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성훈 경찰대 행정학과 교수 |
도처에 잠복하고 있다가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위험의 실체들로 인해 시민들의 일상생활 위에 불안감이 드리워져 있다. 화장실이라는 평범한 생활공간에서 발생한 조현병 환자의 습격사건은 마치 악몽과 같은 현실이다. 이번 사건을 피해망상에 의한 ‘묻지마 범죄’라고 규정한 당국의 발표를 바라보며 두려움을 넘어 공포를 느끼게 된다.
‘왜 또 다시 이런 일이?’라는 질문은 ‘묻지마’라는 단어 앞에 하릴없이 묻혀 버리고 통제의 영역 밖에 존재하는 거대한 위험의 실체가 우리를 압도한다.
또한 이번 사건은 우리나라에서 여성으로 살면서 지불해야만 하는 추가적인 ‘위험비용’을 확인시켜 줬다. 울리히 벡은 위험이 사회적 계급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적용된다는 점에서 ‘민주적’이라고 규정한다.
하지만 적어도 한국사회에서 범죄의 위험은 여성들에게 불공평하게 적용된다. 남성과 비교할 때 여성들은 저지르는 범죄의 규모에 비해 당하는 피해의 규모가 월등히 크다. 우리나라 여성들이 남성들에 비해 세 배 이상 범죄를 두려워하는 것이 지나치게 민감해서가 결코 아니다.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시작된 추모의 물결이 전국의 주요 대도시로 번져가는 사회현상은 이미 여성들의 일상 속에 일부가 돼 버린 범죄의 위협과 공포에 항의하는 애타는 절규를 방증한다.
사건발생 초기에는 화장실, 그리고 지금은 조현병 환자의 위험성에 대한 논의가 뜨겁다. 하지만 화장실과 조현병 환자가 위험한지를 묻는 것은 적절한 질문이 아니다. 오히려 화장실과 조현병 환자가 언제 위험해지는지를 묻는 것이 올바른 질문이다.
공공장소의 모든 화장실이 위험공간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조현병 환자들이 위험인물은 아니다. 관리되지 않고 방치된 화장실과 정신질환이 위험한 것이다. ‘깨어진 유리창 이론’은 방치된 공간의 위험성을 잘 말해준다.
마치 방치된 깨어진 유리창처럼 지역사회의 무질서 문제에 관리와 통제의 손길이 미치지 않을 때 범죄율은 증가하게 된다. 실제 조현병 환자는 일반인에 비해 폭력범죄의 위험성이 낮다. 그러나 적절한 치료를 통해 관리되지 않으면 충동조절장애를 겪게 되고 타인 또는 자신에게 치명적인 폭력행위로 이어질 위험성이 증가한다.
위험관리와 관련해 세 가지 정책적 방향을 제안한다.
첫째, 문제해결(problem-solving) 중심의 관리체계 마련이다. 문제해결 중심의 접근방법은 범죄사건의 궁극적인 원인이 되는 문제들을 선제적으로 해결함으로써 범죄위험성을 감소시키는 전략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는 전조현상을 중심으로 한 위험의 탐지(scanning), 문제의 원인에 대한 과학적이고 전문적인 분석(analysis), 사례별로 구체적인 맞춤형 해결방식의 적용(response), 그리고 객관적인 사후평가(assessment)로 구성되는 환류과정을 통해 진행된다.
또한 이러한 과정은 지역주민, 외부전문가, 지자체 및 모든 유관기관들 간의 협력적 네트워크와 참여를 바탕으로 하며 문제 해결을 위해 필요한 지역사회 내의 모든 자원을 결집시키는데 집중한다. 경찰은 112신고, 각종 민원, 여론청취 등의 경로를 통해 위험공간을 선제적으로 탐지할 수 있어야 한다. 정신보건기관은 치료의 중단, 폭력적 행위 등의 전조현상을 보인 정신장애인들을 사전에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사회복지적 접근이 우선돼야 한다. 정신장애인의 폭력 위험성을 낮추기 위해서는 치료를 통한 예방이 중심이 돼야 한다. 한 연구에 의하면, 우리나라 정신장애인 치료율이 외국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정신장애인들에 대한 복지서비스를 확대해 질병에 대한 적절한 치료와 관리를 제공하고 아울러 이들이 일반인과 더불어 사회 속에서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질병을 치료받지 못한 정신장애인들이 사회적 선입견과 편견 속에서 구직 실패, 생계 곤란 등을 경험하면서 병증이 악화된다고 분석하고 있다.
폭력범죄 위험요인의 측면에서 조현병 범죄자와 일반범죄자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 두 집단 모두 전과경력이 뚜렷하고 특히 사회적 대인관계, 직업상의 실패와 좌절, 경제적 어려움, 가족 간의 갈등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공통된 폭력성 위험요인으로 작용한다.
위험공간의 문제 역시 기본적으로 지역사회복지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지역사회의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이 연계해 지역사회의 활성화, 지역 환경 개선 등의 사업을 펼쳐나가야 한다. 시민들의 전반적인 삶의 질을 향상시켜 안전에 대한 욕구를 자극하고 이를 원동력으로 위험공간들을 관리, 제거하는 방식이 바람직하다.
마지막으로, ‘젠더 중심적’(gender-centered) 범죄예방정책으로 전환돼야 한다. 그동안의 범죄예방정책은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젠더 중립적’(gender-neutral)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생활양식을 고려할 때 여성과 남성의 주요 활동공간과 이동경로에 차이가 있으며 1인가족의 경우에는 주거지의 분포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위험공간의 문제를 다룰 때 이러한 차이가 고려돼야 한다. 예를 들어 지자체에서도 기존의 범죄안전지수 외에 별도의 ‘여성안전지수’를 산출해 지역사회의 여성안전수준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할 필요가 있다.
울리히 벡은 근대사회 속에서 위험을 피할 수는 없지만 이로 인해 절망하거나 무력감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오히려 위험의 실체를 정확히 인식하고 공론의 장을 통해 문제의 원인을 철저히 분석한 뒤 시민들의 참여와 유대를 바탕으로 위험에 대해 공동으로 대응할 때 위험은 ‘성찰적 근대화’의 계기가 된다.
‘강남역 살인사건’을 비롯해 최근 발생한 일련의 우발적, 충동적 범죄들로 인해 안전에 대한 불안증이 미세먼지처럼 우리 주변을 떠돌고 있으며 이로 인해 시민들의 자유로운 삶은 위축되고 말았다.
이 시점에 우리 사회에게 요구되는 것은 위험대상에 대한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협력적 대응이다. 관리와 통제 아래에 놓일 때 위험은 더 이상 위험하지 않다. 한 무고한 여성의 죽음이 안전한 한국사회를 향한 고귀한 디딤돌이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