남북경협 등 오늘보다 내일을 위한 투자에 집중했다.

‘한 손에는 성장잠재력 확충, 다른 손에는 사회안전망 확대’. 참여정부는 특히 IMF 외환위기 이후 심화된 사회경제적 양극화를 완화하기 위해 사회투자를 확대했다. 경제성장과 사회복지가 함께 가는 동반성장전략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제시했다. IMF 외환위기 이후 고질병이 된 ‘저성장 속 양극화’ 문제에 정면으로 맞서고자 했다. 그럼에도 민생의 어려움은 짙은 그림자로 남았다. 우리 경제의 낡은 유산과 싸우며 새로운 성장전략을 추구했던 참여정부의 이러한 비전과 고투가 한국경제의 터닝포인트로 기록될지 여부는 역사의 몫으로 남아 있다.

국정브리핑은 재정경제부·한국금융연구원·한국조세연구원 등과 함께 참여정부 경제정책의 탄생 배경과 전개과정, 정책효과와 의미 등을 실록 형태로 정리한 ‘실록 경제정책’을 기획, 연재한다. 전·현직 정책 담당자들의 증언과 각종 정부기록물, 학계 연구보고서 등을 밑그림으로 삼아 ‘읽는 재미’와 함께 경제정책의 원리와 방향을 이해할 수 있는 폭넓은 안목을 제공하려 한다. 연재 내용은 단행본으로 묶어 출간할 예정이다. <편집자>


① 카드사태와 금융시장 안정: “문 닫을까요, 외국에 팔까요, 당신이 살 거요?”
② 신용불량자 뇌관 해체: 신불자 딜레마, 딜레마…“원칙이 이기더라”
③ 공정한 시장질서의 원칙과 현실: “투자와 출자, 그거 정말 구분이 됩니까?”
④ 인위적 경기부양의 유혹: 냄비 정책서 뚝배기 경제로…“어느 쪽이 건강한 겁니까”
⑤ 전략적 재정운영: “계산서 내놓았다가 박살나게 맞고 물러갑니다”
⑥ 한국형 성장모델의 모색: “개방과 양극화 해소, 선진한국 가는 양 날개”
⑦ 차세대 성장동력산업 육성: ‘미래 먹거리 10가지’ 씨뿌리기…과기 ‘부총리’뜨다
⑧ 일자리, 비정규직 그리고 양극화: “일자리 낳는 성장으로 가자”
⑨ 영세자영업자 문제와 민생 대책: “민생이라는 말은 저에게 송곳입니다”
⑩ 중소기업 상생협력: ‘9988’ 중기 땜질처방 끝…하청업체서 파트너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통상교섭본부가 만들어낸 회심작이다. 지혜롭고 전략적인 포석으로 미국을 끌어낸, 칭찬받을 만한 작품이다. 어지간하면 한미 FTA를 다음 정부로 미뤄볼 수 없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기회는 한번 넘기면 보통 10년 가야 돌아온다. 성공적인 타결을 위해 노력하고 두 가지를 구분해줬으면 한다. 우선 국내의 이해관계와 저항 때문에 주저앉는 일이 없도록 확고하게 가자. 또 최후의 선을 내놓으라고 하면 협상을 깨도 좋다.”

2006년 2월 16일 청와대 세종실. 제6차 대외경제위원회(대경위)를 주재한 노무현 대통령이 강한 어조로 말했다. 김현종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과 롭 포트먼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가 양국 간의 관세를 철폐하는 등 서로 배타적인 무역특혜를 부여하는 FTA 협상을 시작한다고 발표한 뒤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2006년 2월 16일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제6차 대외경제위원회를 주재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정부가 한미 FTA를 어떻게 시작했고, 무엇을 고민했으며, 어떻게 협상을 하고자 했는지를 고스란히 드러낸 발언이었다.

인수위, 팽창형의 기조 아래 내실형 포함

참여정부 초기에 대외개방 정책의 중심은 미국이 아니라 동북아시아였다. 2002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후보 정책자문단 단장이었던 김병준 정책기획위원장의 회고다.

“후보와 함께 마지막 프레임워크를 짤 때 캠프 내부에서 격론이 있었다. 공약기조를 개방경제 중심의 팽창형으로 가느냐, 부정부패 척결 중심의 내실형으로 가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서였다. 노 후보는 내실형에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정책자문그룹은 팽창형을 강조했다. 토론 결과 팽창형 기조로 정리됐다. 이윽고 후보가 ‘지도에 비행기로 2시간 이내 구역을 그려보라’고 했다. 동북아가 다 들어왔다.”

이후 인수위는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중심’을 국정목표의 하나로 넣었다. 대한민국이 21세기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 시대를 주도하기 위해 동북아 경제중심국가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출범 초기 참여정부는 이런 기조 아래 중국, 일본과의 FTA를 먼저 추진하기로 했다. 한국이 주도적으로 양국과 FTA를 체결하면, 중·일 FTA를 유도할 수 있고 동북아시아의 경제공동체 토대를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북미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유럽엔 유럽연합(EU)이 있는 상황이었다.

동북아 경제통합의 수단, FTA

시작은 한일 FTA였다. 노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FTA를 조기추진하기로 발표했다. 그 닷새 후인 2003년 6월 12일 국회 본회의에서 윤영관 외교통상부 장관은 한일 FTA의 추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한일 FTA는 단순히 경제문제가 아니라 평화안보문제이기도 하다. 과거 독일과 프랑스가 경제통합으로 유럽 평화의 기초를 마련했던 것처럼 이번에 노 대통령도 일본에 가서 경제통합, 공동번영이라는 비전을 제시했다. 그 핵심 중 하나가 동북아 국가 간의 경제통합인데, 그 전초 단계로서 한일 FTA가 중요하다. 동북아 경제중심을 내세우고 있는 참여정부로서는 한일 FTA가 해결 과제다.”

2003년 12월 22일 오전 외교통상부 청사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한일 FTA 체결을 위한 정부간 1차 협상회의.<사진=연합뉴스>

“대안 제시할 때까지 냉각기 유지해야”

정부는 2003년 9월 2일 확정한 ‘FTA 추진 로드맵’에 이런 기조를 담았다. 정부는 동아시아 핵심국가로 부상하기 위한 정책도구로 FTA를 적극 활용한다는 것이었다. 국민의정부 시절부터 추진해왔던 일본과 싱가포르와의 FTA를 조기에 실시하고, 아세안(ASEAN) 및 멕시코와도 가급적 빨리 추진하기로 했다. 중장기적으로는 미국과 EU 등 거대경제권과의 FTA, 한중일 FTA, 동아시아 FTA 등을 추진하기로 했다.

