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사를 정치체제의 변화를 중심으로 시기구분하면, 집권체제를 이룩하기 이전과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가 확립된 시기, 그리고 그 체제가 이완된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건국부터 3세기말까지로, 이 시기의 정치체제는 나부체제(那部體制)라고 부른다. 두 번째 시기는 4세기부터 5세기까지로, 이때는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적 통치체제가 구축되어 있었다. 세 번째 시기는 6세기부터 고구려가 멸망하는 7세기까지의 시기로, 이때는 왕권이 약화되면서 유력 귀족들이 연합하여 정치를 운영하는 귀족연립체제였다. 각 단계 정치체제의 구조와 운영방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나부체제는 태조왕대에 확립되었다. 나부체제기의 고구려는 크게 다섯 개의 나부(那部)로 구성되었고, 각 나부는 또 몇 개의 정치집단들로 이루어졌다. 개별 나부와 나부를 형성하는 정치집단들은 모두 半自治的으로 운영되었다. 따라서 나부체제기의 고구려는 독자성을 지닌 다수 정치집단들의 누층적인 결집체였다고 할 수 있다.
나부체제기의 정치는 두 계통으로 분리되어 이루어졌다. 고구려국 전체에 대한 통치와 각 나부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통치가 그것이다. 국왕이 중앙관인(中央官人)을 등급별로 두고 나부의 대표자들인 대가(大加)들의 참여 아래 5나부 모두를 포괄하는 고구려의 국정을 수행해 가는 한편으로, 나부의 장들은 자체의 관인을 두고 개별 나부를 반자치적으로 운영해 갔다. 이때 귀족들을 세력크기에 따라 국왕 아래 일원적으로 편제하기 위해 관등제를 수립했다.
3세기 중엽 당시 고구려 관등으로는 상가(相加), 고추가(古鄒加), 대로(對盧), 패자(沛者), 주부(主簿), 우태(優台), 승(丞), 사자(使者), 조의(皂衣), 선인(先人)이 있었다.
이와 함께 나부의 장들도 자신의 휘하에 별도로 사자, 조의, 선인 등의 관인들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름이 같다 해도 이들은 왕의 사자, 조의, 선인과 同列에 설 수 없었다. 나부체제에서 가장 중요한 기능을 했던 기구는 국가의 모든 정책을 심의하고 의결하는 제가회의(諸加會議)였다. 국왕은 大加들의 협조와 동의를 얻어 정치를 운영했다. 이 체제 하에서의 영역 지배는 5나부민과 복속민에 대한 지배로 이원화되어 행해졌다. 나부민에 대해서는 각 나부의 대가들이 반자치적으로 운영했고, 복속민에 대해서도 간접적인 집단지배, 공납지배를 시행했다. 따라서 국왕도 자신의 직할지 외에는 나부의 長이나 복속민 집단의 대표를 통해 간접적, 집단적으로만 지배할 뿐 직접 통치를 할 수 없었다. 즉 나부체제의 기본 성격은 다차원적이고 간접적인 통치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대외정복전쟁이 가속화되고 농업생산력이 높아지면서, 왕의 권한은 점차 강화되었고 나부의 독자성은 해체되어 가 마침내 3세기 말경에는 나부체제가 붕괴되고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가 구축되었다. 소수림왕대에 도입된 율령은 중앙집권체제를 정비하는데 기준을 제공했다. 이전에는 나부별로 기존의 관습법을 독자적, 자율적으로 시행했으나, 이 이후에는 고구려 전역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보편적인 성문법을 시행하게 되었다. 이로써 다원적이던 정치조직을 일원화하게 되었고, 이는 국왕 중심의 국정운영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했다.
국왕의 권한이 초월적으로 강화되면서 이전에는 이원화되어 있던 관등제가 일원적으로 재편되었다. 영역의 확대에 따라 편입된 다수의 지배층들을 중앙집권적 지배질서 속으로 편제할 필요가 있었고, 수취관계 업무를 담당할 관인이 더 필요했기 때문에 형계와 사자계 관등이 모두 각각 분화되었다. 확대된 업무를 체계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관직도 더 분화되었고 행정관부도 증설되었다.
