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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1주년 3.1절 계기 독립유공자 포상

2020.02.27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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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유의 초등학교 만세시위 주도한 박망아 선생 등 106명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한다’
                                     - 제101주년 3·1절 계기 독립유공자 포상 -





□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는 제101주년 3․1절을 맞아 1919년 3월 경북 의성에서 초유의 초등학교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박망아(朴望牙) 선생 등 106명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한다고 밝혔다.


  이번에 포상되는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23명(애국장 9, 애족장 14), 건국포장 14명, 대통령표창 69명으로, 포상자 중 생존 애국지사는 없으며, 여성은 5명이다.


  이로써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은 분은 1949년 포상이 시작된 이래 건국훈장 11,068명, 건국포장 1,331명, 대통령표창 3,532명 등 총 15,931명(여성 477명)에 이른다.


□ 앞으로도 국가보훈처는 “독립기념관, 국사편찬위원회, 국가기록원, 지방자치단체, 문화원 등 유관기관과 사료수집 등 협업을 활성화하고 국내외 소장 자료를 지속적으로 수집함으로써 독립유공자 발굴·포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그 분들의 나라사랑 정신과 독립정신을 드높이는 노력을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 한편, 제101주년 3․1절 계기 포상자 중 주요 인물들의 독립운동 공적은 다음과 같다.




  을사늑약 후 절치부심(切齒腐心)하다 의병에 참여해 순국한 이강복 선생

 전남 담양에서 의병에 참여하여 일본군과 전투 중 순국한 이강복(李康福) 선생께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전주이씨 효령대군의 후예로 을사늑약(1905)으로 국권을 빼앗기자 절치부심하다 1907년 담양에서 기삼연(奇三衍)(’62 독립장) 의진에 투신하여 같은 해 12월 27일(음) 금성산성(金城山城)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장렬히 전사했다. 일제의 의병토벌 기록인 이른바 『전남폭도사(全南暴徒史)』(1913) 조차 “거괴 기삼연이 이끄는 4백의 비도(匪徒)가 담양군 용문 성문리(금성산성 소재)를 점령하고 곧 담양을 습격하려고 함에 주재소 순사가 광주에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순창수비대와 협력해서 기선을 제압, 즉각 성문리에서 적을 공격하여 궤란시켰다. 적의 사망자 23, 부상자 30, 노획물은 화승총 5정”이라고 한 것을 보면 이 전투가 얼마나 처절한 항쟁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선생의 포상은『호남삼강록(湖南三綱錄)』(1952) 등에서 공적내용이 파악되고 족보(『전주이씨 효령대군 정효공파세보』, 1957)에서 순국 사실이 확인됨으로써 이루어졌다.  이강복 선생은 양반 명문가 출신으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사례이다.



  초유의 초등학교 만세시위 주도한 ‘늦깎이 초등생’, 박망아 선생

 3․1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고초를 겪은 박망아(朴望牙) 선생께 건국포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8세 때인 1919년 3월 경북 의성군 비안공립보통학교 4학년 재학 중 전교생에게 독립만세운동 참여를 권유하고 학교 뒷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다 체포되어 징역 8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비안공립보통학교의 만세운동 계획은 1919년 3월 9일 학생 중 연장자인 박만영(朴萬寧)의 집에서 이루어졌다. 선생은 회합에 참석한 동지들과 함께 전국으로 확산되는 독립만세운동에 호응하기로 하고 150명의 전교생을 교정에 집결시켜 3월 11일 장날 비안시장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결의하였다. 안타깝게도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일본경찰이 비안시장 일대의 경계를 강화하여 현장에 모여 있던 학생들의 만세시위는 무산되었다. 그러나 선생 등은 이에 굴하지 않고 만세시위를 계속하기로 하고 이튿날인 3월 12일 오전 동료 학생들을 학교 뒷산에 집결시켜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선생이 주도한 독립만세운동은 오늘날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10세 전후에 불과한 보통학교 학생들이 일으킨 초유의 항쟁으로 주목된다. 더욱이 선생이 옥고를 치른 뒤 22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한 것을 보면 일제의 악형이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동일 활동으로 박만영(’92 대통령표창), 우희원(禹熙元, ’06 건국포장) 선생이 포상되었다.

 

  임시정부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김양한 선생

 3․1운동 직후 비밀 독립운동 단체에 참여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김양한(金漢) 선생께 건국포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충남 홍성 출신으로 1920년 1월경 서울에서 비밀결사 주비단(籌備團)에 참여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활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발행한 공채를 매각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주비단은 1919년 3․1운동 직후 서울에서 조직된 비밀 독립운동 단체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여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선생에 대한 포상은「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예심종결결정」,「판결문」,「신분장지문원지」등에서 활동 내용이 확인되어 이루어졌다. 이로써 주비단 활동으로 포상을 받은 분은 선생을 포함하여 우재룡(禹載龍, ’63 독립장), 안종운(安鍾雲)․이재환(李載煥)(이상 ’90 애국장), 장응규(張應圭, ’11 애국장), 김성진(金聲鎭, ’95 애족장), 여준현(呂駿鉉, ’11 애족장) 등 7명에 이른다.