한일 양국은 2003년 12월부터 협상을 시작했다. 하지만 1년 가까이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일본측이 우리측의 관심사인 농수산물을 50%만 개방하겠다고 버틴 게 한 원인이었다. 한국의 입장에서 이는 원칙의 문제였다. 일본 안을 받아들이면 전례가 생겨 다른 FTA 협상 때 어려움에 처할 수 있었다. 김현종 본부장은 2005년 4월 6일 제4차 대외경제위원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원교근공’(遠交近攻) 전략 선택

“우리는 양측이 합의한 높은 수준의 포괄적 FTA를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일본측은 비관세 장벽, 정부조달, 경제협력 등 우리의 관심분야에 타협의 여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일본측이 먼저 수용 가능한 대안을 제시할 때까지 냉각기를 유지해야 한다. 시한보다 내용을 중시해 2005년 타결 목표 시한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각오로 대처해야 한다.”

한일 FTA가 난항을 겪으면서 동북아 경제통합의 길은 점점 험난해졌다. 게다가 일본과 중국의 주도권 경쟁으로 단기간에 중일 FTA나 한중일 FTA가 체결될 가능성이 낮았다. 정부는 이후 ‘원교근공’(遠交近攻, 먼 나라와 먼저 친교를 맺어 가까운 나라를 공략) 전략을 선택했다.

세계 각국의 변화 - FTA 의존 추세 강화

그 사이에 또다른 중요한 변화가 나타났다. 2003년 9월 도하개발아젠다(DDA) 협상을 위한 칸쿤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가 결렬됐다. 각국은 다자협상인 DDA의 성공을 무작정 기다릴 수 없었다. 양자간 FTA를 체결하려는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이미 FTA 등 지역협정체결국 사이에 이뤄진 무역이 전체의 50%에 육박했다.

경쟁국들이 우리의 수출시장국과 FTA를 맺으면 우리의 입지가 좁아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무역의존도가 70%인 우리에게 수출시장이 줄어드는 것은 사형선고와 다름없었다. 이를 상징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2004년 1월 멕시코는 자국과 FTA를 체결하지 않은 국가에 대한 타이어 관세율을 대폭 올렸다. 그 바람에 한국산 타이어를 실은 컨테이너 13개가 멕시코 항구에서 부산항으로 돌아왔다. 이후 한국산 타이어의 멕시코 수출이 급감했다. 반면 2004년 3월 멕시코와 EPA(FTA의 일종)를 맺은 일본은 타이어 수출의 대목을 맞았다.

정부는 뒤늦게 한·멕시코 FTA를 추진했다. 노 대통령까지 적극 나섰다. 하지만 멕시코는 아쉬울 게 없었다. ‘현대차 공장을 세워 달라’는 조건을 달고 배짱을 부렸다. 결국 FTA보다 낮은 단계인 전략적 경제보완협정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 한·멕시코 FTA는 멕시코가 우리에게 먼저 제안한 것이었다. 우리가 주저하는 사이에 멕시코는 일본을 선택했다. FTA를 제때 추진하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거대경제권과의 FTA 추진

세계적으로 FTA 체결이 속속 이뤄졌다. 우리나라로선 안정적 수출시장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이 보다 절실했다. 한·칠레 FTA에 이어 일본·싱가포르와 협상을 진행하던 정부는 보완책이 필요하다고 봤다. 정부는 2004년 5월 로드맵을 수정해 거대경제권과 동시다발적으로 FTA를 추진하기로 했다. 김현종 본부장은 2004년 8월 30일 청와대에서 열린 제1차 대경위에서 이렇게 밝혔다.

“동시다발적 협상이라야 경쟁국에 비해 지체된 FTA 체결 진도를 만회할 수 있다. 또 단기적으로 부정적 무역수지효과가 있는 FTA를 상쇄할 수도 있다. 협상 상대국의 경쟁국과 FTA를 추진하면 협상 상대국의 적극적인 태도를 유도할 수 있다. 특히 우리 스스로가 FTA 협상을 지속하는 모멘텀이 될 수도 있다.”


김 본부장은 FTA 정책의 종착역으로 미국과 일본, 중국, EU, 아세안 등 거대 경제권을 들었다. 이들이 우리의 전체 교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90%에 육박했다.

“아세안 등 여건이 성숙된 국가와는 이미 FTA 체결 교섭 등 공동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미국·중국·EU와 같이 여건이 성숙하지 않은 거대 경제권과는 캐나다·멕시코·유럽자유무역연합(EFTA) 등 교두보 국가와 FTA를 우선 추진하면서 외곽부터 접근하고 있다.”

캐나다를 공략해 미국을 얻어내다

이 전략은 한미 FTA에 부정적이었던 미국의 태도를 바꿨다. 정부가 캐나다에 접근하자 다급해진 미국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캐나다는 아시아에서 경제협력 파트너를 찾고 있었다. 캐나다의 외교통상부 차관과 차관보가 주한대사와 참사관을 지낸 한국통이었던 까닭에 양측 간 협의가 빠르게 진행됐다.


우리가 캐나다와 FTA를 맺으면 쇠고기 등 여러 수출품목에서 캐나다와 경쟁하던 미국은 우리 시장을 잃게 될 것이 뻔했다. 또 TV 등 우리의 상품을 캐나다에 무관세로 수출하면 NAFTA 회원국인 미국에 무관세로 수출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다시 김 본부장의 말이다.(2004년 8월말 제1차 대경위)

“지금까지 미국은 우리와 FTA를 추진하는 데 부정적 입장을 보였다. 그런데 최근 우리가 일본과 협상을 시작하고, 미국 인접국가인 멕시코·캐나다와 FTA 체결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를 시작하니까 이에 미국이 자극을 받았다. 미국은 우리와의 FTA 체결에 관심을 보이면서 우리가 준비되는 시점에서 협상을 개시할 수 있다고 먼저 오퍼를 해왔다. 미국이 먼저 FTA 협상을 거론했다는 것 자체가 이후 협상국면에서 우리의 입장을 강화시켜줄 것이다.”

이로부터 약 석 달 후인 11월 칠레 산티아고 한미 통상장관회담장. 로버트 졸릭 USTR 대표가 김 본부장에게 말했다. “한국이 미국과 FTA를 협의해보면 어떻겠는가?”

김현종의 깜짝 주장, “FTA, 미국부터 해야한다”

미국의 변화는 김 본부장이 이끌어낸 것이었다. 2003년 2월 김현종 WTO 법률자문관은 노무현 대통령당선인에게 통상현안을 브리핑했다. 그리고 그해 5월 김 자문관은 외교통상부 통상교섭조정관으로 발탁됐다. 김 조정관은 그때부터 한미 FTA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김병준 위원장의 말이다.

“정부에서 처음으로 한미 FTA를 추진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던 이가 김현종 조정관이었다. 김 조정관은 날 찾아와서 ‘미국부터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야 다른 국가와 FTA를 협상할 때 우월적 위치를 차지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깜짝 놀랄 만한 주장이었으나 설득력이 있었다. 당시 정부에서는 한미 관계만 떼어놓고 보곤 했는데, 김 조정관은 한일, 한중, 한EU를 다 보고 ‘전략적으로 미국이 먼저다’라고 설명했다. 시나리오를 잘 짰다. 청와대는 김 조정관의 스케줄을 따라갔다.”