신분제도 정비되었다. 국초부터 신분은 귀족, 평민, 천민의 세 개로 나눠져 있었지만, 사회가 발전되면서 각 신분층마다 층급이 더 나눠졌다. 즉 지배층인 귀족층도 승진의 한계를 가진 몇 개의 계층으로 나눠졌고, 평민들도 경제적 부의 차이에 따라 다시 몇 개의 층으로 세분되었다. 고구려인 전체가 율령의 지배를 받게 됨에 따라, 이전의 집단예민(集團隸民)들도 같은 고구려민으로서 동일한 신분제 아래 편성되었다.
중앙집권적 통치체제 아래에서는 조세도 일원적으로 부과되었다. 이제 고구려왕은 국내의 모든 구성원들로부터 직접 세금을 거둘 수 있게 되었다. 국왕과 귀족의 차이는 현격하게 벌어졌다. 천손족인 왕은 대왕, 성태왕으로 불려지는 신성한 존재였고, 정치적으로 전제군주적인 성격을 띠었다.
이런 변화를 배경으로 지방지배방식도 간접통치에서 직접통치로 전환했다. 3세기 말 4세기 초부터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부터 지방관을 파견했다. 이 시기 지방관들은 교통로를 중심으로 설치된 크고 작은 성에 상주하면서 지역 지배를 담당했다.
4세기 중반까지는 주요 거점지역에만 지방관을 파견했지만, 4세기 중후반경 이후에는 하위 지방관이 지배하는 지역 몇 개를 포괄하는 범위를 상위지방관이 관할하는 형태로 발전했다. 요컨대 点的인 지배에서 면적인 지배로 전환되고 단위 지역 중심의 지방조직에서 중층적인 조직으로 재편되었던 것이다. 거점 중심의 지방지배를 ‘거점지배’라 칭한다면, 면적인 지배는 ‘권역지배’라 부를 수 있다. 이 단계에는 모든 주민을 호적에 등재하고 보편적인 법률에 따라 통치했으므로 전면적인 영역지배가 가능해졌다.
그런데 6세기에 들어가면서부터 중앙집권적 통치체제가 흔들리게 되었다. 대규모 정변이 발생하면서 왕권이 약화되고 중앙 정계가 분열되었으며, 경제적인 변동으로 民의 분화도 심화됨으로써 갈등과 혼돈을 겪게 되었다. 이런 내부 혼란을 틈타 백제와 신라가 연합해서 한강 유역을 탈취해 갔다. 서북부 지역에북제와 북주, 돌궐이 압력을 가해와 고구려의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 이처럼 국내외적으로 맞이하게 된 위기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귀족들은 타협을 통해 내분을 수습하고, 합의에 의해 최고위직인 대대로(對盧) 선임하는 귀족연립체제를 수립했다. 이 시기에 주요 국정은 국왕의 전제적인 통치가 아닌, 고위귀족들의 합좌회의를 해 결정되고 운영되었다.
그러나 비록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들의 영향력은 강화되었지만 중앙집권체제는 유지되었다. 중앙정부 조직도 이전과 다름없이 일원적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신분제도 유지되었다. 지방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왕명을 대신하는 지방관을 파견해 통치했다. 이때 크고 작은 성들을 제대성-제성-제소성의 3단계로 편제했는데, 전략 지역에는 현급 행정단위인 소성에 가라달을 지방관으로 두었고, 일반 지역에는 루초를 두었다. 소성 두, 세 개를 관할하는 상위 단위인 제성에는 처려근지를 파견했다.
그리고 제성 몇 개를 관할하는 최상위 지방관으로는 욕살을 임명했다. 그런 한편 말갈족처럼 이질적인 성격의 주민들에게는 그들의 존재양상에 맞게 간접 지배와 직접 지배를 병행, 실시했다. 일원적이고 보편적인 지방통치제가 실시되는 가운데 특수지배를 인정한 점은 다종족 국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강현숙(동국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제공: 해외홍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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