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순규 남극세종과학기지 제31차 월동연구대장

2007년 남극에 첫발을 디딘 후 거의 해마다 남극을 방문하여 연구하고 있고, 올해는 월동대장으로서 세종기지에서 근무하고 있는 저에게 남극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사람’입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사람들에게 부대끼고 사람으로 인해 속상해하는 일이 잦은 우리 사회에 비해, 열악한 자연환경으로 인해 생존을 위협받는 남극은 사람들이 열린 마음으로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최선을 다해서 서로를 돕는 곳입니다.

직장에서는 같이 출퇴근하면서도 평소 이야기할 기회가 없던 동료연구원과 야식으로 라면을 같이 끓여 먹으면서 사는 이야기와 연구 이야기를 하는 곳이기도 하고, 처음 만나는 외국인 과학자와 어떤 연구에 관심이 있는지, 같이 할 수 있는 연구는 없는지, 또 각 나라의 문화는 어떤지 마음을 열어 놓고 이야기하는 곳입니다. 음식재료가 떨어지면 음식을 빌려주고, 신선한 야채나 과일이 보급되면 한 상자 나눠 먹고, 고무보트의 부품이 망가지면 이웃기지에서 부품을 빌려다 보트를 수리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세종기지가 위치한 킹조지섬에는 여덟 개의 나라가 일 년 내 사람이 거주하는 상주기지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각국 기지에는 정부를 대표하는 고위 공무원이나 국회의원 또는 외교관이 수시로 방문하고, 이들은 이웃한 다른 나라 기지를 방문하는 외교행사를 가집니다. 올해도 중국과 콜롬비아의 고위 공무원이 세종기지를 방문하였고, 험한 날씨 때문에 무산되기는 했지만 페루의 고위 공무원과 외교관이 세종기지 방문계획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지난 2월 콜롬비아 해군의 세종기지 방문 모습.

우리나라도 올해 세종기지 30주년 기념행사와 연계하여 김영춘 해양수산부 장관께서 칠레 프레이기지를 방문하여 그간의 협조와 지원을 기리는 감사패를 전달하기도 했습니다. 남극에서의 이러한 외교적인 방문은 일반적인 정부 간 외교행사에 비해 무전이나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간소하게라도 이루어지는 편입니다. 특히 교류가 많지 않거나 외교적으로는 적대적인 관계의 국가 간에도 서로 방문하고 협력하며 지내게 되는 것이 이곳 남극에서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전 지구적 규모의 기후변화가 가장 빠르고 크게 반영되기 때문에 남극환경과 생태계의 변화를 가장 먼저 관찰하고 연구할 수 있는 곳이며, 이곳의 변화는 전 지구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미래의 기후와 인간 생활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 예측하고 준비할 수 있는 곳이 남극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를 포함한 많은 나라들이 전 인류에 기여한다는 명분으로 남극 연구에 대한 투자를 늘려가고 있습니다. 칠레는 남극반도 지역의 연구 리더십을 확보하기 위해 지난 10년간 남극연구에 대한 투자를 큰 규모로 늘려, 현재는 상당한 수준의 연구 성과를 이뤄내고 있습니다. 군대 중심의 남극기지를 운영하고 있던 우루과이도 최근 연구 활동을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지난 10년 동안 쇄빙연구선 아라온을 투입하고 남극 빅토리아랜드 지역에 장보고기지를 건설하였습니다. 그리고 올해는 세종기지의 노후화된 건물들을 철거하고 좋은 시설의 연구동을 지었습니다. 또한 낙후된 연구 장비를 교체하고 새로운 장비들을 투입하여 인근에 있는 많은 기지들 중에서 최고의 시설을 갖춘 기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에 따라 포르투갈, 브라질, 미국, 칠레, 루마니아,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러시아, 스페인 등 다양한 나라의 과학자들이 세종기지 방문과 체류를 희망하고 있으며 해가 갈수록 많은 외국과학자들이 세종기지를 방문하고 있습니다.

남극세종기지 월동연구대가 1월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다.

세종기지를 기반으로 한 킹조지섬의 생태계 연구는 우리 극지연구소의 장기투자를 통해 기초 데이터 확보, 분석기술 개발, 연구데이터 관리체계 구축 등 기반부터 확실히 다지는 방법으로 연구를 진행했으며, 이제 환경변화가 이곳에서 살아가는 생물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결과 도출의 단계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훌륭한 연구시설과 탄탄하게 다져온 연구기반을 바탕으로 국제적인 연구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지시설과 연구기반을 공유함으로써 남극 연구의 주도권을 확보하는 일입니다.

칠레 정부는 남극반도와 킹조지섬을 포함한 남쉐틀랜드군도의 수많은 섬에서 다양한 연구를 할 수 있도록 연구선을 지원하고 있으며, 우리나라를 포함한 다양한 나라의 과학자를 칠레 연구선에 초청함으로써 남극반도 지역 연구의 중심에 서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한된 운송수단으로 인해 킹조지섬의 맥스웰만에 한정하여 연구를 수행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칠레과학자들과 손잡고 공동연구를 수행할 때 연구영역을 크게 확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더해 우리 정부가 재원을 마련하여 국제공동연구를 선도한다면 남극반도 지역 과학연구의 리더십을 확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남극은 미지의 장소, 험난한 자연환경의 장소, 기후변화의 척도이자 지구환경에 영향을 주는 장소입니다. 또한 사람이 얼마나 서로를 돕고 살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장소이며 과학을 통해 관계를 증진하고 과학 활동 자체가 국가의 위상을 높여줄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이러한 사실에 기반하여 정책이 수립되고 선진국답게 인류에 기여하는 대한민국이 되는 모습을 상상하며 오늘도 기지 주변의 많은 생명들과 바다 건너 이웃기지를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