2004년 7월 29일 노 대통령이 오후 청와대에서 김현종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정부는 2004년 하반기 한미 FTA에 대한 미국의 관심을 끌어냈다. 그러나 정부 내부에선 미국과 중국 가운데 어느 곳과 FTA를 먼저 하는 게 이익인지 이견이 팽팽했다. 노 대통령은 제1차 대경위에서 “거대경제권과의 FTA 추진이 개방 정책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고 결국 우리가 가야할 방향”이라며 큰 원칙만 제시했다.

“한미 FTA 조기 추진이 바람직”

2004년 11월 6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 14층 중회의실에서 이헌재 경제부총리 주재로 열린 제2차 대경위. 산업연구원 등 3개 연구기관이 미국과 중국, EU 중 어느 국가와 먼저 FTA를 추진하는 게 좋을지에 대한 연구 결과를 보고했다.

산업연구원은 중국을 중시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과 무역연구소는 미국을 우선시했다. 결국 연구결과를 종합해 3차 회의 때 보고하기로 결론이 났다. 한 달여 뒤인 12월 16일 제3차 대경위. 오영호 대경위 실무기획단장은 노 대통령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산업연구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농촌경제연구원, 해양수산개발원의 공동연구 결과 미국과 먼저 FTA를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나왔다. 물론 서비스업 민감도도 높고 이익집단의 강력한 반발도 예상된다. 그럼에도 미국은 시장 규모면이나 제품의 경쟁력이 판가름 나는 수준 높은 시장이다. 제조업의 경우 반드시 필요한 시장이다. 농수산물의 전반적 민감도도 중국보다 낮다.

또 한미 FTA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구축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제공한다. 협상 개시만으로도 대외 신인도가 올라간다. 외교·안보 측면에서도 의미 있다는 의견도 많다. 한미 FTA를 참여정부 임기 내에 마무리 짓는다는 구상이 바람직하다.”

중국은 왜 1순위에서 밀렸을까

중국은 왜 1순위에서 밀렸을까. 농수산물의 막대한 피해, 단순 제조업의 퇴출, 노동력 이동에 따른 노동시장 교란 등 경제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이 막대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EU는 당시 DDA 협상에 전념하고 개별 FTA를 당분간 유보한다는 방침을 세워놓은 상태라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노 대통령은 제3차 대경위를 이렇게 마무리했다.

“앞으로 이 방향으로 매우 적극적으로 추진한다, 이렇게 결정하겠다. 좀 더 심도 있게 논의해서 적절한 속도와 순서를 파악하고 비용과 손실을 최소화하자.”

“노 대통령, 나라 팔아먹는 게 아닐까 걱정했다”

한미 FTA 추진 과정에서 노 대통령의 역할은 지대했다. 노 대통령은 한미 FTA에 대한 거센 반대를 온몸으로 감당해냈다.

2006년 3월 28일 오전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미 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 발족기자회견에서 영화인, 농축수산 대책위, 교수학술공대위를 포함한 참가자들이 기자회견문을 낭독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2006년 3월 28일 영화계와 농민, 학계, 노동계 등 270개 단체가 ‘한미 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를 발족했다. 이들은 최고의 경쟁력을 갖춘 미국에 시장을 개방하면 농업과 중소기업이 망해 대량실업 사태가 발생하리라고 주장했다. 우리나라가 투기자본의 천국이 될 것이라고도 했다. 이정우 전 청와대 정책실장(경북대 교수), 정태인 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 등 청와대 참모 출신들도 반대 목소리를 냈다. 이정우 실장의 이야기다.

“웬만한 나라와 FTA를 맺으면 득이 많다. 이는 교과서에도 나오는 말이다. 하지만 한미 FTA는 특수하다. 다른 나라는 미국과 같은 FTA를 요구하지 않는다. 미국과의 FTA는 득보다 실이 더 많다.”

노 대통령도 처음에는 이 같은 우려를 가지고 있었다. 김병준 정책실장의 말이다.

“처음에 대통령은 ‘나라를 팔아먹는 게 아닐까’라는 걱정을 했다. 세계 최대이자 최강인 시장과 경쟁하는 것 아닌가. 나도 겁이 벌컥 났다. 그러나 대통령은 ‘개방하지 않고 발전하는 국가는 없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폐쇄하면 망하는 외길이지만, 개방하면 우리 노력 여하에 따라 성패의 갈림길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협상하다 정 아니다 싶으면 안하면 된다는 전제 아래 한번 해보자’면서 결심했다.”

노 대통령이 이렇게 결정한 것은 우리 경제가 직면한 대내외적 여건 때문이었다. 노 대통령은 우선 FTA 시대에 시장에서 고립되지 않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무역의존도가 높은 나라이기에 특히 그러했다. 일본과 중국이 미국과 FTA를 체결하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자는 것이었다.


내적 요인도 있었다. 한국호는 IMF 외환위기 이후 제조업만으로 먹고 살기 힘들어졌다. 그렇다고 서비스 산업이 경쟁력을 갖춘 것도 아니었다. 노 대통령은 서비스 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서비스 대국인 미국에 문을 열고 경쟁에 노출시키자는 생각이었다.

국민에 대한 믿음도 ‘외로운 결정’의 밑바탕이 됐다. 노 대통령은 우리 국민이 개방의 역사 속에서 훌륭히 헤쳐나왔다고 봤다. 예컨대 1996년 유통업을 완전 개방했지만 우리 기업은 외국 기업을 따돌리고 국내 1위를 지켜냈다. 1999년 일본산 수입규제도 철폐했지만 전기밥솥 등 일부 제품은 일본에 역수출을 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손해지만 국가를 위해 반드시 해야”

2005년 10월 8일 청와대 대통령 관저에서 열린 한미 FTA 추진 관련 관계부처 장관 회의. 노 대통령의 말이다.

“나도 걱정이 많고 여러분들도 걱정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거역할 수 없는 시대의 대세라고 생각하자. 우리는 미지의 세계에, 거친 경쟁이 존재하는 곳에, 불확실한 환경에 항상 몸을 던져왔고 기어코 성공했다. 그 자신감을 가지고 다시 한 번 밀고 나가자.”

노 대통령은 한미 FTA 추진이 정치적으로 손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2007년 3월 20일 농·어민과 함께하는 수요자 중심 업무보고에서 노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특단의 의지였다. FTA로 정치적 입장이 얼마나 난감해지겠는가. 아무런 이득이 없다. 한미 FTA는 다음에 어느 쪽이 정권을 잡아도 안할 것 같았다. 정치적으로 손해지만 앞으로 국가산업, 경제적인 문제에 있어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신뢰성 문제를 제기한다면 약속해라”

미국은 한미 FTA에 관심을 보이면서도 조건을 내걸었다. 스크린쿼터 등 통상현안을 해결하거나 의미 있는 진전을 내놔야한다고 했다. 2005년 2~4월 서울과 워싱턴에서 열린 세 차례의 한미 FTA 사전실무점검회의에서 미측은 이런 입장을 거듭 확인했다.