  남만주 일대에서 친일파 응징하다 장렬히 순국한 4인의 용사
 중국 남만주 일대에서 무장 독립운동을 펼치며 독립운동 탄압에 앞장서는 친일파들을 응징하다 순국한 네 분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다. 최봉희(崔鳳熙)․원승보(元承甫)․최준식(崔俊植)․최학기(崔學基) 선생 등은 1921년 5월 중국 봉천성 흥경현(興京縣)에서 독립단의 암살대원으로 친일파 김여연(金麗淵) 등을 처단하다 만주보민회(滿洲保民會) 조사반에 체포되어 피살 순국하였다. 이들은 1921년 이래 중국 남만주 본계현에서 독립단으로 활동하고 흥경현에서 독립단 단장으로 활약한 지광운(池光雲, ’16 애족장)의 부하로, 그의 휘하에서 30~40명의 대원으로 ‘대한독립 특파 암살대’를 조직하여 흥경․본계․환인현 등 남만주 일대에서 보민회 회원과 친일파 등을 응징하는 한편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특기할 것은 이들이 죽음의 순간까지 굴하지 않고 격렬한 저항을 계속했다는 사실이다. 일제의 정보보고(「조사반의 행동에 관한 건」봉천총영사, 1921.6.10.)에 따르면, 암살대의 활동에 간담이 서늘해진 현지의 일제 당국은 조선총독부에 원조를 청하여 3천원의 거금과 경찰인력을 지원받아 보민회원을 앞세우고 ‘조사반’을 편성하여 암살대에 대해 무자비한 토벌에 나섰다. 체포된 대원들은 무기를 압수당하고 흥경으로 압송되던 도중 “밧줄을 절단하고 압송자의 총기를 빼앗으려 하는 등” 격렬한 저항을 계속하였다. 네 분의 포상은 봉오동․청산리전투(1920) 직후 만주 독립군의 기세에 놀란 일제가 현지에 조선인 친일단체를 조직하여 독립운동 진영을 파괴하려 하자, 이에 정면으로 맞서 일제의 독립운동 진영에 대한 분열 시도를 응징한 사례로 주목된다.



  적지(敵地)에서 독립만세 외친 식민지의 여성 의학도, 현덕신 선생
 유학 중 일본제국주의 심장부의 한복판에서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다 체포된 현덕신(玄德信) 선생께 건국포장이 추서된다.  1896년에 태어난 선생은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일본에 유학,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에 재학하면서 조선여자친목회 조직에 참여해 서기로 활동하였다. 1920년 3월 1일 3․1운동 1주년을 맞아 동경 히비야[日比谷] 공원에서 동료 유학생 80여 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다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그러나 선생의 독립운동은 유학생 시절 한때의 의기(義氣)로 끝나지 않았다. 귀국 후 서울에서 부인과 의사로 활동하던 선생은 1920년대 후반 국내외 독립운동 진영에서 민족협동전선운동이 일어나고 1927년 서울에서 근우회(槿友會)가 결성되자 이에 적극 참여하여 집행위원과 정치부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어 전남 광주에 병원을 개업하면서 거처를 옮긴 뒤에는 1929년 6월 근우회 광주지회 설립에 참여하여 활동을 계속하였다. 근우회는 일제하 최대의 민족협동전선운동 단체인 신간회(新幹會)의 자매단체로, 여성계몽과 사회운동의 조사․후원, 해외동포 구호 모금운동을 전개했던 여성 민족협동전선 조직이었다. 선생에 대한 포상은「사상문제에 관한 조사서류」등 일제 정보문서와 『동아일보』등의 자료에서 공적내용이 확인되어 이루어졌다. 1919년 3~4월 한성정부(漢城政府) 수립운동에 기독교계 대표로 참여하고 국민대회 간부로 자금을 제공한 공로로 2004년 건국포장을 받은 현석칠(玄錫七) 선생이 오빠이며, 1926년 동아일보 기자로 일제 식민통치를 비판하는 글을 게재하여 재판에 회부되고 1927년 신간회 발기인으로 활동한 공로로 이번에 건국포장이 추서된 최원순(崔元淳) 선생이 배우자다.




붙임   1. 3·1절 정부 포상자 명단(106명) 1부.

          2. 3·1절 주요 포상자 공적 세부 내용 1부.  끝.

“이 자료는 국가보훈처의 보도자료를 전재하여 제공함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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