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에 나선 조선 3대 왕 태종이 화살로 노루를 쏘다가 말이 거꾸러지는 바람에 땅에 떨어졌다. 다행히 다치지는 않았으나 태종은 창피했던지 좌우를 돌아보며 “사관(史官)이 알게 하지 마라”고 말했다. 그런데 태종 4년(1404) 2월 8일의 실록에는 왕이 말하지 말라고 했다는 것까지 기록돼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이렇게 왕의 일거수일투족을 남김 없고 가림 없이 기록함으로써 1997년 유네스코 세계 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다. 조선 태조로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간의 역사를 연월일 순서에 따라 편년체(編年體)로 엮은 책은 한국인들의 치열한 기록정신과 엄정한 역사의식의 소산이다. 2014년 말 현재 유네스코에 등재된 우리나라의 세계 기록문화유산은 11건으로 세계에서는 5위, 아시아에서는 1위다.
왕조나 국가기관이나 집단이 아닌 개인들 중에서도 기록에 충실한 사람이 많았다. 우리 선조들의 기록 중에서는 유희춘(柳希春·1513~1577)의 ‘미암일기(眉巖日記)’나 유만주(兪晩柱·1755∼1788)의 ‘흠영(欽英)’이 유명하다. 유희춘의 일기는 11년, 유만주의 일기는 13년 치 전부가 남아 있다. 그런가 하면 영·정조 대의 중급 무관이었던 노상추(盧尙樞·1746~1829)는 68년 동안이나 일기를 썼다. 그의 일기를 통해 우리는 개인과 가문의 사연은 물론 그 시대의 사건과 일을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숱한 병란(兵亂)과 참화에 의해 많은 기록이 멸실된 채 치열한 기록전통이 언제부턴가 무너지고, 이미 있는 것도 제대로 보존 발굴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이유가 여러 가지이겠지만 정직한 기록이 오히려 개인의 신상 보전이나 출세에 지장을 주고 기록 때문에 피해를 당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기록문화는 경제개발과 먹고 사는 문제에 의해 뒷전으로 밀려났다. 지금 우리는 무엇이든 기록하고 남기는 일본인들을 부러워하며 그들을 본받자고 말하는 실정이다.
광복 70년 분단 70년을 앞두고 지난해 말 출간된 <광복 1775일>(우정문고)은 이런 ‘시대 기록’의 결정판이라고 할 만한 책이다. 부영그룹 이중근 회장이 1945년 8·15광복에서 1950년 6월 24일까지 1,775일간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일지 형식으로 정리한 책은 2,544쪽 분량이나 된다. 사실 기록 자체도 중요하지만 국내외에서 수집한 희귀한 사진자료가 참 많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시기는 지난해 출간한 <6·25전쟁 1129일>에서 거슬러 올라간다. <6·25전쟁 1129일>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부터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휴전 협정 때까지 한반도를 중심으로 국제사회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수집해 기록한 책이다.
이 회장은 지난해 말 열린 <광복 1775일> 출판기념회에서 “나이를 먹으면 회고록을 쓰던데, 전부 고생하다가 성공했다는 얘기뿐”이라며 “그런 책은 이미 많으니 우리가 살아온 역사에 대해 모범이 될 만한 책을 하나 만드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고 출간 배경을 밝혔다.
이런 사실 기록서를 내기로 마음먹은 것은 2004년 무렵이라니 이미 10년 전부터 추진해온 일인 셈이다. 올해 74세인 그는 앞으로도 이런 책을 계속 낼 계획이라고 한다. 출판시장이 위축된 데다 잘 팔리기도 어려운 책인데, 돈이 있다고 해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대한민국의 뿌리에 대한 역사를 올바로 이해하고, 이를 토대로 통일과 국가발전의 지혜를 모색해 미래 한국의 좌표를 설정하는 데 기여하고 싶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 회장은 “1년 365일 하루도 쉬지 않고 출근하고 특별한 취미도 없어 이런 책을 내는 데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부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 회장이 한 말 중에서 인상적인 것은 이런 것이다. “평지에 있는 나무만 똑바로 서 있는 게 아니다. 경사지에 있는 나무도 땅은 경사졌지만 나무는 똑바로 서 있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갖고 있더라도 상대를 인정하는 사회 분위기가 정립돼야 한다고 본다.” 맞는 말이다. 그런 사회가 성숙한 사회일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서로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다르다는 것부터 알 수 있어야 하고 정상적인 평지 관점에서 볼 때 나무가 비뚤어져 있다고 사실대로 쓸 수 있어야 한다. 조선시대에는 사법(史法)이 매우 엄해 사관은 사실을 그대로 쓸 수 있었다. 사초의 진실 보전을 위해 목숨을 걸고 지킨 사관들의 서슬 푸른 기개와 대쪽 같은 절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의 큰 유산이다. 그런 전통과 정신적 자산이 이 시대에 그대로 승계돼야 한다.
사실(史實)을 뛰어넘거나 사실(事實)을 이기는 진실은 없다. 만약 그런 게 있다면 진실이 아니라 조작이며 가짜다. 광복 70년 분단 70년인 올해 <광복 1775일>과 같은 사실 기록과 증언이 더 많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기록은 어디까지나 정직하게 취사선택해 수록해야 하고, 개인 증언은 사실 왜곡이 없게 최대한 객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 임철순 이투데이 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원장
언론문화포럼 회장, 자유칼럼그룹 공동대표. 보성고 고려대 독문과 졸. 1974~2012 한국일보사 근무. 기획취재부장 문화부장 사회부장 편집국장 주필, 이사대우 논설고문 역임. 현재는 이투데이 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