노 대통령의 결단이 필요했다. 2005년 9월 8일 노 대통령의 중남미 순방 비행기 안. 김현종 본부장은 노 대통령에게 “선진형 통상국가로 나가기 위해 한미 FTA가 필요하다”며 “협상과정에서 노력하면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지만 미국이 스크린쿼터 문제로 신뢰성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추진하자. 약속해라”고 응답했다. 김 본부장은 9월 19일 워싱턴으로 날아가 대통령의 메시지를 전했다.

“스크린쿼터 73일, 1999년에 거부한 것을 받게 한 것”

노 대통령은 2003년 10월 이미 스크린쿼터를 줄여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당시 APEC 정상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태국 방콕을 방문한 노 대통령은 미국 경제인에게 “이른 시일 내에 스크린쿼터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노 대통령은 2004년 12월 16일 제3차 대경위에서 이렇게 말했다.

“영화 부분은 (반대여론에 대한 정부의 대응과 대책에) 좀 불만이 있다. 지난번 APEC에 가서 ‘이 부분 열자’고 얘기한 것은 나름대로 영화인들도 만나보고 판단이 있어서 한 얘기였다. 저항이 강하리라고 예상하지만 정부가 의지를 가지고 단호하게 나가줬으면 좋겠다.”

정동채 문화관광부 장관이 2006년 1월 27일 오전 문화관광부에서 5년간 4000억원 규모의 한국영화발전기금을 영화계에 지원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스크린쿼터 축소 대책을 발표하고 있다. 정부는 전날 스크린쿼터 축소 방침을 발표했다.<사진=연합뉴스>

이는 국민의정부 시절 미국에 한 약속 때문이었다. 1999년과 2000년 국회는 ‘한국영화 점유율이 40%를 넘으면 스크린쿼터를 줄일 수 있다’고 했다. 이미 2001년부터 한국영화는 평균 50%를 넘는 점유율을 보이고 있었다. 정부는 2006년 1월 26일 스크린쿼터를 146일에서 73일로 줄였다.

‘스크린쿼터 73일’은 국민의정부 시절 한미 투자협정(BIT)을 논의할 때 우리측이 제안한 내용이었다. 미국은 완전폐지를 주장하고 있었다. 이 문제로 BIT 협상이 난항을 겪었다. 김현종 본부장이 2006년 7월 31일 국회에서 한 발언이다.

“1999년 미국이 받지 않았던 것을 이번에 우리가 받게 한 것이다. FTA 틀 내에서 스크린쿼터 73일을 협상하면 BIT처럼 FTA가 깨질 것을 우려해서다. 이에 사전에 합의한 것이다.”

“FTA가 아니었더라도 쇠고기는 수입을 재개해야 했다”

스크린쿼터 이외에도 미국측은 쇠고기 수입문제, 자동차 배출가스 기준 유예문제, 약가 평가방식 변동문제를 먼저 해결하라고 요구했다. 이른바 ‘4대 선결조건’이다.

정부는 2006년 10월 30일 약값 재평가제도 개정을 잠정적으로 중단했다. 11월 6일 자동차 배출가스 강화기준을 일부 유예했다. 2007년 1월 13일 미국산 쇠고기 금수조치를 해제했다. 미측이 제기한 주요 통상현안을 수용한 것이었다. “협상력을 훼손한 굴욕외교”라는 비판이 나왔다.

2006년 11월 24일 오후 인천 영종도에 위치한 국립수의과학검역원 인천지원 직원들이 이물질 검출기를 통해 발견된 뼛조각이 든 살치살 부위를 공개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이에 대한 정부의 설명은 이렇게 요약된다. “4대 선결조건은 FTA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 협상 대상이 아닌데 FTA 틀 안에서 협상할 수는 없다. 또 한미 FTA를 시작하기 위해 미리 내준 것도 아니다.” 김 본부장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대해 2006년 4월 18일 국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FTA가 아니었더라도 우리는 WTO 회원국으로서 WTO 검역협정에 따라야 한다. 보편적인 국제기준은 30개월이다. 우리는 30개월을 받았을 뿐 아니라 뼈도 뺐다. 더 위험한 부분인 내장과 햄버거 고기, 차돌박이까지 뺐다. 한미 FTA 추진을 발표한 시기에 쇠고기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에 둘이 연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 2~3주 동안 일본을 비롯한 많은 아시아 국가가 한국처럼 쇠고기 문제를 풀었다.”

정부는 2003년말 미국에서 발생한 광우병 때문에 쇠고기 수입을 중단했지만 언젠가는 수입을 재개해야 했다. 양국은 2005년 10~12월 세 차례 전문가 회의를 열어 수입재개조건을 논의했다. 이듬해 1월 쇠고기 수입을 재개하기로 했다. 하지만 정부는 2006년말 미국산 쇠고기에서 뼛조각을 발견하고 다시 수입을 중단했다. 다 양국이 합의한 수입위생조건에 따른 것이었다.

“배출가스 기준 때문에 반덤핑 관세 받으면 수출 중단”

자동차 배출가스 허용기준 유예조치는 무역마찰을 감안한 것이었다. 정부는 2006년 배출가스 기준을 강화할 예정이었다. 미측은 기준적용을 늦춰달라고 했다. 정부는 1만대 이하의 자동차를 파는 모든 회사에 똑같이 유예기간을 2년 줬다. 김 본부장의 설명이다.

“과거 자동차 번호판을 직사각형으로 바꿀 때의 일이다. ‘1만대 미만을 팔기 위해 자동차 라인을 바꾸는 것은 무리’라는 의견이 잇따랐다. 그래서 1만대 미만 판매업체에 예외를 인정했다. 배출가스 기준도 이에 따른 것이다. 게다가 우리의 환경기준을 유지하면서 2년만 유예했다. 참고로 2004년 우리는 미국에 자동차를 101억달러어치 수출하고 1억달러어치 수입했다. 유연성을 발휘하지 않아 하이닉스 반도체처럼 상계관세나 반덤핑 관세를 받는다면 자동차 수출이 막히는 게 아닌가.”

의약품의 경우 미측은 우리측의 약가재평가방식 변경 가능성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다. 그러나 보건복지부는 2006년 5월 약제비 적정화 방안을 발표했다. 한·미간 사전 약속이 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의약품 부분은 한미 FTA 틀 안에서 협상을 진행했다. 사전에 내준 것이 아니라는 주장의 근거다.

“결과적으로 스크린쿼터 빼고 들어준 것이 없다”

논란은 2006년 7월 MBC가 한 문서를 공개하면서 더욱 커졌다. 2005년 11월 미국 하원이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이었다. “한국의 통상장관이 최근 미국을 방문했을 때 이러한 관심사를 시기적절하게 검토할 것(adressed)이라고 확신시켰다”는 내용이었다. 방송사는 ‘검토한다’는 외교적 표현인 ‘adressed'를 ‘처리한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2006년 7월 31일 김현종 본부장이 국회 한미 FTA 특위에 참석해 1, 2차 협상 결과를 포함한 한·미 FTA 협상 추진과정에 대한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7월의 마지막 날 국회에서 열린 한미 FTA 특위에서 ‘4대 선결조건’ 논란이 절정에 이르렀다. 김 본부장은 이 자리에서 이렇게 밝혔다.

