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동북부의 주요 문화도시 라이프치히는 바흐가 일생의 마지막 27년을 보냈던 곳이다. 이 곳에서 일요일 오전에 지방열차 편으로 북쪽으로 약 30킬로미터를 달려 헨델이 태어난 도시 할레를 지나 다시 북쪽으로 30킬로미터를 달려 안할트 지방의 쾨텐(Köthen, 옛 표기는 Cöthen)에 도착했다.
쾨텐이라면 웬만한 지도에는 나오지도 않는 인구 2만 7000명 정도의 작은 시골 도시이지만 바흐의 행적을 찾아보는 여행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쾨텐 역을 나와 서쪽으로 향하니 고딕 양식의 성 야콥 교회의 높은 쌍둥이 첨탑이 멀리서 시선을 이끈다.
쾨텐 시내 중심으로 들어가는 길. 고딕식의 성 야콥 교회가 길을 인도하는 듯하다. |
이 교회의 측면과 직선으로 연결되는 길을 따라 약 150미터 더 서쪽으로 걸어가자 조그만 광장이 펼쳐지고 광장 한가운데에는 분수와 바흐의 기념상이 눈에 띈다. 바흐의 흉상을 유심히 살펴보니 젊은 시절의 얼굴이다. 그가 쾨텐에 처음 온 것이 1717년이니까 32살 때이다.
이 광장의 이름이 바흐 광장(Bachplatz)이다. 그가 살던 집이 어디엔가 가까이 있을 것 같아서 길가는 사람에게 물어보려고 하는데 일요일 오전이라서 그런지 거리에 사람이 없다. 마침 유모차를 밀고 가는 한 젊은 여인이 보여 다가가서 물었더니 마치 엄청나게 어려운 질문을 받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성 야콥 교회쪽으로 되돌아가서 왼쪽 길로 쭉 들어가면 있을 거라고 한다.
그녀에게 감사하다고는 했지만 대답이 신통치가 않다. 그 곳에는 레오폴트 공의 궁전이 있는데 그녀는 바흐가 그곳에서 살았던 것으로 혼동한 모양이다. 바흐 기념상 바로 뒤의 건물 앞에 서서 지나는 사람을 다시 기다렸다. 그런데 이 건물 창가의 벽에 조그만 명판이 부착돼 있어서 가까이 다가가서 읽어보니 바로 이 집이 바흐가 살던 집이란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바흐의 집을 바로 등 뒤에 두고 괜히 한참 헤맸다. 바흐가 쾨텐에서 5년 반 동안 살면서 두 군데서 거주했는데 첫 번째 살던 집은 보존돼 있지 않고 1719년부터 살던 이 집만 남아있다. 이 집은 1719년에 세워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첫 번째 세입자가 바흐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바흐 기념상이 있는 바흐광장. 기념상 바로 뒤에 바흐가 살던 집이 보존돼 있다. |
아이제나흐 출신인 바흐는 17세 때부터는 주변의 여러 소도시에서 일자리를 얻게 되는데 쾨텐으로 오기 전에는 바이마르 궁정에서 음악감독으로 있었다. 안할트-쾨텐 공 레오폴트의 궁정 음악감독으로 온 바흐는 이곳에서 여유를 갖고 창조적 재충전을 할 수 있었다.
그것은 레오폴트 공이 첼로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비올라 다 감바(viola da gamba)를 능숙하게 연주할 정도로 열렬한 음악애호가였고 또 경건한 칼뱅주의자로 바흐에게 종교음악 작곡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흐는 바이마르 시절과는 달리 종교적 요구와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세속음악 작곡에 전념 할 수 있었다. 그는 특히 오케스트라와 오케스트라에 쓰이는 악기를 위해 작곡하는 데 몰두했는데 바로 이 시기에 레오폴트 공 궁정의 저녁음악회를 위해서 여러 협주곡을 작곡했다.
바흐 기념상. 그는 32살 때 쾨텐에 와서 5년 반 동안 활동했다. |
그녀는 심지어 레오폴트 공이 ‘하인들’과 함께 ‘무의미한 짓’을 하는 것을 막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바흐는 음악가를 하인 취급하는 여주인 밑에서 더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속히 다른 도시에서 안정된 수입이 보장되는 지위를 확보해야만 했다.
이리하여 그는 협주곡 6개를 깨끗이 필사해 혹시나 하여 안면이 있는 브란덴부르크 후작 크리스티안 루트비히에게 헌정했다.
이것이 바로 바로크 양식의 절정을 이룬다고 평가되는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으로 바흐의 모든 음악적 능력과 경험이 집약된 작품이다. 하지만 바흐는 일자리를 기대하지 않는 편이 차라리 나았으리라. 후작의 궁정악단은 쾨텐의 악단과 달리 워낙 소규모라서 그의 작품을 제대로 소화할만한 수준이 아니었던 같다.
그러던 중 마침 라이프치히의 토마스 음악학교의 음악감독 자리가 비었다. 1723년, 바흐는 쾨텐 생활을 모두 접고 가족을 데리고 더 넓은 세계로 갔다. 독일어로 바흐(Bach)란 ‘개울물’이란 뜻이다. 바흐는 이제 개울물이 아니라 넓은 강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후 그가 다시 쾨텐으로 잠시 돌아온 것은 1729년 3월 23일. 성 야콥 교회에서 레오폴트 공의 추모 예배 때 자신이 작곡한 칸타타를 지휘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이 칸타타는 종교음악이었다.
◆ 정태남 건축사
이탈리아 건축사이며 범건축(BAUM architects)의 파트너이다. 건축 분야 외에도 음악, 미술, 언어, 역사 등 여러 분야에 박식하고, 유럽과 국내를 오가며 강연과 저술 활동도 하고 있다.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 <로마역사의 길을 걷다>,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이탈리아 도시기행> 외에도 여러 저서를 펴냈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