“미국이 4대 선결조건을 요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정부 차원에서 이를 선결조건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미국의 요구를 들어줄 의사가 없었고, 들어줄 상황도 아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스크린쿼터 빼고 들어준 게 없다. 미국 요구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FTA 협상을 출범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다. (수용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적절한 시간에 검토하겠다고 얘기한 것이었다.”

미국은 APEC 때 한미 FTA 추진 발표를 원했다

FTA 협상 출범에 동의한 미측은 2005년 11월 중순 부산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양국 정상이 한미 FTA 추진을 발표하길 원했다. 미국의 ‘무역촉진권한법’(TPA) 때문에 일정이 촉박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TPA는 미 의회가 행정부에 통상 협상 권한을 위임한 것을 말한다. 위임기간 동안 미 의회는 협상에 관여할 수 없다. 협상이 끝난 뒤 합의문을 받아들일 것이냐 말 것이냐만 결정한다. 미 행정부 입장에서 보면 보다 자유롭게 협상을 진행할 수 있다.

미 정부가 의회로부터 받은 TPA의 시한은 2007년 6월 30일이었다. 하지만 보통 의회 심의 90일 전까지 협상결과를 보고하므로 실질적인 협상시한은 3월말까지였다. 미측은 협상기간이 1년밖에 남지 않은 점을 감안해 하루바삐 진행하길 원했다.

미 의회가 FTA에 우호적이지 않았다는 점도 미측이 APEC 카드를 강조한 중요한 이유였다. 2005년 7월 미 하원은 미국과 도미니카, 코스타리카,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온두라스, 니카라과 사이의 중미 FTA를 비준했다. 찬성 217표, 반대 215표로 2표 차이였다. 미 정부는 의회의 지지를 얻기 위해 양국 정상의 의지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한미 FTA 협상 개시를 연초에 선언한 이유

우리 정부도 복잡한 사정을 안고 있었다. 부동산값을 잡기 위해 8·31 부동산 종합대책의 핵심인 종합부동산세법을 국회에서 통과시켜야 했다. 또 행정수도 이전과 함께 국가균형발전 사업의 양대 축인 공공기관 지방이전 대상 지역도 선정해야 했다.

무엇보다 농민의 반발이 거셀 것이 뻔한 한미 FTA를 WTO 쌀협상 비준안과 함께 추진하는 것은 큰 부담이었다. 쌀협상 비준안은 쌀 관세화를 2014년까지 10년간 유예하되 수입쌀의 의무수입물량을 해마다 늘리는 등 쌀 시장을 개방한다는 내용이었다. 정부는 지원책 등 후속대책 마련에 나섰으나 농민은 ‘농업인 사망선고’라며 쌀협상 비준안을 격렬히 반대했다.

때문에 정부는 국내 현안을 처리한 뒤 한미 FTA를 추진하고자 했다. 노 대통령은 2006년 신년연설에서 한미 FTA를 추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쌀협상 비준안 국회통과(11월 23일), 공공기관 이전 지역 선정(12월 26일), 종합부동산법 국회통과(12월 31일) 등 현안을 해결한 뒤였다.

미국 정부의 고민은 김현종 본부장이 협상 개시를 알리는 자리에 참석하는 것으로 자연스레 풀렸다. 김 본부장은 2006년 2월 3일 오전 5시(한국시간) 미 의회 의사당에서 롭 포트먼 USTR 대표와 함께 한미 FTA 협상 개시를 공식 발표했다. 김 본부장은 2006년 2월 16일 국회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미국이 중미 FTA를 비준시킬 때 불과 2표 차이밖에 안났다. 포트먼 대표가 부탁했다. 체결 이후 비준이 안되면 양국 관계가 치명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민주·공화) 양당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는 차원에서 참석을 부탁하기에 거기에 응했다.”

‘A+’와 ‘수’는 균형 이룬 협상에 대한 평가

2006년 6월 5일 미국 워싱턴에서 시작한 한미 FTA 협상은 난항을 거듭했다. 1차 협상에서 양측은 한 달 전 교환한 협정문 초안을 바탕으로 통합협정문을 작성하려 했다. 하지만 농업과 섬유, 무역구제 등 분야에서 접점을 찾지 못했다.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2차 회담에서 미측은 보건복지부의 약제비 적정화 방안 시행방침에 반발해 협상을 중단시켰다. 미국 시애틀에서 열린 3차 협상에서도 양측은 많은 분야에서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신경전도 치열했다. 4차 협상에서 우리측이 감귤의 민감성을 알리기 위해 협상장을 제주도로 정했다. 미국측은 5차 협상장을 주요 쇠고기 생산지인 몬태나로 정했다. 5차 협상에서 우리측은 2006년말까지 해결해야 했던 무역구제 분야에서 요구사항을 따내기 위해 미국측의 관심분야인 자동차와 의약품 협상을 전격 중단했다.

양측은 2007년 3월까지 농업과 섬유분야 등 주요 쟁점사항을 놓고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평행선을 달렸다. 3월 26일 최후의 담판을 위해 양측 최고위급 대표가 서울 하얏트호텔에 모였다. 마감인 3월 31일 새벽 1시가 다가왔지만 우리측은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미측이 연장을 제안했다. 양측은 협상을 48시간 연장하기로 했다.

양측은 연장시간을 넘긴 4월 2일 낮 12시 40분 협상을 타결했다. 웬디 커틀러 미측 수석대표와 김종훈 우리측 수석대표는 협상결과에 각각 ‘A+’와 ‘수’라는 점수를 줬다. 팽팽한 협상 결과 이익의 균형을 이뤘다는 평가였다.


이후 미 의회를 의식한 미 행정부가 협상결과에 ‘신통상정책’을 반영해달라고 요청했다. 양측은 6월 21~29일 추가 협의를 벌였다. 양측은 추가협의 결과도 전체적으로 이익의 균형을 유지한 것으로 평가했다.

“쌀 문제가 되면 FTA 못합니다”

미국과의 협상은 녹록치 않았다. 협상단은 치밀한 준비로 미측 협상단을 마주했다. 이미 정부는 칠레와 싱가포르, EFTA, 아세안 등 여러 나라와 FTA 협상과 WTO DDA 등 다자협상에서 많은 협상 경험을 확보한 상태였다.

미국은 우리에게 익숙한 상대이기도 했다. 정부는 1998년 IMF 외환위기 당시 투자를 더 유치하기 위해 1998~2000년 미국과 BIT를 협상했다. 서비스와 투자 부문에서 미측의 요구가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정부는 또 2003년부터 외교통상부 자체 연구뿐 아니라 인하대, 전국경제인연합회, 한국무역협회,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농촌경제연구원 등에 용역연구를 실시하는 등 13번에 걸쳐 한미 FTA의 타당성을 연구해놓고 있었다.

특히 2005년 1월부터 6월까지 예비협의, 6번에 걸친 양국 통상장관회담을 통해 이슈를 파악한 상태였다. 미측은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여러 번 FTA 협상을 해봤지만 한국처럼 많은 준비로 정교한 논리를 갖춘 협상단은 없었다”고 우리측에 말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쌀이었다. 쌀은 처음부터 우리측의 마지노선이었다. 노 대통령은 2005년 10월 8일 한미 FTA 관계장관이 모인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쌀은 한미 FTA를 못했으면 못했지, 한미 FTA 협상에 안 들어가는 것으로 전제해야 한다. 쌀 문제가 되면 한미 FTA 못한다. 쌀은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WTO 쌀협상 비준안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본다.”

“미 해운시장 요구했더니 쌀 포기했다”

미측은 이같은 입장을 잘 알고 있었다. 2007년 2월 26일 국회에서 열린 한미 FTA 특위에서 나온 김종훈 협상단 수석대표의 말이다.

“예외 없는 쌀 개방원칙이 미측의 핵심이익 수준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미측은 지금 7차까지 협상하면서 한 번도 공식적으로 제기하지 않았다. 다만 이것을 기자가 묻는 경우가 많다. 물으면 상대편이 이야기한다. 듣다보니 그 이야기 수준이 자꾸 올라갔다. (쌀 문제와 관련해) 복안을 가지고 있다. 상대편이 아직 쌀 문제를 제기하지 않아 그 무기를 쓰지 않았다.”

미측 협상단은 마지막 고위급 협상 기간이던 3월 26일부터 마지막까지 쌀시장 개방을 강하게 요구했다. 드디어 ‘무기’가 나왔다. 미측이 안보를 이유로 고수했던 ‘존스 액트’를 공략한 것이었다. 존스 액트란 미측이 제조하고 소유한 배만 미국 해운을 담당한다는 법안이다. 협상을 끝낸 뒤인 4월 4일 김현종 본부장은 국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국측은 마지막 순간까지 쌀을 요구했다. 그래서 우리는 ‘당신네들은 존스 액트를 1920년부터 갖고 있다. 우리는 세계 조선시장의 40%를 갖고 있다. 그러니 존스 액트를 철폐하라’고 했다. 미국이 쌀을 제외키로 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카드를 내놓지 않았다”

우리측 협상단의 협상력은 협상 마지막 일주일에 빛을 발했다. 2007년 4월 3일 열린 한미 FTA와 한국경제 워크숍에서 김현종 본부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미국 협상단이 3월 26~27일 협상 테이블에 내놓은 것이 없었다. 그때 ‘3월 31일이 협상 마감이 아니겠구나’라는 느낌이 딱 들었다. 계산해보니 4월 1일 밤 열두시까지도 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도 협상할 때 마지막 순간까지 카드를 내놓지 않았다.”

2007년 3월 29일 한미 FTA 최종 협상장인 서울 한남동 하얏트호텔에서 김현종 본부장(위)과 카란 바티아 USTR 부대표가 각각 협상장으로 들어오고 있다.<사진=연합뉴스>
협상단은 강수를 뒀다. 위기의 순간은 3월 29일이었다. 김 본부장이 ‘결렬이구나’라고 생각할 정도로 미측의 자동차 관세 양허안이 형편없었다. 미 협상단의 제안은 승용차 시장을 5년, 트럭 시장을 10년에 걸쳐 개방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게다가 미측은 ‘의회의 강력한 입장’이라는 이유로 쇠고기 수입 재개 시점을 서면으로 약속해줄 것을 요구했다. 우리측은 ‘쇠고기 수입 문제는 FTA 협상과 별개다’ ‘5월 국제수역사무국의 판정 이후 해결할 사안이다’라며 버텼다.

3월 29일 밤 한국측 협상단은 ‘협상은 끝났다’고 통보하고 숙소로 돌아갔다. 이때 양국 정상 간의 통화가 있었다. 노 대통령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대해 ‘국제수역사무국의 결정이 나오면 합리적 수준으로 합리적 시기에 처리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30일 새벽 4시 미측이 새로운 안을 들고 나왔다.

“48시간 연장 때도 최종이 아니라는 것 알았다”

마감 시간인 3월 31일 새벽 1시가 다가왔다. 우리측 협상단은 미측의 진의를 떠봤다. 김종훈 수석대표는 4월 4일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3월 31일 새벽 1시가 다가오면서 저쪽이 과연 데드라인을 연장할 것인지 몇 번 떠봤다. 우리가 갖고 있는 카드 중 몇 개를 주면서 저쪽의 반응을 살폈다. 그런데 타결 쪽으로 움직이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더 있다는 것이었다. 새벽 1시가 가까워오니까 미측이 먼저 연락을 했다. ‘48시간 더 하는 게 어떠냐’는 것이었다. 48시간이면 월요일 새벽인데 미국은 일요일 아닌가. 그때 이미 ‘아 이것도 최종은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양측은 줄다리기를 계속했다. 미측은 중요 관심사였던 쇠고기 등 농업 분야에서 ‘예외 없는 관세 철폐’를 요구했다. 우리측은 민감분야를 지켜야 했다. 미측이 움직이지 않자 3월 31일 우리측은 초강수를 던졌다. 미국이 탐내는 쇠고기 시장을 장기간(15년)에 걸쳐 단계적으로 개방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관세 폐지안을 제시하고 협상장을 나가버렸다.

‘받거나 말거나’ 식의 배짱이었다. ‘미국이 절대 농업을 놓치진 않을 것이다. 협상을 깨지는 못할 것이다’라는 판단이었다. 곧 미측 협상단이 전화를 걸어왔다. 협상이 이어졌다.

협상의 물꼬는 자동차에서 미국측이 3000cc 이하 승용차에 대한 관세를 즉시 철폐하겠다는 뜻을 밝혔을 때 트였다. 이에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한 한국측 협상단은 4월 2일 새벽 방송과 통신 등 나머지 쟁점을 다루면서 농업 부문도 협상을 진행했다. 미측이 마지막 카드를 보인 것은 이날 동이 틀 때쯤이었다. 양측은 4월 2일 낮 12시 40분쯤 협상안에 합의했다.

“절차적 문제에 미흡한 점을 반성한다”

협상단은 정부가 한미 FTA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우는 바람에 국내 여론과도 싸워야 했다. 정부는 2006년 2월 2일 한미 FTA 공청회를 열었다. 대통령훈령인 자유무역협정 체결절차규정에 따라 협상 시작 전에 이해 당사자와 관계 전문가의 의견을 듣기 위해서였다.

2006년 2월 2일 오전 삼성동 코엑스에서 외교통상부 주최로 열린 한미 FTA 공청회에서 한국농민회총연맹 회원들이 FTA 반대 현수막을 펼치려 하자 진행요원들이 제지하고 있다. 공청회는 무산됐다.<사진=연합뉴스>

공청회는 이날 서울 코엑스에서 오전 9시 30분 열렸다. 농민단체와 스크린쿼터영화인대책위 관계자들이 현수막을 내걸며 격렬히 항의했다. 공청회는 2시간 만에 중단됐다. 그런데 정부는 이날 오후 대외경제장관회의를 열어 한미 FTA를 추진하기로 결의했다. 김현종 본부장은 2006년 7월 31일 국회 한미 FTA 특위에 출석해 이같이 말했다.

“미흡한 점이 있었다. 그것은 반성하겠다. 공청회가 중단되는 등 한미 FTA 출범의 국내 절차가 일부 원활히 진행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유감으로 생각한다. 그날 공청회를 하고 난 다음에 대외경제장관회의를 해서 발표한 것은 좀 서둔 느낌도 든다. 그렇지만 한미 FTA의 중요성을 봤을 때 필요하다는 판단을 했다.”

정부는 이후 토론회와 이해단체의 의견을 수렴하는 기회를 여러 차례 마련했다. 그러나 한번 잃은 민심을 만회하기는 힘들었다. 절차적 문제는 두고두고 문제가 됐다.

투명성과 협상력의 반비례 작용

협상단은 정보 공개 딜레마와도 싸워야 했다. ‘졸속 추진’ ‘밀실 행정’에 대한 비판여론을 설득하려면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하지만 이 경우 협상력이 떨어진다. 2007년 7월 5일 국회 제26차 한미 FTA 특위에서 김종훈 수석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협상에서 서로가 유연성을 발휘해야 양쪽이 다가설 수 있는데, 그것과 국내적인 투명성 간에는 반비례하는 길항작용이 있을 수밖에 없다. 투명하게 진행하면 그 과정에서 유연성이 줄어들 수밖에 없고, 유연성을 갖고 하려면 투명성이 내려간다.”

협상단은 성동격서 전략을 사용할 수도 있고, 10을 얻기 위해 20을 주장할 수도 있다. 언론은 때때로 이런 전략적인 내용을 공개했다. 국민의 알 권리 충족을 위한 것이지만 이런 보도가 나올수록 협상단의 설자리는 줄어들었다.

2006년 11월 22일 경향신문은 외교통상부의 문건을 인용해 “한미 FTA ‘투자’ 항목 주요쟁점 ‘투자자-국가소송제’ 정부 졸속추진 논란”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1면에 실었다. ‘투자자-국가 소송제는 공공정책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 간접수용 범위를 놓고 논쟁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김종훈 수석대표는 일주일 뒤 국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특위에 비공개로 제출한 자료가 보도된 것을 협상단은 불편하게 생각하고 있다. 간접수용 개념에 이견이 있어 오남용을 줄이고 공공정책의 여지를 확보하도록 범위를 축소하는 방향을 논의했다. 4차 협상에서 이를 제시했고 설득하는 중이다. 구체적인 이슈에 대한 찬반 여론이 우리 내부에만 있으면 좋은데 미국측도 이를 면밀하게 모니터하고 있다. 미측을 앞에 두고 설전을 벌일 때 우리 입장을 상당히
축소시키는 역효과가 있다.”

2006년 11월 22일 경향신문(오른쪽)과 2007년 1월 18일 한겨레신문 기사.

“문서 유출 땐 배신감을 느꼈다”

이 와중에 문서유출 사건이 또 발생했다. 2007년 1월 18일 인터넷매체 프레시안과 한겨레신문은 우리측 협상단이 1월 13일 국회 한미 FTA 특위 의원에게 비공개로 공개한 보고서를 바탕으로 기사를 내보냈다. ‘한미 FTA 협상에서 우리측의 주요 요구 사항인 무역구제 개선을 포기하고 다른 쟁점을 얻기 위한 지렛대로 활용하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상황은 이랬다. 미측은 2006년 12월 5차 협상에서 무역구제의 비합산 조치(반덤핑 조치 발동을 위한 산업피해 판정 때 한국산을 분리해서 평가)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통보했다. 미 의회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을 넘어선다는 이유에서였다. 우리측은 ‘내놔라’고 계속 요구했다. 우리가 양보할 수 없는 것을 지켜내려는 카드였다.

“화가 난 정도가 아니라 배신감을 느꼈다”

언론이 문건을 공개할 당시는 6차 협상에서 우리측 협상단이 한참 값을 올리고 있던 때였다. 언론 보도는 결과적으로 미측에 우리의 패를 보여준 셈이었다. 미측 협상단이 ‘(기사) 잘 봤다’고 인사했다.

김종훈 수석대표는 한미 FTA 협상이 끝난 뒤 국정브리핑과 가진 인터뷰에서 “화가 난 정도가 아니라 배신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결국 우리측은 무역구제 비합산조치를 강조해서 신약 최저가 보장 철회와 투자자-국가간 분쟁해결절차 예외조항 등을 얻어냈다. 하지만 그 과정은 곱절로 힘들었다.

“진짜로 하는 겁니까”

협상단은 정부 부처의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김병준 위원장의 회고다.

“각 부처와 싸워가면서 협상했다. 김현종 본부장은 힘들 때마다 날 찾아왔다. ‘진짜 하는 겁니까. 대통령 생각은 안 바뀌었습니까’라고 묻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하세요’라고 했다.

2007년 1월 다보스 포럼 특사로 다녀왔는데, 김 본부장과 함께 귀국했다. 쇠고기 문제로 시끄러울 때였다. 그때도 김 본부장은 ‘대통령이 흔들리고 있는 거 아니죠’라고 묻더라. 그래서 ‘지금 물러설 수 없다. 사람들이 FTA를 꽃놀이패로 사용한다고 하는데 중단한다고 해봐라. 찬성측과 반대측 모두 난리칠 것이다’라고 답했다. 그랬더니 김 본부장이 ‘무조건 고(Go) 합니다’라고 하더라.”

2006년말 미국산 수입 쇠고기에서 뼛조각을 발견한 정부는 이를 반송했다. 미측은 정부에 엄청나게 항의했다. 작은 뼛조각 하나 나왔다고 물건을 돌려보낸다면 한국 자동차에서 인체에 해로운 물질이 하나라도 나오면 전부 돌려보내겠다는 것이었다. 김병준 위원장의 말이다.

“이럴 때 대통령의 입장과 태도에 따라 통상교섭본부장이 내려앉는 것이다. 대통령이 농림부의 입장이 맞다고 하면 본부장이 내려앉는다. 대통령은 어떨 때 보면 농림부의 편을 들었다가, 다시 보면 아니고 그랬다.”

“자기들 들으라고 이야기한 줄 아나”

대통령 발언에 대한 해석을 놓고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2007년 3월 13일 노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협상단에게 “경제외적인 문제를 고려할 필요 없다”며 철저히 실익 위주로 협상하되 기간을 넘겨 협상할 수도 있는 자세를 가지라고 주문했다. 김병준 위원장의 기억이다.

“김 본부장이 기겁해서 찾아왔다. 대통령의 발언을 보고 농림부가 갑자기 협상조건을 강하게 내걸었다는 것이었다. 김 본부장은 ‘곧 대통령이 해외순방 나가는데 이대로 가면 큰일나므로 한 마디 해주고 나가셔야 한다’고 했다. 대통령에게 그 이야기를 전했다. 대통령은 ‘이 친구들(농림부), 자기들 들으라고 이야기 한 줄 아나’라고 하더니 이튿날 정확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2007년 3월 20일 노 대통령이 양재동 aT센터에서 열린 2007 농·어업인 정책 업무보고에 참석해 박홍수 농림부장관으로부터 업무보고를 받고 있다.<사진=연합뉴스>

3월 20일 노 대통령은 농·어업인과 함께 하는 수요자 중심 업무보고에서 “농산품도 상품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며 “농업도 시장의 힘과 원리에 따라 지배되는 시장 영역 안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자”고 말했다.

FTA 허브로 나가자

2007년 4월 30일 이경태 대외경제정책연구원장은 한미 FTA 특위에서 한미 FTA의 경제적 효과를 분석한 자료를 보고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등 11개 국책연구기관이 협상 결과를 근거로 연구한 것이었다.

이에 따르면 한미 FTA 체결로 실질 국민총생산은 10년간 80조원(6%) 늘어난다. 국민을 5000만명으로 보면 국민 1명당 실질소득이 160만원 증가하는 셈이다. 또 가격 인하 등으로 소비자도 20조원의 후생 혜택을 본다. 1인당 40만원의 돈을 덜 쓰게 된다는 계산이다.


한미 FTA는 우리나라가 FTA 허브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는 계기도 마련했다. 거대경제권인 미국과 EU, 중국, 일본은 지역 헤게모니 등 정치경제적 이유로 서로 FTA를 체결할 가능성이 낮다. 우리나라가 이들 국가와 개별적으로 FTA를 체결한다면 거대 경제권을 잇는 FTA 허브가 될 수 있다. 이 경우 배타적인 무역특혜를 찾아 세계 각국이 우리나라에 직접투자를 늘릴 가능성이 높아진다. 게다가 우리는 동북아 경제중심이 돼 경제공동체를 주도할 수도 있다.

이미 우리는 칠레와 싱가포르, 유럽자유무역연합(EFTA)에 이어 거대경제권인 아세안 및 미국과 FTA를 체결했다. EU와도 협상을 진행 중이다. EU는 그간 우리와의 협상에 소극적이었지만 한미 FTA 협상 이후 태도를 바꿔 협상을 먼저 제의했다.

중국과 일본은 ‘원교근공’으로

또다른 거대경제권인 중국과 일본도 한미 FTA 이후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정부는 중국과 일본의 경우 신중하게 접근한다는 계획이다. 먼 곳에서 시장을 얻은 뒤 균형을 잡으면서 상대하는 게 유리하다는 판단에서다.


정부는 또 한미 FTA 체결 이후 과거의 태도를 바꿔 높은 수준의 FTA를 제의해온 멕시코와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캐나다와도 최종 타결을 위한 기반을 마련한 상태다. 거대 시장인 인도와도 2006년 3월 협상을 시작했다.

이밖에도 2008년 4~5월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6개국 경제협력체인 걸프협력회의(GCC)와도 협상을 개시할 예정이다. 남미 공동시장인 메르코수르와도 공동연구를 통해 협상 개시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다. 러시아도 우리와의 FTA 추진 의사를 밝혔다. 정부는 러시아가 WTO에 가입하면 추진한다는 복안이다.

현재진행형인 FTA 협상이 마무리되면 체결국은 46개국이 된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체결한 멕시코보다 더 많은 국가와 FTA를 체결하게 된다.

한미 FTA는 장밋빛 희망인가?

그러나 한미 FTA로 피해를 보는 산업 분야도 분명히 있다. 앞서 언급한 경제효과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11개 국책연구기관은 한미 FTA로 농업 분야에서 연평균 6700억원 가량 생산이 줄어들 것으로 내다봤다. 이중 축산업 피해액이 연평균 4664억원으로 전체 농업 피해액의 70%에 달했다.

또 지식재산권 보호기간이 50년에서 70년으로 늘어 추가지급 저작권료가 향후 20년 동안 연평균 71억 3000만원 증가할 것으로 예상했다. 제약업 분야에서도 신약 특허권 연장으로 국내업계의 복제의약품 출시가 늦어져 향후 10년간 국내 의약품 생산이 연평균 904억~1688억원 감소하리라고 추산했다. 환자나 보험재정이 추가로 부담해야 할 약값도 연평균 127~1364억원 정도로 내다봤다.

이밖에 케이블방송의 국산 프로그램 의무 편성비율 축소로 국내 영화와 애니메이션 산업 소득도 연평균 26억9000만원 감소할 것으로 전망했다.

“국내 피해에 최선을 다해 대비하겠다”

피해를 최소화하려면 정부가 발 벗고 나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정부는 한미 FTA 추진 이전부터 농업 등 피해부문 대책을 강조했다. 노 대통령은 정부 차원에서 한미 FTA에 대한 입장을 정했던 2005년 10월 8일 이렇게 말했다.

“농민에 대해 특단의 대책을 내놓자. 농업 문제는 언젠가 중국과 FTA를 할 것을 전제로 계획을 세워야 한다. 경쟁할 수 있는 부분은 전체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는 다 도태될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수입원을 개발해야 한다. 그럼에도 도태되는 농민은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 FTA로 개방되는 분야에서 이런 부분은 없나 점검해보자. 예컨대 유통업 개방 뒤 유통업이 대형유통업 패턴으로 바뀌면서 서민들, 재래시장의 몰락이 촉진된 것 아닌가.”

노 대통령은 2006년 8월 25일 한미 FTA 특위 의원 초청 만찬에서도 대책을 강조했다.

“국내 피해 문제에 최선을 다해 대비하겠다. 농업 부분의 피해가 있을 것이다. 한칠레 FTA 경우 실제 피해보다 더 많이 지원하고 있는데, 이에 준해서 대비하겠다. 제조업 분야는 농업과 다르다. 스스로 경쟁력을 강화하도록 뒷받침해줘야 하기 때문에 대응 대책이 다르다. 최선을 다해 준비하겠다.”

“한미 FTA와 정부 종합대책을 최대한 활용하자”

정부는 11개 국책연구기관이 내놓은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2007년 6월 28일 ‘한미 FTA 국내보완대책’을 마련했다. 농수산업에 대한 직접적인 피해 지원, 산업별 경쟁력 강화, 농어촌의 소득기반 확충 방안 등 종합적인 방안을 담았다.


2007년 11월 6일에는 ‘한미 FTA 농업부문 국내 보완대책’을 발표했다. 농업 경쟁력을 강화하고 소득기반을 확충해 한국 농업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앞으로 10년간 20조 4000억원을 투자한다는 내용이었다.

정부의 대책은 피해 예상 부문의 경쟁력 강화가 중심이다. 미래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장밋빛 혹은 회색빛이 되기 때문이다. 김현종 본부장은 2007년 6월 30일 한미 FTA 서명식에서 “한미 FTA는 우리에게 도전”이라고 강조했다.

“한미 FTA 및 경쟁력과 생산성을 제고하는 정부의 종합적인 국내 조치를 최대한 활용한다면, 농업분야가 경쟁력을 갖추고 번영하리라는 희망과 확신이 있다. 한미 FTA는 분명 우리에게 커다란 도전이다. 그러나 우리 국민은 이를 극복하고 기회를 전향적으로 활용하리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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